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도 그랬고 올해도 그랬다. 좀 늦게 갔다. 1시까지는 간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버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 두 시에 도착했다. 도착해보니 서울시청 앞에는 여전히 열성 기독교 신자들이 떼를 지어 고성방가를 뿜고 있었다. 서울광장 안으로 들어가니 조금 뻘쭘했다. 요상망측한 사람 틈바구니에서 나만 너무 멀쩡한 것 같았다. 깔개 같은 걸 안가지고 가서 내내 서있느라 허리가 아팠다. 광장 안에서 조금만 구석으로 가도 멸망이니 벌이니 하는 뻘소리가 들렸다. 먹고싶던 레인보우 컵케이크는 또 못먹었다.
마냥 작년같지는 않았다. 퀴어축제에 가는 건 작년보다 더 설레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같은 버스 안의 사람들이 죄다 퀴어퍼레이드에 가는 것 같았다. 서울신문사 정류장에서 내리면 더 편하게 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비가 오든 어쩌든 사람들은 계속 왔다. 퀴어퍼레이드를 더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바로 돈을 쓰는 것이다. 살 것이 많았다. 작년에는 아무 아이템도 못 얻고 뻘스럽게 브로슈어만 얻었다. 올해는 부채부터 여유롭게 획득했다. 시간이 금방 갔다. 아는 트렌스젠더 한 분을 보기도 했다. 조금 더 친숙한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이 왔다.
생각보다 돈을 더 썼다. 아이즈 부스처럼 뭘 파는지 알고 있었다면 사고 싶은 걸 미리 골라서 딱딱 재정상태에 맞게 살 수 있었을텐데, 그런 정보까지 찾아볼 여력이 없었다. 허겁지겁 퀴어문화축제에서 파는 프라이드 뱅글부터 샀다. 생각보다 가느다랐다. 가기 전까지 내내 초조했던 이유가 바로 이 아이템때문이었다. 하나로는 아쉬워서 몇개 더 사야겠다 싶었다. 팔찌 하나당 3000원을 후원해야했다. 문자 인증하기가 귀찮아서 현금 만원을 꺼냈다. 팔찌 두개를 더 골랐다. 주최측은 감사합니다 라고만 하고 거스름돈 4000원을 주지 않았다.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지만 쿨하게 자리를 떠났다. 팔찌가 이쁘니까 봐준다. 장사 잘 하네.....
가방을 안가지고 가서 가방부터 사려고 돌아다녔다. 에코백 하나쯤이야 어디서 팔고 있을 것인데, 미국 대사관에서밖에 안팔았다. 나한테는좀 작고 뭔가 비싸보였다. 고맙게도 신발주머니 형태의 보라색 가방을 파는 부스가 있었다. 그걸 얻고나서야 마음 편하게 쇼핑을 할 수가 있었다. 이것 저것 닥치는대로 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부스면 일단 거기로 돌진했다. 사고 싶던 물건을 살 준비가 되었는데 그걸 놓치면 정말 열이 뻗치는 일이다. 작년처럼 엄지만 빠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물고기 뱃지부터 사기 시작해서 이 놈 저 놈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서울광장으로 오는 길에 팔찌를 한 20개쯤 찬 여자를 보고 자극받은 탓일수도. 그는 장신구가 아니라 무슨 아머 수준으로 팔을 두르고 있었다.
악세사리에 대한 물욕만으로는 폭풍구매를 설명하기 힘들다. 정확히는, 내가 그 곳에서 느낀 어떤 소외감을 지워버리려는 액션일 것이다. 퀴어퍼레이드에 놀러간 헤테로 섹슈얼, 소위 일반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은 매우 이상한 느낌을 갖게 된다. 주위에는 온통 게이니 레즈비언이니 무성애자니 트랜스젠더이니 하는 사람들이 가득 있다. 수많은 동성애 판타지의 우스꽝스러운 왕자님 공주님으로만 존재하던, 미디어 속에서는 홍석천 하나로 수렴하던 이들이 눈 앞에서 떡하니 존재하며 웃고 떠들고 먹는다. 공작새 수준으로 꾸미고 온 사람들까지 보면 여태 품고있던 "정상성"이 얼마나 시시하고 초라한 것인지 실감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부끄럽거나 감출 필요 없던 절대적인 그 무엇이 거기서는 흔들린다. 일반과 이반의 구도가 완전히 뒤집혀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이 역시도 메이저리티에 대한 또 다른 강박일수도 있다. 단 한번도 소수가 될 일이 없던 사람이 소수자의 입장이 되는 건 정말 묘한 느낌이다.
치렁치렁 이것저것을 착용하고 나니 그제서야 좀 마음이 놓였다. 성정체성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자리를 즐기고 있느냐 마느냐의 참여자로서의 마음가짐을 그제서야 증명한 듯 싶었다. 그래도 조금 분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건 어디서 맨날 별나다는 소리를 듣던 내가 정말 너무 평범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악세사리로 나를 꾸미는 목적은 튀어 보이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런 팔찌 몇개로는 갖다댈수도 없을 정도로 화려망측한 사람들이 많았다. 일단 잘생긴 사람, 예쁜 사람 천지였다. 스타일 좋은 사람들도 그득했다. 코스프레를 하고 온 사람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퀴어퍼레이드에는 멋지고 재미있고 희한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이건 수의 역학관계 그런 거 다 떠나서, 그냥 보잘것 없는 존재감에 대한 짜증이다. 시빌 워에서 호크아이가 된 기분, 체크무늬남방에 면바지 입고 가서 클럽에 들어갔을 때의 무안함 비슷한 것이다.
역시 제작주문한 티셔츠를 입고 갔어야 했다. 당초에 계획했던 건 두 이미지를 앞뒤로 박고 "무지개나" "처먹어라"의 문구를 위 아래로 깔아놓는 것이었는데 돈과 시간이 딸리는 탓에 그냥 접었다. 예수 코스프레는 작년에도 올해에도 봤으니 내년에도 있겠지? 부처 코스프레를 하고 가면 종교대화합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성가대복에 꼬불금발가발을 하고 가서 금나팔을 불면서 꽃가루를 뿌리고 놀 수도 있을 것이고......꿰지도 못할 서 말의 아이디어는 이렇게 잔뜩 쌓여만간다.
쇼핑에 정신을 팔아서 무대를 제대로 보진 못했다. 퀴어축제의 단점은 굳이 무대가 아니라도 구경할 게 널려있다는 사실이다. 살 거 다 사고, 무대 보고, 그러다 목마르면 에이드 사먹고, 그러다 빼먹고 못산 게 있나 여기저기 둘러다니다 한눈도 많이 팔고 하면서 관객의 임무에는 소홀해졌다. 각 국가의 대사님들이나 서울시 인권단체의 회장님께서 축하하고 연설했다. 서울대 학생회 회장과 고려대 학생회 부회장도 처음 보았다. 동정표로 권력을 잡았다고 욕 먹는 그 분들이구나.... 안 울었는데 울지마 울지마 가 객석에서 터져서 다 웃었다. 위로 설레발은 울고 나서 해야한다. 제일 인상깊었던 건 보라색 티를 입은 이들의 공연이었다. 아이유의 스물셋에 맞춰 퍼포먼스를 했는데 과하지 않고 정석적으로 딱딱 맞춘 느낌이었다. 크리스티나 리치 닮은 분이 정말 춤을 잘 추고 객석과의 호흡도 제대로 맞추는 것 같았다. 연예인으로 데뷔하시면 좋겠다. 리아나의 노래로 퍼포먼스 하는 팀도 있었다. 원곡을 너무 심하게 리믹스해서 그냥 그랬다. We found love는 굳이 뭘 꼬고 자를 게 없는디. 그 와중에도 바깥에서는 트로트를 틀고 단합대회하고 있었는데 너무 구려서 귀가 오염되는 줄 알았다.
그렇게 공연이 하나 둘 마무리되고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깜짝 놀랐다. 작년보다 훨씬 더 많았다. 퍼레이드 차량을 다 놓칠 것 같은 위기감마저 들었다. 무슨 차를 따라가게 될지 좀 걱정이 됐는데, 다행히도 도쿄노헤이트 차 뒤에 붙게 되었다. 나는 가요를 잘 별로 안좋아해서 걸그룹 노래로 도배되는 게 그냥 그렇다. 의식적으로 흥을 내야 하기 때문에 좀 피곤해진다. 도쿄노헤이트는 훵키하고 그루비한 노래들을 주로 깔아줘서 내 취향에는 아주 잘 맞았다. 특히 Sweet Dreams 가 나올때는 좀 전율했다. 엑스맨에서 퀵실버가 뛸 때 나온 바로 그 음악이 여기서 이렇게.....영화와 현실이 만나는 것 같았다. 시대에 뒤쳐진 인간들은 제끼고 잽싸게 뛰어야 한다. 마돈나의 Like a Virgin이 나오자 한 서양 여성이 광분해서 엄청난 댄스타임을 선보였다.
퍼레이드를 하면서 제일 웃긴 건 기독교 아저씨들을 강제 음소거 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행진하는 퀴어측은 뭉치고 기독교 아저씨들은 각개전투로 죄악이니 뭐니 뻘소리들을 확성기로 떠드는데 그럴 때마다 겁나게 환호를 해서 아저씨들의 일장연설이 들리지가 않았다. 하나님이, 워오오오오오오~ 동성애는,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지옥으로, 뿌와아아아아아아앙~!!! 나는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공식적으로 오지라퍼들을 퇴치하는 행사를 본 적이 없다. 넘의 인생에 선장질 하는 사람들 너무 많아서 대한민국 참으로 피곤한데, 생긴 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 일해라절해라 마마잃은 중천공으로 떠드는 사람들에게 셧업을 우아하게 날려주니 참으로 오지고 재미지다.
장난스레 화답하며 통쾌하다가도 나는 이상한 기분에 젖었다. 이것은 대결이 아니다. 투쟁도 아니다. 미움받는 자들이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걷고 있는 우리는, 그들에게 침을 뱉지도 욕하지도 않는다. 쓰러트리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들을 반갑게 맞는다. 미워하라고 놔둔다. 미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에 미소를 돌려준다. 감사와 감동의 의미를 담은 액션을 취한다. 나와 함께 걷는 이들은 오늘 단 한번 태어난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며 걷는다. 세상은 그들을 향해 다시 숨어들어가라고 손가락질한다. 어쩌면 나도 거리 바깥의 저들처럼 미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기 오지 않았다면 나는 우리 아닌 나로서 그저 꾸짖고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함께 걸으며, 나는 싸움 아닌 화해와 용서를 배운다.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을 받아들이며 그저 가여워한다. I feel a great swell of pity for the poor soul that comes to my school looking for trouble. 존재의 싸움은 다른 존재를 지우려 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저항은 늘 존재함 그 자체로 이루어진다. 나는 혼자서는 낼 수 없던 목소리를 배운다.
퍼레이드가 끝났고 나는 허리가 아파서 서울광장을 나왔다. 공교롭게도 동성애 반대를 외치시던 어머님들이 나와 같은 버스를 탔다. 내 손목에 채워진 프라이드 팔찌를 보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전혀 겁이 나지 않았다. 흩어져서도 여전히 존재는 존재를 자부한다. 내가 그렇듯 우리 모두가 그렇다. 작년보다 훨씬 많아진 인파를 보며 내가 다 고마웠고 내년에도 나는 다시 그 감격을 느끼기 위해 그 자리를 찾으려한다. 단 하루의 공식적 승리가 일년 내내의 비공식적 승리로 이어지길. 늘 패배의 위기에 처한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비겁한 내가 되길. 단 하루라도 내가 뭔가를 할 수 있기를. 세월호 팔찌를 보며 느끼는 반가움을 프라이드 팔찌를 보면서도 조금 더 자주 느낄 수 있기를. 방해하고, 우려하고, 모르는 채로 떠드는 소음들 대신 처음으로 가본 이들과 내년에도 다시 찾을 거라는 이들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을 거라고 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