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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3/23 12:38:24
Name 王天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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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스포]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 보고 왔습니다.


월터 교수는 집에 가는 길에 수국 한다발을 산다. 아내를 위한 선물이다. 그러나 그날 밤은 이전처럼 평범하지 않다. 애인과 단잠을 자던 샘은 늦은 밤 벨소리에 짜증을 낸다. 누군가가 살려달라고 소리친다. 장난이거나 새로운 수작이다. 나가본다는 애인을 말리고 남자인 샘이 상황을 확인하러 내려가본다. 널부러져 있는 노인이 숨을 헐떡이고 있다. 샘은 그가 월터 교수인지 알지 못한다. 헉헉대며 유언이 될 지도 모르는 말에 당장 귀를 기울여야 한다. 건물 바깥에는 다른 사람이 널부러져 있다. 어수선한 밤, 멀리서부터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가 헤치며 다가온다.

월터 교수는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그는 상대적 가치들의 나열과 충돌 속에서 헤맬 수 밖에 없는 존재의 무의미를 수업시간에 이야기한다. 이는 절망감을 심으려는 의도가 아니다. 냉혹하고 무관심한 세상을 인지해야, 그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질의응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살아가는가. 자신만의 답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 속 우리 존재가 하찮다는 진리를 바탕으로 질문은 시작된다. 삶은 이어지고 스스로 멈추는 순간 존재의 이유는 거기에서 끝나고 만다.

영화 속 인물들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파열음을 내며 자기 자신과 관계를 위협한다. 사라는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에서 다른 학부모와 서로 힐난한다. 조는 마약중독을 치료해주려는 친구 제프리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월터 교수의 아들 아담은 아내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밝힌다. 소피는 자기 테이블의 의자를 멋대로 빼내려는 남학생에게 항의하다 욕을 먹는다. 현재는 불만족스럽다.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삶을 외롭게 만든다. 남을 위하는 순간에도, 남이 자신을 위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그 진심을 헤아리지 못한다. 혹은 그것이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 왜 이렇게 삶이 망가졌는지 고통만이 살아있을 뿐이다. 가족 안에서, 친구 사이에서, 부부 사이에서 늘 공백이 생기고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그어진다.

이 고난을 이겨내는 방법은 잊는 것이다. 사라는 도시 생활에 질려 교외로 이사를 왔고 멋진 가정을 꾸리고 싶다. 그러나 남편의 외박이 점점 잦아지고, 아이들이 정말 잘 커나가는지 자기가 이곳의 삶에 흡족해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집에 술병을 쌓아놓고 삶의 의심을 술을 들이키며 잊어버리려고 한다. 조는 글을 쓰지만 마약에 중독된 상태다. 아담의 아들과 딸은 각자 짝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성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상대방과의 관계를 투덜대며 대마초를 피운다. 소피의 몸에는 화상 자국이 가득하다. 고데기로 자기 살을 지져야 자아를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통을 잊기 위해 건강하지 못한 방법을 쓴다. 육체적 감각이 이들의 삶을 버틸 수 있게 만든다. 이 영화의 원제처럼 이들은 무감각을 방편으로 삶을 이어간다. (소피의 경우 역시 감각의 자극 자체가 "고통에 점점 무감각해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 최초의 목격자, 샘만이 충만한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자신을 구하지 못한다. 그리고 타인도 구하지 못한다. 사라는 아이들이 잘 자라주길 바라지만 딸은 사라에게 항의한다. 바이올린 수업은 거지 같고, 엄마가 맨날 술만 먹는 거 보기도 싫다고. 조는 재활센터에서 욕을 퍼부으면서도 제프리의 전화를 기다린다. 제프리는 재활센터에 강제로 조를 집어넣었지만 변호사로서의 업무에 바쁘다. 아담의 아들과 딸은 대마초를 피운 것 때문에 부모와 부딪히고 fuck이라는 단어가 오고간다. 엄마가 수술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딸은 충격을 받지만 아들은 여전히 사춘기 청년으로서 연애사업이 더 중하다. 소피는 이를 악물고, 충전이 된 고데기를 자신의 피부 위로 누른다. 월터 교수의 상담도 소피를 멈추지는 못했다.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그리고 샘의 관계도 사실은 불륜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부인을 배신중이던 샘은 데이트 도중 딸을 발견하고 자리를 황급히 벗어난다.  

변하려는 이들도 있다. 사라는 아이의 말을 듣고 집에 와서는 모든 술을 다 버린다. 아담의 딸은 엄마를 걱정하고, 대마초를 피지 않으려 한다. 변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아담의 아들은 여전히 대마초를 피우고, 좋아하는 여자와 섹스를 약속한다. 마약센터를 나오자마자 조는 남의 가방을 훔친다. 제프리는 조의 안부를 찾지 않는다. 영화는 이들 모두를 하나로 묶는다. 구제불능의 세계 속 구제불능의 인간과 그나마 더 나은 인간들로 이분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 모두는 결국 어떻게든 변화의 계기를 맞는다. 마지막을 결심하고, 언제나 작은 행복과 선의를 믿으며 살아왔던 월터 교수로 모든 관계가 이어지며 이들은 잃어버린 삶의 감각을 되찾는다. 결국 그 절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더 이상 자기 학대의 흉터를 남기지는 않겠다는 소피처럼.

영화는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그날 밤 초인종 앞에 쓰러져있던 사람들은 모르는 남이고, 억세게 재수없는 사람들이었다. 이제 그들은 길바닥에 널부러진 어떤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것이 있고, 잃어버린 것이 있고,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들이다. 월터 교수는 금요일은 아내에게 꽃을 선물하는 약속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꽃을 산 마트에서 조가 접근해 돈을 구걸하고, 월터 교수는 그에게 먹을 것을 살 수 있도록 마트에 5달러를 맡긴다. 월터 교수를 부자로 오인한 가게 앞 부랑자가 그를 쫓아 칼로 찌른다. 부랑자를 막으려고 조가 달려들어보지만 그 역시 부랑자의 칼 아래 쓰러진다. 정직과 신의로 살아오던 월터 교수의 죽음은 생의 부조리 그 자체다. 왜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대단치도 않은 악의 아래 갑작스런 끝을 맞이해야 할까. 그러나 월터 교수를 구하려 한 조의 존재가 부조리 속 희망을 증명한다. 선의의 고리는 늘 끊어지지만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이로 이어지고, 때로는 순환한다. 조는 죽었지만 월터 교수는 살릴 수 있었고, 조 자신 역시 스스로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했다.

행복과 불행은 인생의 답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이 어느 순간 얼마나 충실했냐에 따라 진실만을 얻을 수 있다. 조는 죽기 직전 5달러 어치 선의를 목숨으로 보답했다. 월터 교수는 끝내 금요일에는 꽃을 건넨다는 약속을 지켰다. 아담의 아내는 무사히 수술을 마쳤지만 아담의 아버지, 월터 교수가 중태에 빠지면서 다시 한번 온 가족은 쉽지 않은  감정을 나눈다. 이번에는 말썽쟁이 아들, 월터 교수의 손자도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샘은 애인의 집에서 나와 아내에게 고백한다. 그동안 거짓말 했던 거, 외롭게 했던 거 다 되돌리고 싶다고. 깨달음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주는 것만은 아니다. 제프리가 친구 조를 잃은 것처럼, 샘도 아내 사라를 잃는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깨달았고, 서로가 얼마나 자신의 삶에서 비겁했는지를 발견한다. 안도와 후회가 교차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그렇지만 월터 교수의 죽음을 보여주진 않는다. 영화는 끝날 때까지 월터 교수의 심박수 사인 신호를 들려준다. 언젠가 죽겠지만, 그래도 규칙적인 신호는 계속된다. 끝이 아니다. 과거는 현재로 이어지고, 서로가 그렇게 이어지며 모인다. 생의 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죽음과 허무라는 결론은 나지 않는다. 그 답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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