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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8/04 04:44:37
Name 이치죠 호타루
Subject [일반] 1941년까지의 소련 - 왜 그들은 초기에 대패할 수밖에 없었나
어, 원래는 독소전쟁을 줄줄이 연재해 볼까 했는데, 총 31편에 달하는 크고 작은 섹터로 나누어야 겨우 연재가 될까말까하겠더라구요. 가뜩이나 한 달에 한 편 정도 글을 쓸까말까하는 저로서는 당연히 이 계획은 폐기 혹은 초장기 프로젝트로 밀어버릴 수밖에 없었고... 그런대로 시간이 날 때 느긋하게 한 편씩 투척해 보는 걸로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 보고자 합니다.

솔직히 이 바닥에 뛰어난 분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조금 조심스럽기는 한데, 나름대로 책을 읽고 제 의견을 약간 덧붙여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흔히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독일이 소련과 손잡고 폴란드를 치고, 독일이 서유럽을 정복하고, 영국을 치려다가 단념하고, 러시아를 치러 들어갔다가 말리는 새에 지상 최대의 작전인 노르망디 상륙 대작전으로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아서 망했다."

이 정도로 이해하고는 합니다. 이는 러시아를 치러 들어갔다가 말리는 것까지는 맞지만, 그 이후가 틀린 말입니다. 물론 전략적으로 양면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스탈린이 몇 번의 회담에서 줄기차게 독일군의 주의를 분산시킬 제2전선의 형성을 계속해서 서구(루스벨트, 처칠)에 요구해 오기는 했습니다만, 어디까지나 2차대전 당시의 주 전쟁터는 명명백백히 소련 땅이었습니다. 즉, 저 문장의 뒷부분을 알맞게 고치자면,

"러시아를 치러 들어갔다가 소련에게 크게 말렸고 여기에 서구가 가세해서 독일군의 패망을 이끌어냈다."

이 정도로 바꿔야 합니다.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앞 문장은 전쟁의 방점이 서구에 찍혀 있죠. 다시 말해서 전쟁을 끝내는 데 역할을 한 것은 서구 쪽이라고 해석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독일군의 전력을 그대로 받아내면서 전쟁을 마무리한 것은 소련 쪽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서구에 들어가는 강조를 상당히 빼 버린 문장이 되었습니다. 물론, 번번히 말씀드립니다만 서구의 역할이 작다는 게 아닙니다. 제2전선을 열어제낀 것으로 독일은 이미 끝장날 운명이었습니다만, 어디까지나 독일군을 상대로 공격을 받아내고 버티며 승리를 가져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소련이었다는 것이죠(렌드리스 등의 원조도 물론 무시할 수 없겠습니다만 공(功)의 경중을 따지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영문 위키피디아의 2차대전 사망자 수를 보면 더욱 소련의 역할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소련 - 전투원 사망자 최소 8백 6십 6만 명, 비전투원 사망자 1천 6백만 명. 합계 최소 2천 6백만 명.
독일 - 전투원 사망자 최소 4백 4십만 명, 비전투원 사망자와 전투원 사망자 합계 최소 6백 9십만 명.
프랑스 - 전투원 사망자 최소 20만 명, 비전투원 사망자 최소 40만 명. 합계 60만 명.
영국 - 전투원 사망자 약 40만 명, 비전투원 사망자 약 6만 7천 명. 합계 45만 명 가량.
미국 - 전투원 사망자 약 40만 명, 비전투원 사망자 약 1만 명. 합계 42만 명 가량.

문자 그대로 사망자만 따졌을 때조차 사망자의 단위부터가 달라지는, 정신이 아득한 통계죠. 소련이야 말할 것도 없이 저 사망자가 99.86% 동부 전선에서 발생한 것이고(훗날 소련이 만주로 진격했을 때 낸 사망자는 최대 1만 2천 명에 불과합니다), 독일군 역시 동부 전선에서의 사망자가 4백만 명에 달했으니, 독일군의 전력을 소진시킨 것은 명명백백하게도 소련의 피였던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는데, 사망자입니다. 사상자가 아니라.



헌데... 러시아가 독일군을 제압하면서 승리를 확실하게 가져간 것은 1943년 쿠르스크 전투 이후의 일입니다. 바꿔 말하면 그 이전까지 러시아군은 죽죽 밀렸다는 이야기죠. 물론 밀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독일군이 최대의 영토를 확보한 것은 1942년경의 일입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피와 피의 혈전이 벌어지기까지 소련군은 계속해서 독일군에게 얻어터졌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많은 가설들이 있었습니다. 대숙청을 필두로 해서 소련군의 사기 문제, 소련 내부에서의 스탈린에 대한 불만, 최고조에 달해 있던 독일군의 전략적인 작전 수행 능력, 최신식이었던 독일의 전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구식이었던 전차(적어도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KV 쇼크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KV 전차는 독일군 것이 아닌 소련군 전차거든요) 등등... 사실 어떤 일의 원인이라는 것이, (물론 사실이 아닌 것을 제외하고 보았을 때) 어느 하나 때문에'만' 벌어지는 일은 절대로 아닙니다. 단순화하기에는 뭐 하나 잡고 그것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게 가장 좋고 실제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대부분의 일은 실은 복잡한 뒷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내용도 그런 종류입니다. 물론, 전공(戰功)에도 경중이 있듯이 패배의 원인에도 경중이 있는 법입니다마는.



우선 사실이 아닌 것부터 제끼고 시작합시다. 적어도 소련의 전차는 독일군의 전차를 충분히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일명 KV 쇼크라고 통하는 것인데, 1941년 당시 독일군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3호 전차와 4호 전차였고(티거가 최초로 투입된 것은 1942년의 레닌그라드에서입니다), 이들의 관통력은 서부 전선에서 입증된 것처럼 그리 믿을 만하지는 못한 것이었습니다(여기서 이야기하기에는 이야기가 너무 엇나갈 게 뻔하니 관심 있으신 분은 《전격전의 전설》을 읽어보시거나 마틸다 전차에 대해 알아보시는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그 불안불안한 상태로 있던 중에 KV 쇼크가 터진 것이죠.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KV 전차를 녹아웃, 다시 말해서 사격, 박살내기 위해서 전차로는 어림도 없고 8.8cm 대공포, 심지어는 10.5cm 야포(포병들이 쓰는 그거 맞습니다)를 대동해서 사격해야 할 판이었죠. KV를 때려잡기 시작하는 판터니 티거니 하는 것들이 나타난 건 뒤의 일이고(판터 1943년, 티거 1942년) 그런 만큼 적어도 소련이 전차가 구식이어서 독일군에게 밀린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 수정 - 여기서 말하는 버텨낸다는 것은, 전술적인 이해도, 승무원의 역량, 제공권을 모두 제하고 순수 기술력으로 붙었을 때, 다시 말해 1:1, 혹은 똑같은 승무원이 벌이는 다대다 교전에서의 KV의 기술력이 독일의 전차 기술력에 비해 밀리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늦게나마 수정합니다.



스탈린과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은, 어느 정도는 기여를 하기는 했습니다마는, 그렇게 오랜 기간 기여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이너하다는 거죠. 1941년 6월 22일 진격이 개시되었을 때 우크라이나의 지식층을 필두로 한 사람들로부터 독일군이 '해방자'로 환영받은 것은 사실이기는 합니다. 일례로 키예프에서는 많은 유대 인들이 독일군에게 자신들의 사업을 재개해도 좋다는 허가를 내려달라고 탄원하기까지 했습니다(《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p. 179). 원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스탈린의 민족주의 탄압, 우크라이나 땅에서 벌어진 대기근 등등. 그러나 채 두 달이 못 가서 이들은 살기 위해서는 독일군을 상대로 총을 드는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었죠.

1941년 5월 2일에 - 그러니까 이미 전쟁이 개시되기도 전에 - 에리히 회프너(Erich Hoepner, 발키리 작전에 참여했던 그 회프너 맞습니다)가 하달한 "절멸계획"(Plan of Annihilation) 명령서의 일부입니다.

"독일 제국의 존속에 있어서, 러시아를 상대로 한 전쟁은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게르만 족과 슬라브 족의 오랜 싸움이며, 모스크바와 동방 문화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한 방어전이며, 유대 인과 볼셰비키즘에 대한 저항이다. 작전의 목적은 현 러시아의 철저한 파괴이며 따라서 이 작전은 전례없이 엄격해야 한다. 군사적 행동 하나하나가 강철의 의지를 가지고 적을 무자비하고 철저하게 절멸하는 데 맞춰져야 한다. 특히, 러시아와 볼셰비키 정부를 지지하는 단 한 명의 사람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러니 처음에 우크라이나 인을 필두로 한 소련 국민들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여겼던 독일군들이 점령지에서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일명 절멸부대)을 필두로 온갖 잔혹행위를 가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치 적극 가담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자유 러시아군(Russian Liberation Army : Русская освободительная армия, РОА)을 지휘하던 안드레이 블라소프(Andrey Andreyevich Vlasov, Андрéй Андрéевич Влáсов)가 있죠. 하지만 이들의 규모는 약 12만 명 정도의 선으로, 사망자만 9백만 명 가까이 낸 소련군에게 그렇게까지 큰 위협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게다가 독일군조차 이들을 믿지 못해서 정규군으로 투입하기보다는 그저 선전 활동이나 후방 지원에나 써먹는 정도였죠. 애초에 히틀러부터 블라소프를 믿지 못했습니다(《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p. 184).



결국 남은 가능성은, (대부분 예상하셨겠지만) 대숙청이죠.

헌데 여기서도 재미있는 인식이 있습니다. "스탈린이 유능한 장교를 다 잘라버렸고 그 자리를 무능한 장교들이 채워서 초반 전쟁을 그토록 말아먹었다"라구요. 음, 저도 이렇게 알고 있었던 때가 있었고, 이게 일반적인 인식이기는 합니다만,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 리처드 오버리 교수는 대놓고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라고 한 마디로 까내립니다(p. 51). 까내리기 전에, 오버리 교수는 이런 말을 먼저 던졌죠.

1937년에 군 기구를 파괴한 위기는 오로지 1917년에 유아기에 있던 볼셰비키 정권이 처음 몇 주에 시행한 국가 테러라는 더 큰 배경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p. 39)

음, 솔직히 말하건대, 저도 어느 정도 이해하기 위해서 몇 번이고 이 단락을 반복해서 읽어야 했습니다. 그 정도로 까다롭더군요.

우선 저 1917년의 국가 테러가 무엇을 의미하냐면, 바로 정치 경찰의 재구성입니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아시다시피 그때까지 유례가 없는 일종의 정치적 실험이었고,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더욱, 더더욱 가혹하고 극단적으로 사람들을 내몰게 된 것입니다. 가상의 적 및 그로 인한 혁명의 돈좌는 (그 실체의 유무에 관계없이) 소련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겁먹게 만든 일종의 망령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소련은 내부의 적을 색출하고 혁명의 걸림돌, 다시 말해 소련 자체를 전복시킬 수 있는 "위협"을 제거하고자 그토록 애를 써 왔던 거죠. 그래서 스탈린의 대숙청 이전에도 강제 수용소(굴라그)를 필두로 한 고문, 체포, 투옥, 강제 노동 및 사형이 끊임없이 자행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정점에 서 있던 것이 바로 엔카베데(NKVD, 내무 인민 위원회, НКВД)였죠.

여기에 스탈린 자신의 병적인 암살에 대한 공포와, 강제적으로 현대화 중공업 산업을 육성시킨 대가로 치른 엄청난 인명 소모(이게 그 유명한 우크라이나 대기근입니다. 1933년에만 무려 4백만 명이 넘게 사망)로 인한 내부 인민들의 반항이 겹쳐져 내부의 적을 찾기 위한 움직임은 전국구에 걸친 "테러"로 미쳐돌아가기 시작했죠. 겐리흐 야고다(Genrikh Grigoryevich Yagoda,  Ге́нрих Григо́рьевич Яго́да), 니콜라이 예조프(Nikolai Ivanovich Yezhov,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Ежо́в), 라브렌티 베리야(Lavrentiy Pavlovich Beria, Лавре́нтий Па́влович Бе́рия) 모두 이 때 악명을 얻었죠.

그리고 몇 년간 요리조리 잘 시선을 피해다니던 군이 마침내 걸려든 겁니다.

독일군이 의도적으로 당시 군의 다섯 원수 중 하나인 미하일 투하체프스키(Mikhail Nikolayevich Tukhachevsky, 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Тухаче́вский)가 반역을 꾸민다는 날조된 정보를 스탈린에게 흘렸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또 엔카베데 쪽에서 일부러 정보를 부추겨서 스탈린이 군을 박살내도록 움직이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죠. 일단 리처드 오버리 교수는 후자 쪽이 좀더 가능성이 있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p. 47). 또는 스탈린 자신이 투하체프스키와 사이가 극도로 나빴기 때문에 그 원한을 갚기 위해서였다라고 기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탈린의 친구이자 역시 다섯 명의 원수 중 하나였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Kliment Yefremovich Voroshilov, Климе́нт Ефре́мович Вороши́лов​)가 숙청을 부추겼다고 기술하기도 하죠. (《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p. 33)

뭐가 어찌 되었건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스탈린의 입장에서 군은 자신의 안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비쳤고, 이는 곧 잘 아시다시피 대숙청으로 이어집니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앞줄 좌측부터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알렉산데르 예고로프 원수.
됫줄 좌측부터 세묜 부됸니(발음상으로는 부죤늬의 쪽이 맞다는군요), 바실리 블류헤르.

이 다섯 명의 원수 중 투하체프스키는 총살, 블류헤르는 수감된 감옥의 고문 기술자와 싸움 끝에 사망, 예고로프는 옥사. 부됸니도 숙청의 피바람에 휘날릴 뻔했습니다만 체포조를 힘으로 제압한 후 스탈린에게 직통으로 전화를 걸어서 충성심을 보인 끝에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이외에 훗날 복권되어 독소전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는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코소프스키 원수도 이 때 숙청의 칼날에 걸려들어 평생 불구로 지내야 했고, 독소전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인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 역시 이 때 걸려들 뻔하다가 때맞춰 터진 할힌골 전투에서 전공을 거둔 덕분에 숙청 대상에서 엔카베데가 슬그머니 이름을 지워버린 일도 있었죠.

아무튼 이런 과정으로 대숙청이 벌어졌는데, 앞서 말했듯이 리처드 오버리 교수는 이 때문에 장교가 대다수 날아간 것은 사실이고 많은 수의 경험이 부족한 장교가 진급하기도 했지만 단순히 이 때문에 소련이 박살났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숙청 이전의 군이 숙청 이후의 군보다 질적으로 강했냐는 거죠. 투하체프스키의 종심 이론은 분명히 환상적인 이론이긴 했습니다만 당시 소련의 무선 통신 환경 등을 감안해볼 때 "지휘와 통제"라는 측면에서 지나칠 정도로 현실을 앞서갔고, 때문에 설령 투하체프스키가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성과를 냈을지는 미지수라고 이야기합니다(p. 52). 더구나 1933년에 소련과 비밀리에 훈련을 함께했던 독일군은 소련군의 지휘가 영 신통치 않음을 이미 지적한 바 있었구요.

게다가 1939년 1월부터 1941년 5월까지 (겨울전쟁 탓도 있겠습니다만) 무려 161개의 사단이 새로 신설되었는데 이들의 요구를 맞추는 것은 숙청된 장교의 복직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고 실제로 1938년에 숙청된 장교의 80%가 복직되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로코소프스키가 복직된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즉, 대숙청이 붉은 군대에게 가져온 해악은 단순한 인력 증발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투하체프스키를 필두로 하는 군 현대화의 선봉장들이 모조리 쓸려나갔고 이 때문에 교리가 후퇴해 버린 것은 엄청난 손실이 되었습니다만, 그것보다도 더 큰 손실은 군이 정치의 완벽한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니 스탈린의 주변에는 예스맨 외에는 남아 있을 수 없었고, 다들 보신주의에 일관하였으며, 이런 문제가 종합적으로 터진 것이 바로 겨울작전과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의 패주였던 것이죠.



음, 대숙청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했는데, 사실을 말하자면, 겨울전쟁의 소련군 초기 대패의 원인은 이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헌데 정작 독일군이 진격을 감행했던 바르바로사 작전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어요. 아주 약간이지만.

겨울전쟁이 벌어진 게 1940년 3월까지입니다. 소련군에게 있어서는 문자 그대로 재앙이었죠. 적의 부대를 토막내서 각개 격파하는 모띠(Motti, 장작패기 정도쯤 될까요) 전술이 빛을 발하면서 소련군은 핀란드군의 다섯 배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고 핀란드 전체는커녕 겨우 10% 정도를 먹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지어야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숙청의 칼날을 휘둘렀던 보로실로프는 후방으로 좌천되었고, 군을 적당한 수준으로 수습하고 성과를 낸 티모셴코(Semyon Konstantinovich Timoshenko, Семё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Тимоше́нко)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큽니다. 티모셴코는 바로 군의 현대화를 앞장서서 주도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거든요. 숙청의 칼날에서 살아남고 성공적인 지휘로 스탈린의 신임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과 정치의 줄다리기 싸움에서 균형추를 다시 군 쪽으로 끌고 오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사단들이 창설되는 과정에서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복직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대숙청으로 일단 한 번 꺾인 군의 사기가 돌아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고, 더구나 겨울전쟁은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인한 붉은 군대의 약점이 만천하에 드러나버린 전쟁이었던 만큼 군이 정상 궤도에 돌아왔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스탈린은 놀랍고도 깔끔하게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는 것을 보고 독일에 대한 더욱 큰 두려움에 시달리게 되죠. 황급히 새로 결정된 독일과 소련의 국경(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 갈라먹은 폴란드 위의 국경을 말합니다)에 요새를 지으라고 명령하게 되는 게 이 때입니다.

당시 군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는 티모셴코가 전면에 등장했을 때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던 키릴 메레츠코프(Kirill Afanasievich Meretskov, Кири́лл Афана́сьевич Мерецко́в)의 증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인민은 무엇을 직접 말하기를 무서워합니다. 그들은 관계를 망치고 불편한 상황에 처하기를 무서워하며, 진실을 말하기를 두려워합니다." (1940년 5월,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p. 88)

즉 겨울전쟁이 끝나고 소련군의 문제가 만천하에 드러난 시점에서까지 군의 숙청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덧붙여집니다. 스탈린 자신이,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는 사실 자체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주코프의 증언으로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독일 장군들의 회고록이 그렇듯이 주코프의 주장이 어느 정도 면피성일 가능성이 있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나 주코프가 나라에 드리운 위험을 느끼고 '전개하라!'고 명령을 내린다고 칩시다. 스탈린에게 보고가 올라갑니다. '무슨 근거로?'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베리야, 어서 주코프를 자네 지하실로 데려가게.'" (p. 103 - 104)

단순히 주코프가 겁쟁이라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리처드 오버리도 바로 이 뒤에 주코프가 겁쟁이여서가 아니다라는 말을 덧붙여놓았습니다만, 주코프 이 양반은 누구보다도 스탈린 앞에서 뻣뻣하게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티모셴코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진짜 문제는 한 사람이 이러한 정치 체제 - 스탈린이 옳다면 옳은 것이 되는 체제를 말합니다 - 를 뒤바꿀 수 없었다는 데 있죠. (책에는 메레츠코프가 NKVD에게 체포당했다고 적혀 있습니다만 실제로 그가 체포, 고문당한 것은 독소전이 발발한 이후입니다. 키예프 전투의 책임을 지고 총살당한 드미트리 파블로프의 친한 친구였다는 이유로)

그렇다고 스탈린의 이런 추측이 말이 아예 안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탈린의 이런 생각은 충분히 그 근거가 있었습니다. 본래 바르바로사 작전의 개시는 5월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동맹국인 이탈리아가 발칸 반도와 아프리카 전역에서 대삽질을 거듭하는 바람에 폰 클라이스트 원수가 발칸 반도로 내려가게 되면서 시간적인 순서가 대차게 꼬였거든요. 그렇게 촉박하게 독일군이 육박해 오리라고는 스탈린이 믿을 수 없었던 것이죠. 게다가 독일은 소련이 협상 테이블로 다시 나오도록 유도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여 주었습니다. 괴벨스가 일부러 대대적인 영국 침공 계획을 떠벌리고 난 후 스스로 책임을 지고 수습하는 것도 이런 기만술의 일환이었죠(《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p. 74). 여기에 더해, 당장 독일군이 소련을 치면 양면전선이 열리는 것인데 상식적으로 누가 그런 미친 짓을 감행하겠습니까? 그 정도로 미쳤던 히틀러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죠. 그리고 독일에는 히틀러가 있었구요.

그런 몇 가지 스탈린의 생각에 힘을 실어주는 정황도 있기는 있었지만, 그보다 많은 정황증거는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려 한다는 확실한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둘 사이에서 어느 것이 옳은 정보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재앙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자, 대숙청은 명백히 스탈린이 관여했고, 스탈린 스스로의 믿음으로 인한 정황증거의 무시 역시 스탈린이 관여했죠. 여기까지 보면 스탈린 때문에 모든 것이 박살이 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도 상당 부분 관여한 게 사실이기도 합니다. 헌데, 여기에 또 한 가지,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군 조직 자체가 당한 기습(p. 75)이죠. 어찌 보면 이것도 스탈린이 저지른 짓의 여파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소련군은 이 때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모든 것이 계획되어 정해진 시간에 예비 포격을 수행하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루트로 공격하는(그래서 그 반복성에 상대인 핀란드 군까지 조롱하던 - 《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p. 47) 딱딱하고 융통성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교리를 벗어나서 드디어 투하체프스키가 입안했던 종심 작전이 (비록 그의 이름이 입에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자리를 잡으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앞서 지적했듯이 수많은 장교들이 사면, 복권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군의 현대화는 조금씩 추진될 기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만일 몇 년이 지난 상태였다면 독일군은 작전 초기부터 이러한 현대화가 제대로 추진된 소련군과 싸워야 했을 것입니다. 완전히 국경지대에 축조된 스탈린 라인과 맞닥뜨리는 것은 덤이구요. 그러나 1941년의 소련군은 전환기에 놓여 있었고, 보신주의와 대숙청의 여파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당연히 이러한 군 조직의 개혁은 일정 혼란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탈린 라인도 시원찮은 상태였죠. 그리고 독일군이 바로 이 때, 소련군이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옷을 갈아입으려고 무진장 낑낑대며 애쓰던 바로 그 때, 등 뒤에서 비수를 들이댄 것이죠. 철저히 우연으로 선택된 바로 그 시기에.



정리하면, 소련군의 초기 대패의 원인은 다음 원인들이 복함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대숙청으로 인한, 소련군에서 한동안 말살되어 버린 종심 전투 교리와 전투능력. 대숙청 그 자체로 단정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습니다.
2. 스탈린 그 자신의 치명적인 오판과 거기에 대한 굳은 신뢰.
3. 그 변혁의 혼란기를 제대로 치고 들어온 독일군의 날카로웠던 타이밍. 이건 정말로 우연의 영역이지, 어떠한 계산된 움직임이 아닙니다.



자료출처
《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https://en.wikipedia.org/wiki/World_War_II_casualties - 2차대전 전체에서의 사상자 수.
https://en.wikipedia.org/wiki/Eastern_Front_(World_War_II)#Casualties - 동부 전선에서의 사상자 수.
https://en.wikipedia.org/wiki/Kliment_Voroshilov_tank#Combat_history - KV 전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German_encounter_of_Soviet_T-34_and_KV_tanks - KV 쇼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Erich_Hoepner#World_War_II - 에리히 회프너가 하달한 절멸계획 명령서.
https://en.wikipedia.org/wiki/Great_Purge -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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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04 05:05
수정 아이콘
재밌게 읽었습니다. 최근에 본건데 네이버 베도에 플린트 락 머스킷이란 수인 전쟁물을 연재하셨던 알파캣 님이 월오탱에 2차대전사를 연재하시는데 꽤 재밌더라구요.
이치죠 호타루
16/08/04 05:09
수정 아이콘
저도 몇 편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림체도 그림체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굉장히 훌륭했던 것으로 기억하네요.
유스티스
16/08/04 05:11
수정 아이콘
핡핡 꿀잼각.
지바고
16/08/04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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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흐흐
그런데 제가 역알못이라서.. 본문에사 러시아와 소련을 어떻게 구분지으면 될까요?
16/08/04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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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다 소련이라고 읽어도 될듯합니다.
이치죠 호타루
16/08/04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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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소련으로 퉁치시면 됩니다.
16/08/04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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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요즘 독소전쟁에 관심이 슬슬 생기네요.
이치죠 호타루
16/08/04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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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이 팔 게 정말 많긴 한데, 자료는 소련측 자료가 풀린 지 겨우 20년이라 독일측 자료에 경도되지 않도록 하는 주의가 필요하죠.
세종머앟괴꺼솟
16/08/04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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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로 쓰신 부분들은 의도하신 건가요?
이치죠 호타루
16/08/04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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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한 바는 아닙니다. 다 소련이라고 해야 사실 옳죠(단, 절멸 계획 하달명령은 러시아로 나와 있습니다).
세종머앟괴꺼솟
16/08/04 08:45
수정 아이콘
글 내용이 상당히 쉬우면서도 핵심이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써 주신 내용을 근거로 어차피 소련과 일전할 운명이었다면 바르바로싸 개전은 전략적으로 95% 정도는 잘했다는 입장입니다. 양면전선이 병크는 맞는데, 시간 늘어진 후에는 스탈린에게 선공권 넘어가고 그 때에는 스탈린이 전쟁 걸었을 거라고 봐서요. 오히려 독일 입장에서 그리스, 유고에 발목잡히지 않고 1달 정도 빨리 침공했으면 역사가 더 끔찍하게 변했을지도.. 역시 양차대전에서 큰그림 그리시는 역사의 수호자 갓탈리아..
이치죠 호타루
16/08/0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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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스탈린은 아무리 빨라야 1944년 이전에는 요새 축조 문제와 스탈린 자신의 독일과의 평화를 위한 광적인 집착 때문에라도 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가 제 의견입니다.

그리고 발칸에서 낭비한 한 달이 소련을 살렸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모스크바 전투에서 독일군을 가장 끔찍하게 괴롭혔던 것이 다름아닌 월동 준비였죠. 로코소프스키나 미하일 카투코프처럼 제한적인 시간벌이를 잘 활용하는 장군들도 있었고 바르바로사와 태풍 작전으로 시작된 독일군의 진격을 둔화시킨 것은 명백히 소련군의 역량이긴 했습니다만, 그 조직력과 그 엄청난 피해를 복구할 시간 없이 한 달을 더 버틸 수 있었는지는... 좀 의문이 많이 드는 게 사실이죠. 당장 모스크바 전투에 동원된 병력도 예상과는 달리 소련 측이 적었던 판이었으니까요.
표절작곡가
16/08/04 09:28
수정 아이콘
이렇게 긴 글 단숨에 읽었네요~~
어찌 이렇게 쉽고 재미있게 쓰실 수가...
제가 가지고 싶은 능력입니다...

참 독소전은 역대급 대전이네요~~
제가 알기론 가장 사상자가 많이 나온
전투 같은데 맞죠~??
이치죠 호타루
16/08/04 10:36
수정 아이콘
제가 긴 글 사이에 딴소리를 넣어 주제를 흐리는 것이 전매특허라, 모쪼록 과분한 칭찬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흐흐

독소전은 누가 뭐래도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참혹하며,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이 맞습니다. 천만 단위의 사상자가 불과 몇 년 사이에 나온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죠. 혹시나 해서 극히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ISIL과의 전투를 보니 놀랍게도 위키백과 기준 집계된 사망자 수가 모두 합쳐 대략 4만 가량이더군요. 그러니 수천만 단위의 사망자가 발생한 독소전쟁은 얼마나 처절한 전쟁이었을지는...

다만 워낙 데이터의 요동이 심해서 그렇기는 합니다만 만만치 않은 집계가 더 있는데, 13세기 몽골의 침략(누계 사망자 추정 6천만 명), 제1차 세겨대전(누계 사망자 약 4천만 명), 태평천국 운동(누계 사망자 최소 2천만 명) 등등이 있습니다.

또 2차대전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국가별로 보면 중국이 소련 다음가는데(최소 1천 5백만 명), 최소 730만의 전투원 손실과 일본군의 악랄함으로 인한 높은 비전투원 손실로 인해 어마어마한 수의 인명이 목숨을 잃은 바 있죠.
16/08/04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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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얼마 전 월드오브탱크를 시작하며 관련된 역사지식(?)을 조금씩 읽고 있었는데 이 글로 정말 한번에 정리가 됬습니다!
그 동안 독일의 소련 침략은 독일을 패배로 이끈 히틀러의 실수라고만 생각했는데, 나치 독일로서는 사상적으로 소련을 침략할 수 밖에 없었고 우연이든 필연이든 소련 국방의 변격점에 침략한 시기가 약할 때를 노린 (어차피 침략할 것이라면 나중에 국방이 강화되었을때와 비교하여 더 나은) 좋은 선택이었다는 시각은 새롭네요. 결국 모스크바를 눈앞에 두고 실패하여 더 많은 사상자를 낳게된 것이지만, 전략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나 봅니다.
만약 독일이 1941년에 모스크바를 점령하였다면 소련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이치죠 호타루
16/08/04 11:06
수정 아이콘
음, 저는 모스크바를 설령 독일이 잡았다한들 전쟁이 독일 손에 넘어갔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외려 독일이 양면전쟁을 열어제낀 것 자체가 문제라는 '개전 불가론' 쪽에 가깝죠.

모스크바가 넘어갔다면 문자 그대로 대참사가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기는 합니다만, 소련의 영토는 광대한 것이었고, 소련이 자랑하는 생산공장은 이미 우크라이나에 있던 걸 마지막 순간까지 다 뜯어서 우랄 산맥 너머로 보내버린 상태였습니다. 이들이 재가동되는 데 시간이 필요하긴 했습니다만, 그리고 그 사이에 모스크바 전투가 벌어진 것이었습니다만 설령 모스크바에서 깨졌다한들 독일군의 병참 능력으로는 우랄 너머의 공장까지 건드는 건 무리였을 겁니다. 암만 잘해봐야 모스크바가 공세종말점이었을 거란 이야기죠.

모스크바가 독일군에 넘어가는 것은 재앙이 맞습니다. 헌데 세바스토폴과 로스토프를 위시한 남쪽 방면의 전선은 그런대로 안정된 상태였고, 모스크바에 소련의 전군이 다 대기하고 있던 것도 아니니만큼 '한동안은' 소련이 버틸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한동안'은 독일군이 물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기 시작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되었겠죠. 여기에 미국의 도움이 가세한다면...

즉, 모스크바가 설령 넘어갔다 한들 소련군에는 아직 싸울 힘이 남아 있었고, 소련의 영토는 지나칠 정도로 광대했으며, 병참의 문제로 인해 독일군은 그래봐야 모스크바가 공세종말점이었을 것이며, 결정적으로 미국의 존재가 있기에 결과적으로 시간과 그로 인한 출혈이 훨씬 더 심할 뿐 독일은 소련과 개전한 이상 패했을 것이라는 게 제 결론입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16/08/0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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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점령 후 인질 및 협상테이블로 불러내서 국경선 확장 및 군축 등, 소련과 강화조약을 맺을 수는 없었을까요? .. 결국 히틀러는 필멸의 존재였는지요?
이치죠 호타루
16/08/08 09:56
수정 아이콘
애초에 독일은 절멸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인질 따위는 거의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만 1942년까지 독일군은 포로를 자국의 노동력에 동원하는 것을 명백히 망설이고 있었죠. 인도적이어서가 아니라 '더러운 볼셰비키 슬라브 족들'에게 자국의 '성전'에 참여하는 영광을 주지 않겠다는 쪽에 가까운 한심한 짓이었습니다. 더구나 애초에 강화조약 따위는 적어도 독일군이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라인(소위 A-A 라인)까지 진출하지 않는 한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는데 독일군은 이미 공세한계에 도달하여 모스크바 점령 자체가 기적이 될 판이었죠. 실제로 그런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도 않았구요. 그러니 소련과 전쟁한 것 자체로 히틀러의 운명은 결정났을 수밖에요.
율리우스 카이사르
16/08/08 11:24
수정 아이콘
전 히틀러를 옹호하는 입장은 아닙니다만, 그냥 유희수준에서 독일군이 2차세계대전에서 승리(승리의 조건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할 가능성은 없었는지 궁금한데, 단언컨데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는 말씀이신거죠?
이치죠 호타루
16/08/08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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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도의 희미한 가능성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를 가지고 따지는 정도인데(대표적으로 <독소전쟁사>의 역자인 채승병 씨는 모스크바 함락을 전제로 희박한 가능성이 있기는 있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조차도 없었다는 축이죠. 저만의 생각은 아니고,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9~1945년>의 저자 제프리 메가기도 이쪽입니다.
레이오네
16/08/04 11:18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굉장히 글을 잘 읽히게 쓰시네요. 부럽습니다.

육상전에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부 기록(빌헬름 카이텔의 구술을 정리한 'In the Service of the Reich' 등)에는 히틀러가 이미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 직후부터 OKW에게 그리스-지브롤터 양면 공략을 41년 초에 실시하도록 지시했다는 언급이 있다는 듯 합니다.(물론 그리스군에게 이탈리아군이 삽질을 할 줄은 몰랐겠습니다만 이집트 방면 영국군이 치고 올라오는 것을 경계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고요.) 지브롤터 공략은 40년 이탈리아 참전 시기부터 떡밥으로 심심하면 등판하던 이야기라(1941년 12월 알렉산드리아 공격처럼 MAS, 그러니까 자폭 모터보트 또는 유인 어뢰를 다량으로 투입하려 시도했습니다만 이 때도 그렇고 히틀러의 지브롤터 공략 결의때도 그렇고 프랑코가 결사반대해서 무산되었죠) 유고슬라비아-그리스 공략이 주체인 발칸 전역은 어느 정도 독일의 의지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듭니다. 따라서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지연에는 히틀러 본인의 책임도 조금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치죠 호타루
16/08/04 11:28
수정 아이콘
애초에 무솔리니가 건들지 않았으면 호의적이거나 최소한 중립으로 남아 있었을 그리스가 이탈리아와 붙은 게 40년 10월 말이었고, 등 뒤에 적을 놓고 싸울 수 없다는 의견 때문에(+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의 전력이 만만치 않다는 히틀러의 올바른 판단으로 인해) 이듬해 발칸 반도에 발을 들여놓게 되죠. 그리스가 연합군편에 붙어버리는 바람에 루마니아가 영국 공군의 폭격을 당하게 생겼는데 하필 독일군의 기름의 원천이 바로 이 루마니아의 플로에슈티 유전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여러 모로 봤을 때 이왕 적으로 돌아선 발칸 반도를 즉각 점령하는 건 독일군 입장에서 올바른 선택이었으되, 무솔리니의 말도 안 되는 욕심이 아니었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보기에 저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지연 책임을 전적으로 무솔리니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수원감자
16/08/04 12:18
수정 아이콘
요즘 앤드루 나고르스키의 '세계사 최대전투 - 모스크바 공방전' 을 읽고 있는데, 과연 1943년 이전까지는 독일이 일방적으로 전쟁을 주도했으며,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전까지 거의 소풍 다니듯이 소련군을 섬멸시키고 다녔다는 기존 인식이 올바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책에서 받은 느낌은 독소전 시작부터 소련군의 저항은 결코 만만치 않았으며, 독일군에게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강요했고, 1941년 겨울의 모스크바 공방전은 그 이후, 스탈린그라드나 쿠르스크 이상으로 치열하고 쌍방이 많은 피를 흘려야 했던 그야말로 세계사 최대의 전투라고 봐도 부족하지 않은 것 같거든요.

6월 개전 이후 모스크바 공방전까지 독일군의 사상자가 100만을 넘어선다고 하는데, 이 정도면 거의 궤멸적인 타격을 받은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고, 1942년 봄의 독일군은 새롭게 채워진 인원이 다수라고 봐도.

소련군이 일방적으로 쭉 밀리다가, 스탈린그라드 이후로 지옥이 되었다기 보다는, 그냥 처음부터 지옥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치죠 호타루
16/08/04 12:31
수정 아이콘
예, 말씀하신 것이 맞습니다. 독소전쟁사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이나 공히 1941년의 독일군의 진격 둔화는 독일군이 아니라 소련군의 역량에 의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절대 독일이 일방적으로 다 털고 다닌 게 아니라는 이야기죠.

다만 1942년은 이야기가 좀 다릅니다. 스탈린의 치명적인 오판의 결과로 모스크바가 아닌 남쪽에서 엄청난 구멍이 삽시간에 뚫려버리면서 소련군 전체가 흔히 모랄빵으로 통하는 극단적인 사기 저하 상태까지 밀렸고, 이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스탈린은 무진장 애를 써야 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흘린 피가 헛되지 않은 이유죠.

사람에 따라서 최대의 전투를 가르는 기준은 다 다릅니다. 또한 독소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전투를 꼽으라면 또 답이 다 엇갈리죠. 저는 쿠르스크 전투를 가장 중요한 전투로 치는데, 이전까지 그래도 최소한 지엽적인 측면에서나마 반격이 가능했던 독일군의 공세를 완벽하게 꺾어버린 전투이기 때문이죠.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 뒤에 붙어 있는 독일군측 인명 손실 자료를 따지면 1939년 9월부터 1942년 9월 1일까지 영구손실(사망, 행방불명, 영구 장애)을 입은 독일군 병력이 약 92만 정도 됩니다. 6월 개전 이후로 모스크바까지의 독일군의 사상자가 백만이라는 통계는 약간 과장되어 잡힌 수치인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런대로 얼추 들어맞는 정도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동 책의 6장에서 초반 6주간 독일군이 입은 인명 손실은 17만 명 가량이었다고 되어 있거든요. 백만을 넘어서지는 못하더라도, 동계 인명 손실과 모스크바 공방전의 치열함을 감안해보았을 때 100만에 육박하는 것은 사실이었을 겁니다.

여하간, 독소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옥이었죠. 어느 측면에서 보던지간에.
나이키스트
16/08/04 13:37
수정 아이콘
어제 하츠오브아이언 4를 소련으로 플레이했는데 대숙청 패널티가 어마어마한데 안할수도 없더라구요. 왜 이런짓을 하는지 전후 관계는 잘 몰랐는데 이 글을 보니 이해도 가고 흥미롭네요
이치죠 호타루
16/08/04 13:43
수정 아이콘
스탈린은 자신의 안위, 나아가 자신이 거머쥔 것의 안위를 위해서 처절할 정도로 싸우고 의심하고 두려워했던 인간이었기에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거죠. 여기에 볼셰비키 혁명부터 이어져내려온 "내부로부터의 중상"에 대한 위기의식 내지는 두려움이 더욱 스탈린의 두려움을 부채질했구요. 게임에서 인간의 심리를 그대로 구현해내는 것은 불가능한 수준이기 때문에 역설사에서는 이벤트 하나로 퉁칠 수밖에 없었겠습니다만...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심리를 먼저 읽어야 이해가 가능하더군요. 그 행동의 합리성은 차치하고서라도요.
드라고나
16/08/04 13:57
수정 아이콘
KV는 소수였고 T26과 BT전차가 개전 당시 소련군의 주력이었단 점을 보면 소련의 전차는 독일군의 전차를 충분히 버텨낼 수 있었다는 말에는 그다지 동의가 안 됩니다. 여기다 양측 전차병의 능력 차이 역시 압도적인 상황이었죠. 거기다 공군은 소련군의 압도적인 양으로도 주체가 안 될 정도로 압도적인 질적 우세에 있었습니다.
마지막 세 줄 요약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개전 당시 독일군의 장비 인력 통틀어 질적인 우세 역시 소련군 초기 대패의 원인 중 하나라고 봅니다.
이치죠 호타루
16/08/04 14:10
수정 아이콘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 전차라는 게 그런 쇼크 일으키고 다 휘저을 정도였으면 진작에 전쟁 끝났죠. 영국이나 프랑스가 전차의 질에서 밀려서 항복한 것도 아니니까요(마틸다, 샤르 등등). 독일군의 핵심은 전차의 운용이 선진적이었다는 점에 있었고 이 점에서 전쟁의 우세를 판가름한 것은 맞습니다. 다만 그 모든 걸 소련의 전차가 다 후져서 그렇다는 말로 퉁칠 수 없다는 이야기죠.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에 따르면 양군의 병력은 모스크바 전투 이전까지 외려 독일군이 우위에 있었더군요.

그리고 독일군의 전력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당시 4호 전차가 417대였는데(3호 개량형과 합쳐도 약 1천 1백 대), 이미 그 때 소련군에는 967대의 T-34와 508대의 KV 전차가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물론 위키에서는 장비의 결함을 지적하기도 하고 있습니다만, 그와 함께 전술적 역량의 부족과 숙련되지 않은 전차병이 결국 교환비 7 : 1이라는 대참사를 불러일으켰다고 기술하고 있죠.
자료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T-34#Operation_Barbarossa_.281941.29 / http://www.panzerworld.com/barbarossa-1941#tank-strength

딴 소리이긴 합니다만 저런 상황에서 어떻게 독일군이 동원병력이 더 많을 수 있었는지 그게 좀 황당하긴 하군요.
이치죠 호타루
16/08/04 14:20
수정 아이콘
아, 제가 어느 말을 빼먹었는지 이제 좀 감이 잡혔는데, 저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은, 승무원의 역량이나 제공권을 싹 빼고 순수 전차 대 전차의 기술력 싸움에서 딱히 밀리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걸 빼놓았으니 서로 이야기하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었겠네요.
세인트
16/08/05 11:20
수정 아이콘
이런 좋은 글을 이제 보다니. 추천드립니다.

새삼 느끼지만 무솔리니야말로 연합군의 숨겨진 스파이 수준...크크크
이치죠 호타루
16/08/05 11:31
수정 아이콘
무솔리니야말로 자신도 모르고 남도 모르면 백 번 싸워 백 번 깨진다는 말의 표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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