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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6/09/26 00:08:14
Name 친정간금자씨!
Subject 조금 늦은감이 있지만....안시성 전투에 대해서...
그제 주말에 대조영이라는 드라마를 하더군요...

우선 첫회부터 고구려가 멸망하기전 안시성 전투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가더니..

점점 흥미있더군요.. 시작한지 꾀된 선배격 드라마 연계소문이 있지만...전투장면이나..

안시성싸움에 연계소문이 있다는 말도 안되는 픽션을 가미하여 재미가 팍 상실된 마당에

대조영이라는 드라마는 참 현실성 있더군요. 머 객관적인 판단이지만은요..

머 그래도 지금 중국이 동북공정 가지고 고구려사가 자기 역사라고 우기는 마당에 안시성

전투를 보며 쾌감을 느겼습니다. 저도 잘 몰랐던 역사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혹시 안시성 싸움에 대해서 모시는 분이 있을까 해서 이렇게 올려봅니다.!!

그건 그렇고 당태종(이세민)이 패하고 돌아갈때 잘싸웠다고 양만춘에게 비단을

100필을 선물했다고 하는군요. 서로 적으로 피를 보고 싸웠지만은 참 머라고 할까.....

적의로서 예를 갖춘 장군 같더군요... 아무튼 양만춘과 안시성 전투에 대하여 새롭게 알았

습니다.

안시성전투





  


645년(보장왕 4)에 당나라 태종이 지휘하는 군대가 대규모로 고구려를 침공하여 3개월가량 안시성을 포위, 공격했으나 끈질긴 항전으로 이를 물리치고 고구려가 승리한 싸움.

안시성의 위치는 현재 랴오둥 반도의 하이청잉청쯔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644년 6월 당은 고구려의 요동공격을 명령한 후 11월 수륙 양면으로 약 1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당군은 각종 공성용 기구를 총동원했다.

당 태종은 다음해 2월에 뤄양을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 요동에 진입한 이세적의

군대는 개모성을 함락시키고, 장량의 수군은 비사성을 함락시켰다. 태종이 직접 독려하는

가운데 645년 5월에는 요동성까지 함락시킨 뒤 백암성을 공격했다. 백암성이 6월에 함락

되자 태종은 안시성이 연개소문의 정변 때도 안시성 성주가 복종하지 않아 공격을 받았으

나 항복시키지 못한 점을 들어 우회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보급로가 차단될 것을 염려

한 이세적의 건의를 받아들여 안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중앙정부에서는 고

연수·고혜진의 지휘 아래 말갈군을 포함하여 15만 명의 군사를 내어 안시성 구원을 위해

출동시켰으나 당군의 작전에 말려들어 고전 끝에 항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립된 안

시성의 저항이 완강하자 이세적은 태종에게 성이 함락되면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파묻겠

다고 했다. 포위공격이 성과가 없자 당의 장군들은 동남쪽에 있는 오골성을 먼저 치고 곧

바로 평양으로 직공하자고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종의 손자 무기가 오골성을 공격할

때 후방에서 안시성의 고구려군이 역공할 가능성이 있다며 반대하자 이를 받아들여 계속

안시성을 공격했다. 하루에도 6~7차에 걸쳐 당군의 공격이 계속되었고 포거가 날린 돌에

성벽이 무너지면 고구려군은 재빨리 목책을 세워 방어했다. 당군은 성 동남쪽에 성과 같

은 높이로 흙산을 쌓아 성 안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흙산이 거의 완성될 즈음에 갑자기

무너지면서 성벽을 무너뜨리자 고구려군은 재빨리 성벽 밖으로 나와 이를 점령하고, 나무

를 쌓아 불을 지르니 당군은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태종은 책임자의 목을 베고 싸움을 독

려하여 마지막 3일간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으나 끝내 실패했다.




이렇게 공방을 계속하기를 3개월에 걸쳤으나 성은 함락될 전망이 없었고 당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져 있었다. 때마침 9월이 되어 요동에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군량도 다하게 되자 태종도 크게 실망하여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철군하면서 안시성 성주에게 비단 100필을 선물했다. 나중에 태종은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원정을 못하게 했으리라"고 후회했다고 한다. 이로써 당의 1차 고구려원정은 실패로 끝났고, 그후 당에서는 일거에 공격하기보다는 자주 소부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피로하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 647, 648년에도 소규모 공격을 감행했지만 별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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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우
06/09/26 00:15
수정 아이콘
문득 생각난게, 당태종이 동원한 군사 10만에 대한 의혹입니다.

당태종은 중국 역사상에서도 손꼽히는 명군이기에, 그런 명군주가 기록한 실패는 작게 기록하고 싶은 유혹에 군세를 축소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있더군요.
친정간금자씨!
06/09/26 00:31
수정 아이콘
명군주라 하더라도 전투에서 패배하였지만 선물까지 하는 당태종이라..

그리 쪼자하게 기록했지는 않을까합니다. 저 정도 배포면 정말 명군이긴

합니다. 그리고 안시성전투 승리 할수있었던것은 양만춘장군이 지형의이

점을 살려 방어를잘했지만은 약간의 운도 따랐고 하늘이 도와주었줘.. 토산이 비때문에

무너진걸 보면...그래도 양만춘 장군도 대단합니다.

아니면 당태종이 만약 허위로 기재를 했다면 더많은 대군을 보냈지 않았을까요?? 한 20만??? 반으로 줄여서 10만으로 쇼부쳤던가요.ㅋ 쪽팔려서
담백한호밀빵
06/09/26 12:15
수정 아이콘
씁쓸한건 어렸을때부터 왠지 모르게 제가 가장 좋아했던
양만춘 장군의 기록은
고작 안시성전투에서 지휘한 안시성의성주였다는것뿐...
양만춘장군의 기록을 자세히 아시는분 좀 가르쳐주세요
어렸을적 "삼국기"라는 게임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 한반도와 수나라 당나라로 하는 삼국지같은
게임이었어요 "지관"인가 하는 회사였는데 아마 대만이나 중국게임
같았어요.
담백한호밀빵
06/09/26 12:15
수정 아이콘
그게임할때 양만춘장군 사랑했어요
김테란
06/09/27 03:05
수정 아이콘
당태종이 눈썹이 휘날리도록 허겁지겁 퇴각한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당시의 당태종이 얼마나 위급했는지는 당시 퇴로 지역들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오히려 신빙성이 있다 볼 수 있죠. 김부식이 각지를 돌아다니며 그런 이야기들을 수집했을리 없을테고 중국사서등을 바탕으로 안시성전투를 묘사했을 뿐이라 봅니다. 그리고 양만춘이 바로 성문을 열고 나와 공격하는 바람에 당태종이 거의 죽을뻔한걸 설인귀가 구했다는 얘기 또한 만주에서 전해지고 있는데, 비단 100필이라니.. 중국 사학자들도 신뢰하지 않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버젓이 적혀있다는게 참 서글프군요. 비단 100필, 포로를 돌려보내주는 인정을 베풀었다 등은 당태종의 치욕을 덮어주기 위한 근거없는 기록들입니다.
김테란
06/09/27 03:29
수정 아이콘
그리고 당시 보급이 끊겨 조급했던건 당군였고, 안시성을 쉽게 공략못하자 무너뜨려서 공격하려고 토산을 쌓은것입니다. 결코 수비하려 쌓은게 아니죠. 당군이 무너뜨렸는지, 자연현상에 의해 무너졌는지등은 알 수 없으나, 그게 원래 당군의 의도였고, 고구려군이 운이 좋았던게 아니죠. 아마 승산이 점점 떨어져가는 상황에서 내밀 수 있는 마지막 카드였지만, 토산이 무너진 상황의 백병전에서 되려 호되게 당하고 퇴각했다 이정도 였던것 같습니다. 토산을 사수하지 못한 죄를 물은 인물들의 직책 당시 행동들의 기록을 봐도, 당태종이 직접 공격시켰는데 안먹혀들고 패하자 그 책임을 엄한데다 돌린것으로 생각됩니다.
06/09/27 10:08
수정 아이콘
10만은 거짓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수나라 양제때 처럼 당나라가 완벽하게 안정되지 않은 시기에 당 태종은 군세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수나라 양제때에는 대운하도 건설할 정도로 안정되었으나, 당 태종은 아버지를 끌어내리고 황제에 오른지라 천하의 안정도 되어있지 않았고, 당 태종 사후 당 고종(사실은 측천무후)이 천하를 안정시켰죠. 그렇기 때문에 10만은 거짓이 아니라고 보고, 당 태종의 인정배풀기는 거짓이죠. 어쨋든 안시성전투는 연개소문이 별로 간섭 안한 전투로 유명한 편이기에 연개소문을 안시성전투의 히로인으로 집어넣은 드라마 연개소문은 좀 아니라고 봅니다.
06/09/27 10:12
수정 아이콘
양만춘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사실 사서에 기록이 되어있지도 않으며 고작 여러명의 역사가들이 이름을 간신히 전한 정도에 불과하거든요. 그러나 그는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했을 때 반대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자치성으로 두었으며, 그래서 안시성전투가 양만춘이 지휘했다는 것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휘하에 두었다면 자신이 직접 지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 이후 몇년이 지나서 안시성이 붕괴되었다는데, 양만춘장군이 거기서 전사를 했는지 혹은 그 전에 죽었는지는 아직 알려진 기록이 없습니다.
친정간금자씨!
06/09/27 14:16
수정 아이콘
네이버에는 이렇게 나와있는데요??
쩝...서로 역사학자들 마다 틀린데...머가 맞는지 ㅋ

645년(고구려 보장왕 4) 안시성에서 고구려와 당나라 군대 사이에 벌어졌던 치열한 공방전(攻防戰).







본문
안시성은 당시 인구 약 10만에 이르던 고구려의 영지로,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하이청[海城] 남동쪽에 있는 잉청쯔[英城子]이다. 643년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라는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차후 신라를 침범하지 말도록 권유하였으나 고구려가 이에 불응하자 연 개소문(淵蓋蘇文)의 영류왕(榮留王) 살해 및 대신(大臣) 학살사건의 문책을 표방하고 644년 11월 당 태종 친솔(親率)의 10만 고구려 원정군을 일으켰다. 이듬해 4월부터 개모성(蓋牟城:瀋陽 동남쪽) ·비사성(卑沙城) ·랴오양[遼陽] ·백암성(白巖城)을 차례로 점령한 당군은 6월에는 안시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북부욕살(北部褥薩) 고연수(高延壽),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을 대장으로 한 15만의 군사를 안시성에 보냈으나 패하여 두 사람은 3만 6800명을 이끌고 항복하였다. 이에 당태종은 이세적(李世勣)을 시켜 안시성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 그 휘하 장수 도종(道宗)은 먼저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안시성 남쪽에 토산(土山)을 쌓아올려 점점 성높이와 같게 하였으나 성 안에서도 이에 따라 성을 높여 막았다. 당군은 하루에 6∼7차례 충거(衝車 :큰 나무로 성에 충격을 주는 攻城器) ·포거(抛車:돌을 날리는 공성기) 등을 동원, 성을 파괴하면 성 안에서는 곧 목책을 세워 이를 보완하였다.

이에 도종은 연인원 50만을 동원하여 60일에 걸쳐 안시성보다 훨씬 높은 토산을 쌓는 데 성공하였다. 당군은 부복애(傅伏愛)를 대장으로 하는 부대에게 토산의 정상에 올라 수비하게 했으나 갑자기 토산이 무너지며 성에서 고구려군이 쏟아져 나와 토산을 탈취하여 당군은 토산의 탈환전을 3일 동안 계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싸움은 날마다 6∼7회의 가열(苛烈)한 공방전이 계속되어 당군이 안시성을 포위한 지 3개월이 지났으나 요지부동, 고구려군의 용맹성에는 당태종도 어찌할 수 없었다. 9월에 이르러 기후는 이미 한랭하기 시작하고 병마(兵馬)의 양식도 떨어져 당태종은 할 수 없이 철군하기로 결정하였다. 당군이 철군을 시작하자 안시성의 성주가 성 위에 올라 당태종을 비록 바라보고 송별의 예(禮)를 표하자 당태종은 적(敵)일지라도 성주의 영웅적인 지휘력에 감동하여 비단[絲繪] 100필을 보내 고구려 국왕에 대한 그의 충성을 기렸다. 성주의 이름은 야사(野史)에 양만춘(楊萬春 또는 梁萬春)이라고 전하나 정사(正史)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친정간금자씨!
06/09/27 14:19
수정 아이콘
양만춘

정사에는 이름이 전하지 않고,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등 야사에만 나온다. 지모와 용기가 뛰어났다고 한다. 642년(영류왕 25)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성주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김테란
06/09/27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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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이 쌓은건 지키려는 성이 아니라 무너뜨려 공격하려는 산이죠. 물론 위쪽은 경사가 좀 됐겠지만, 그 높이로 쌓으려면 아래쪽은 경사가 매우 완만해야 하며(게다 대규모 병력이 치고들어가려면), 위쪽은 이미 무너진 상태.
1.무너진 것이든, 무너뜨린 것이든 그런 토산(이미 무너져서 완만해진)을 기습에 의해 점령당했다 해서 전세가 완전히 뒤바뀔까요?
뺏긴후 공략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진후의 경사까지도 급했던것이라면, 애초에 정말 아무생각 없이 쌓은것이란 얘기밖에 안됩니다. 무너진 흙더미와 성벽을 타고 대규모 병력을 침투시키려 했었는데 지 병력들이 오르기 힘들 경사로 토산을 쌓을 멍청이는 없겠죠.
그리고, 토산쌓는게 매우 중책였으므로 토산책임자는 이세민의 사촌인 이도종였고, 책임을 물어 참수한 부복애는 한참 하급장수였죠.
2.정말 토산수비가 중요했다면 그 많은 대장급 장수들은 뭐하고 있었기에 부복애가 갑작스레 책임자가 된것일까요?
아마 그들은 전부 성안으로 치고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았을겁니다. 이도종까지 말이죠. 토산무너뜨린후 성안으로 침투해서 점령한다는 전략마저 실패한 이후 퇴각해야 하는 상황까지 오게된 책임을 정말 궁색하게도 아무도 있지도 않던 토산의 책임자인 이도종에게 돌렸고, 실제론 그들의 책임이 아니니 이도종밑의 그냥 만만한 하급장수 하나를 참수한것이겠죠. 뭐 대충 이리 생각하고 있으며, 당시의 사실이 어떤것일지는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기록되어 있는건 그 어떤 드라마나 소설보다 더 말이 안된다는것, 이건 확실한것 같습니다. 무너진 토산하나 수복하지 못하면서, 성을 점령하려 했다, 눈물날 정도로 웃긴 개그일 뿐이고, 애당초 안시성점령이 이미 불가능한 상황까지 와있었다는걸 반증하는것입니다. 그냥가긴 아쉬우니 최후의 방편으로 남겨뒀던것까지 실행해 마지막으로 한번 더 찔러봤다가 호되게 당하고 돌아간것 아니겠습니까?
마술사
06/09/27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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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히로인은 히어로의 여성형입니다. 여성 주인공을 일컫는 말이죠.
김테란
06/09/27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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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태종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성군이 아닙니다. 패륜,불륜등은 물론,
사람죽이기를 밥먹듯이 하는 공포정치를 10년이상 하니 주변에선 열심히 말 잘들을 수 밖에 없고, 충신들 말에 귀기울이는 척 정치쑈 납간에, 지은죄가 많아 매우 찔리는지 사서에도 관여하고 아예 직접 집필까지 하죠.
그럼에도 그가 후대에 추앙받는 황제가 된건 대외적으로 힘이 강했기 때문이죠. 이민족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해온 중국에선 그들을 제압하여 영토를 넓히고 대외적인 평화를 누린 업적이 대내적 안정에도 크게 작용할 수 밖에요. 사방으로 여러 강한 민족들과 맞닿아 있는 그들 입장에선 힘있는자가 성군인 것입니다.
06/09/27 17:15
수정 아이콘
그렇게 사생활로 따지면 태조, 태종, 세조, 광해군은 전부 형편없는 왕들일 뿐입니다. 전부 사람 죽이기를 밥먹듯이 했으며 패륜과 불륜을 저지른 왕들이죠. 더군다나 태조와 태종은 아들마저도 아버지의 폭압에 반감을 느껴 태자자리를 때려치우고 바깥으로 나돌 정도였으니 말 다했죠. 대내외적인 정책으로 본다면 당태종은 성군으로 불러도 아까울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나 동시대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당태종의 10만이 정상이고 수나라 113만이 뻥튀기라고 봅니다. 100만의 군대를 찾아보려면 그 이후에도 천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죠. 그 사이에 인구증가가 장난이 아니었을텐데도 말입니다. 113만의 참패를 기록한 수서가 당나라 때 쓰여진 것도 수의 패배를 과장하기 위한 당의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김테란
06/09/27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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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만큼 충언하는 자들을 말조차 제대로 못할 정도로 10여년간 마구 죽이진 않았죠. 제가 이런 얘기를 한건 중국에선 최고의 황제, 성군이라 떠받들고, 사실 그들의 입장에선 가장 필요했고 위대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성군과는 거리가 매우 먼 인물이란 것입니다. 그를 비하하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성군에 대입시켜서 당시 역사도 객관적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시기에 그건 절대 아니란걸 말씀드리고자 함입니다. 가장 강력한 황제였고, 사후에도 중국에 그 힘들이 지속되었으니 그의 업적을 폄하할 이유는 없죠.
06/09/28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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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군이 최소 50만이었다는건 정설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보급부대를 포함한 규모이지요. (수나라 113만 명도 전부 전투 부대였기에, 보급부대를 합치면 200~300만 가까이 된다는게 소장학자들의 중론입니다.) 물론 진실은 저 너머에~
06/09/28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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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의 군대 편제나 그 당시의 인구, 이후의 전사들을 연구해도 그 당시에 보급부대 포함 300만의 군세는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는 의견도 있지요. 개인적으로 고대 사서의 숫자나 연대를 다 믿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리스인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에 보면 다리우스 왕의 그리스 원정부대(그 유명한 마라톤 전투)는 육군만 170만이 넘습니다. -_-; 그러나 400년 후 로마와 싸우는 사산 조 페르시아나 파르티아가 동원할 수 있었던 군대는 그 1/10도 안되죠. 또한 당태종의 군대가 50만이었다는 정설은.. 인터넷이나 재야사학계 쪽을 제외하고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군요.

그리고 태조와 태종의 정치를 잘 모르시는군요? 태조가 나라를 세우고 지탱하는 과정에서 자파 아닌 사람들은 다 죽이거나 귀양 혹은 낙향했다고 생각하시면 무방합니다. 유명한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외에도 두문동의 72인을 불에 태워 죽였죠. 태종은 왕 이전에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전부 죽음을 내리거나 귀양을 보냅니다. 정몽주를 철퇴로 때려죽이면서 온통 궂은 일을 다 한 조영규까지도 결국 곁에 두기는 했지만 귀양을 갔다오죠. 어떻게 태조 큰아들과 태종 큰아들이 똑같이 태자자리를 때려치고 도망을 갑니까. -_-;

또한 비단 100필이나 포로 귀환은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역사처럼 '내가 졌지만 넌 참 대단하다'하면서 내렸을수도 있고, 안시성의 반격을 막기 위한 뇌물형 꼼수였을수도 있죠. 포로야 끌고 가는데 시간만 더 걸리고 비단 100필 역시 일반인이나 입이 벌어질 정도지 당태종 입장에선 있으나마나 한 분량 아닙니까? 그냥 아무나 시켜서 성 앞에 던져두고 가면 되는데 딱히 격식 차리거나 시간 걸릴 일도 아니죠. 달리기 선수 두세명이 100미터 달리기하는 것도 아니고 군대라는 무리가 후퇴하는 건데 후퇴 준비하는데만도 시간이 엄청나죠. 줬든 안줬든 기록과 모순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김테란
06/09/2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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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뇌물였던지, 놓고 도망간거라 치죠 뭐. 그래봐야 하사한건 아닐테니까요. 그리고 포로석방이 왜 모순인지는 좀 찾아보시면 아실듯, 역사스페셜이던가 SBS스페셜이던가에서 봤던것 같네요. 그리고 때에 따라서 사람목숨의 가치가 달라질 순 없겠지만, 굳이 군주의 인품등을 비교하려면 건국과정중의 살상과는 좀 분리해서 볼 필요는 있다 봅니다.
06/09/28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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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의 군세가 113만이 불가능한 이유는 삼국지에서 조조가 적벽에 동원한 군대가 80만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20만에서 30만 사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그로부터 겨우 300여년이 지난 상태. 그 동안 인구는 그다지 늘지 않은 편이고, 결국 수나라는 많아야 50만정도를 이끌고 나갔다는 것 밖에 없지요. 삼국지연의에서의 100만도 사실은 조조의 패배를 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방책에 불과했죠.
06/09/28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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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성군의 자질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참고로 요새 역사책을 엄청 쓰시는 이덕일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종은 진정한 성군은 아니었고, 오히려 양반계층의 이익을 도왔던 임금이라고 합니다. 즉 성군의 자질을 갖춘 자는 별로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죠. 태종만해도 형제들 죽인게 엄청나게 많은 편이고, 심지어 자신들의 처남들까지 죽여버렸죠. 그리고 세종은 사실상 백성들을 살피는 정치보다는 양반계층을 위한 정체를 펼쳤는데 그게 좀 넓어지니 백성들을 위한 정치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단종을 죽였던 세조가 백성들에게는 제일 편한 정치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성종은 여성편력이 심했죠. 영조는 자기아들 뒤주에 가두어 죽이고, 그렇게 따지면 조선조 진정한 성군은 정조만이었다고 생각되네요. 역사상 성군이라 불리는 임금들은 대체로 성군의 자질을 다 갖추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심지어 우리들이 제일 성군이라 생각되는 세종도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백성들을 위한 임금은 아니다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으니 말이죠. 그냥 성군으로 따지자면 정조 정도가 아닐까요? 중국에서는 성군자질 따질만한 임금들은 웬만하면 포악 그 자체이고...
06/10/01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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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자리는 피로 만들어진 제단 이지 않을까요....언제나
난콩나물
06/10/02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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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적어도 그중 광해군은 절때절때 폭군이아닙니다 전 광해군이 있던 인조반정을 우리나라한 삽뜬일중 최고로 칩니다 특히나 그인조반정의 주역들 인조반정일으키고 날뛰는거보면 욕지기가 치밀어오릅니다 권력에 눈이멀고 말도안되는 명분으로 반정이아닌 반란을 일으킨 전형적인 소인배이지요 님이말하신폭군은 광해군이아니라 연산군이겟지요 또한 태조큰아들과 태종큰아들은 다릅니다 태조큰아들의경우 왕위를 이엇으면 태종또한 그리불만은 안가질수도잇엇습니다 아뇨 불만을 안가졋다기보다는 딱히 왕자의난을 일으킬명분조차 얻지못햇을지도모릅니다 꽤나 욕심이많으니 결국은 일으킬수도있지만 어찌하거나 태조는 첫째보단 여덟째 방석을 태자로 삼으려고햇고 그누구라도 그런식으로 일을하면 열받지않을까요? 게다가 첫째의경우 당시 이방원이 정권잡앗을때 요절했습니다 그래서 명목상 둘째형이올라가게 되고 그뒤 이방원이 왕위를 물려받게되는거죠 그리고 태종의 큰아들의경우 여러모로 뛰어낫으나 아버지나 자신의 능력을 헤아려 일부로 태자자리를 포기햇다고 합니다 전혀 다르죠 전혀요 전 그들이 아버지가 폭군이라 태자자리를 일부로 때려치우진않앗다고 봅니다 또한 퇴각이야 급하면 그냥퇴각하면 됩니다 군수물자고뭐고 다 버리고 퇴각하면되는겁니다 퇴각할때는 두가지종류가있죠 너무 급해서하는퇴각과 본토에 큰일이일어나서 어쩔수없거나 혹은 전술적인목적으로 퇴각하는 두종류가잇죠 첫번째의경우 기습이나 예기치못한일로 급히퇴각할때 군수물자고뭐고 다 내팽겨치고 퇴각합니다 그러나 본토에 큰일이일어나거나 혹은 전술적인퇴각을할때는 시간이 많이소요되지요 이세민의경우 전술적인퇴각보다는 기습이나 혹은 예기치못한상황으로 인한퇴각입니다 굉장히 신속하게 퇴각해야되고 그럴때는 대충무기와 몇가지장비만 챙기고 퇴각합니다 빠르죠 그리고 반대파숙청이야 어느나라 시조왕도 다하는일입니다 반대파숙청이 제일우선입니다 그럼 반대파놔두고 나라를세울까요? 그어느나라의 왕 반대파를 그대로 두진않습니다 뭐 일부남기기도합니다만 대부분은 싸그리 죽이거나 못해도 추방입니다 특히나 나라를 세운지 얼마안된때에는 나라안정화를 위해서도 꼭필요한일이죠 게다가 세종의경우 딱히 양반의 힘을강화햇다기보단 최대한 약화시켯습니다 단지 세종이 한일이아니라 태종이 위에서 무력으로 한일이죠. 그리고 초기 국가의경우 귀족들의 힘을모두 무력으로 굴복시키가 힘들기 때문에 그들의말을 들어줄수밖에없습니다
chowizard
06/10/02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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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는 무조건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특히 보급체계가 취약한 고대로 갈수록 더욱 그렇구요. 수 양제가 100만 명의 군사를 일으켜 출발점과 끝지점이 1천리가 넘었다고 하는데 그건 무슨 이야기겠습니까? 실제 당장 이용가능한 병사의 수는 얼마 안된다는 이야기지요. 즉 5만 명만 싸우고 뒤에 있는 95만 명은 논다는 겁니다.ㅡㅡ;
당나라를 세운 세력은 기마민족의 성격이 짙어 그 대부분의 병사들이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당 태종 이세민도 수나라의 전철을 보고 거기에서 어떤 점이 실패 요인이었는지 잘 알고 있었겠죠.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지형은 험한데다 바다를 통한 수송도 고구려의 수군이 막강하므로 위험... 그렇다면 방법은 소수의 정예화된 기병부대로 속전하는 것이지요.

즉, 당 태종의 군사 10만과 수 양제의 100만 대군은 실질적으로 전투에 이용가능한 수로 따지면 거의 같거나 오히려 기동력이 앞서는 당군 쪽이 낫다는 이야기죠.
율리우스 카이
06/10/06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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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콩나물 // 제가 읽고 배운 조선역사랑은 좀 다르게 알고 계시는거 같아요. '꺄아~'님도 광해군이 악한 군주라거나 폭력군주라고 생각하시고 쓴건 아니신거 같고, 어쨌든 광해군 자체도 북인(이었나?) 정권을 세우면서 무리수를 많이 둔 건 사실입니다. 서인(이었나?) 들을 많이 죽이고 귀양보낸건 그러려니 해도, 성리학적 세계에서 아무리 의붓 식구라지만, 어머니와 동생들을 죽인건 반정의 좋은 명분을 주었죠. 지금 노무현이 한나라당 지지자들한테 죽일놈인 것보다 광해군이 더하면 더했지 못할것도 없었다고 봅니다.

어쨌든 전체적으로 사생활로 왕의 폭군/성군을 가린다면 글쎄요. 어렸을때 죽은 단종 같은 사람 빼면 폭군이 아닐 사람이 거의 없을 겁니다. 광해군이 그 예외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구요. 고등학교 국사책은 광해군에 대해서 너무 조금 다루고 있죠. 조선 왕중에 그나마 개혁군주라고 할수 있는 왕이면서, 결국은 호란을 가져온 인조반정에 의해 일찍 죽어버리면서 안타까움과 연민을 자아낸 왕일 뿐이죠.
06/10/10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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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의 10만은 전형적인 중국 사서의 축소 왜곡입니다.

수양제의 113만은 아직 확인불가인데 일단 '전위'48만이 어떻게 움직였
는지는 사서에 다 나와 있습니다.

역사 해석에서 자신의 주관보다는 사서를 중심으로 바라보는게 필요하지
않나 싶네요.

정관정요는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치민' 보다는 정치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판단되는 책입니다. '애민'도 있지만 분명 그 주류는 아닙니다.

인구가 부족하다는 것은 근거가 없습니다. 서진시대 이미 중국인구는
3천만 이상으로 추정되며 성당시기는 약 6천만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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