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경험으로 봤을 때 전자레인지인 것 같다. 너와의 첫 만남은 아마 15년 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내가 결혼을 하면서 혼수로 가지고 온 놈이었으니까. 그때 너뿐만 아니라 TV, 세탁기, 냉장고, 청소기 등 가전제품 일체가 역시 혼수라는 이름하에 입대를 했었다.

금호동에서 구의동으로 다시 용인 수지로 그리고 제주도로 몇 차례 이사를 하는 와중에 같이 들어온 동기들은 이미 다 제대를 하고 후임들이 들어왔는데 (세탁기 같은 경우는 그 후임도 제대를 하고 또 새로운 후임이 들어왔다.) 너만 후임이 없었다. 원래 눈에 띄는 놈도 아니라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늘 이사를 끝내고 나면 너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부엌 구석진 곳에 이미 조용히 자리를 잡고서는 어느덧 식은 국을 데우고 있었다.

늘 그렇게 곁을 지키고 있을 것 같던 네가 결국 세상을 등졌다. 월요일 저녁 냉동실에 있었던 삼겹살 해동을 마지막으로 운명을 다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신호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몇 달 전부터 시작버튼의 작동이 잘 안되었던 것이다. 그때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서비스센터로 데리고 갔으면 너를 살릴 수 있었을까?

다 부질없는 일인 것 같다. 15년 동안 밤낮 안 가리고 일을 했는데 그렇게 심폐소생술로 되살려 놓고 다시 냉동만두를 데우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일이란 말이냐? 그냥 그렇게 보내주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다음 생에는 꼭 SUHD TV나 960L 대형 냉장고로 태어나서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길 바란다. 그동안 청소 한 번 제대로 해준 적 없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그리고 고마웠다. 그대 속세의 미련일랑 모두 잊고 편히 잘 가시게나...



고(故) 전자레인지...


후임 신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