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서 도겸만큼 입체적인 인물도 드뭅니다. 여기서 입체적이라는 건 해석의 여지가 많다는 뜻입니다. 어찌 보면 한 황실에 충성을 다한 충신이자 일면식도 없는 유비에게 서주를 넘겨준 인격자 같기도 하면서, 또 어떻게 보면 비열한 속임수와 치사한 수작으로 높은 벼슬에 오른 후 마침내 천하를 도모하려 한 야심가처럼 보이거든요. 게다가 남아 있는 기록들이 상충되기도 합니다. 오서(吳書) 같은 경우에는 도겸을 강직하고 절개가 있다 하여 높이 평가하는 반면, 정사 위서 도겸전은 도의에 어긋나고 제멋대로 행동했다고 무척이나 폄하하지요. 하여튼 여러 모로 흥미로운 사람입니다.
132년생인 그는 나이로 따지자면 조조의 아버지뻘입니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는데 남들의 눈을 의식하는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열네 살이나 되어서도 깃발과 대나무 말을 만들어 동네 꼬마들을 끌고 다니며 전쟁놀이를 한 골목대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도씨네 아들이 싹수가 노란 놈이라고 혀를 끌끌 차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그가 필시 크게 될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했지요.]
젊었을 때는 학문을 좋아해서 공부를 많이 했고, 당시의 인재 등용 제도였던 효렴(孝廉)과 무재(茂才)로 천거되어 중앙정부로 들어가 상서랑(尙書郞)이 되었고 이후 다시 외지로 나와 현령이 됩니다. 이때 여강태수로 도겸의 상관이었던 장반이라는 자는 도겸의 선친과 친분이 깊었기에 도겸을 무척 아꼈습니다. 그러나 도겸은 오히려 그걸 치욕스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회에서 장빈이 춤을 추라고 권하자 몇 번이나 거절하다가 결국 억지로 흉내만 낸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도겸이 막되먹어서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의 상관에게조차 멋대로 굴었다고 혀를 찹니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그가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이라고 보았죠.]
이후 유주자사가 되었다가 다시 중앙으로 들어가 의랑(議郎)이 됩니다. 이후 변방에서 강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대장인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임명된 황보숭이 유능한 무장을 요청하지요. 그러자 조정에서는 도겸을 양무도위(揚武都尉)로 임명하여 파견합니다. 이 때 이미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은 것 같네요. 두 사람은 강족을 대파하고 돌아옵니다.
서쪽에서 또다시 한수의 반란이 일어나자 거기장군(車騎將軍) 장온의 참군사(參軍事)가 되어 재차 반란군 진압에 나섭니다. 그런데 장온은 유능한 도겸을 상당히 아꼈습니다만, 도겸은 또다시 그놈의 성질이 도져서 오히려 불만을 품고 술자리에서 장온을 뒷담화합니다. 그러다 그게 걸렸죠. 열 받은 장온은 당장 도겸을 유배 보내 버립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극구 말리죠. 유능한 인재인데 단지 술을 마시고 실수했을 뿐이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라고 간언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도겸에게 망할 놈의 성질머리 좀 죽이고 장온에게 사죄하라고 합니다. 결국 두 사람은 다시 화해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도겸이 천둥벌거숭이처럼 자기 잘난 줄만 알고 까마득하게 높은 상관의 뒷담화나 하다가 꼴좋게 걸린 한심한 작자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무려 거기장군이나 되는 최고위 벼슬아치가 까마득한 후배에게 욕을 얻어먹었는데도 너그러이 용서했을 정도로 도겸의 능력이 출중했다고 봅니다.]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자 조정에서는 도겸을 서주자사로 삼아 동쪽으로 보냅니다. 역시 능력자답게 서주의 황건적을 소탕했지요. 이후 동탁이 난을 일으켜 황제를 멋대로 갈아치우자 제후들이 동탁 토벌군을 일으켰습니다. 도겸은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동탁 토벌의 기치를 든 주준에게 병력을 보내 돕습니다. 그리고 동탁 사후 이각과 곽사가 정권을 잡자 주준을 맹주로 추대하여 그들을 토벌하고 천자를 맞아들이려 하지요. 주준이 그 제안을 거부하여 협천자는 무산되었습니다.
이 때 천자는 장안에 있으면서 제후들과의 연락이 모조리 끊겨 고립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도겸은 그런 천자에게 사자를 보내 공물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안동장군(安東將軍)에 서주목(徐州牧)으로 임명되지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천하가 동탁을 토벌하고자 일어났을 때 도겸은 오히려 한 발 뒤로 물러선 주제에, 이후 공물을 바치며 알랑방귀를 뀌는 것만으로 벼슬자리를 받아낸 비열한 소인배라고 봅니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제후들이 제각기 자기 욕심만 차릴 때 오직 도겸만이 천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충성을 바쳤으며 나아가 직접 천자를 역적들의 손에서 구원하려고까지 했던 한 황실의 충신으로 봅니다.]
이후 궐선이라는 자가 자신이 천자임을 자칭하면서 무리를 모았는데 도겸은 놀랍게도 이 자와 친하게 어울려서 사방을 노략질하고 다닙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갑자기 뒤통수를 쳐서 죽인 후 그 무리들을 흡수하지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도겸이 천자를 자칭한 역적과 어울렸던 반역도당이면서도 동시에 동료를 배반한 저열한 배신자라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도겸이 역적을 속여 넘김으로써 별다른 피해 없이 난을 진압한 탁월한 지략가라고 평가합니다.]
도겸은 정사를 돌보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왕랑, 장소, 조욱 등 이름난 명사들을 추천하여 벼슬자리를 주었고, 허소가 피난을 오자 극진히 대접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조욱은 점차 도겸과 소원한 사이가 되었고, 장소는 도겸의 추천을 무시했다가 열 받은 도겸에게 체포되어 옥에 갇혀 버렸으며, 허소는 도겸이 ‘겉으로는 겸손하지만 내심으로는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다’라는 박한 평을 내리며 그를 떠나고 맙니다. 대신 도겸은 조굉 같은 소인배들과 어울렸죠.
[그래서 어떤 이들은 도겸이 허소의 평가대로 현명하고 겸손한 사람의 흉내만 냈을 뿐 실재로는 소인배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그가 힘써 인재들을 발굴하고 등용한 진정한 목민관이었던 것으로 보지요.]
이후 도겸은 원술-공손찬 등과 손잡고 원소-유표-조조 등과 대립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난을 피해 서주로 도망와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주는 당시 치안이 확보되어 있었던 데다 식량도 충분히 비축되어 있어 비교적 살기 좋은 곳이었거든요. 하지만 조조가 연주 일대에 기반을 마련하자 조숭은 아들에게로 돌아갑니다. 그 도중에 도겸의 부하장수가 조숭을 살해하고 재물을 빼앗아 달아나지요. 이른바 서주 대학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다음 글 (
https://cdn.pgr21.com./?b=8&n=80056)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참고해 주세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도겸이 자신과 대립하는 적이었던 조조의 아버지를 무참히 살해하고 재물을 빼앗은 천인공노할 악당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그가 조조와의 악연에도 불구하고 병사를 보내 그 아버지를 호위해 주는 호의를 보일 정도의 인격자였는데 하필 그 부하가 재물에 눈이 먼 바람에 일이 꼬여버린 피해자라고 봅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걸친 조조와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조조의 일방적인 학살과 살육)이 끝난 후, 도겸은 서주목 지위를 유비에게 넘겨줍니다. 별다른 안면도 없었던 그에게 말이지요. 당시 도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만 둘 다 벼슬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후계자를 논하는 자리에도 두 아들은 완전히 배제되었지요. 당시 도겸의 권한이나 지위로 보건대 아들 둘에게 벼슬을 주는 건 너무나도 손쉽고도 당연한 일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도겸이 두 아들이 너무 어렸거나 혹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던 탓에, 혹은 당장이라도 서주를 탈취할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대악당 유비가 두려웠기에 마지못해 서주를 넘겨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자식들이 이 극심한 난세에 뛰어들기를 원하지 않았던 도겸이 일부러 아들들의 출사를 막았으며, 명망 높고 능력 또한 뛰어난 데다 한 황실의 말예이기도 했던 유비의 기반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선한 마음이 있어서 유비에게 흔쾌히 서주를 양도했다고 봅니다.]
그렇게 유비에게 서주를 넘겨준 후 도겸은 눈을 감습니다. 향년 63세였죠. 놀랍게도 예전에 그에 의해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던 명사 장소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지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과는 달리, 대부분의 인간은 선한 동시에 악한 존재입니다. 독재자의 주구 노릇을 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탱크로 깔아뭉개자고 주장했던 차지철은, 동시에 독실한 신자이면서 더없는 효자였습니다. 인간이란 원래 그렇지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항상 공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겸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자입니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악당으로도 인격자로도 비추어지는 인물이죠. 아무리 인간이 복잡한 존재라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평가가 갈리는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여러 사서(史書)들의 시각에도 꽤나 큰 차이가 있죠.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상당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서술되었고, 삼국지 위서에서는 몹시 부정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리고 소설인 삼국지연의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무결점의 대인배가 되었습니다. 보통 조조를 좋아하는 사람은 도겸을 싫어하고 유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도겸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는 지속적으로 도겸에 대한 두 가지 부류의 평가를 곁들여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중 마음에 드는 하나만을 골라 선택하는 건, 적어도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지양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진실은 그 둘 사이의 어디쯤에인가 위치해 있을 거예요. 전자도 맞고 후자도 맞으며, 동시에 전자도 틀리고 후자도 틀리는 그런 어정쩡한 곳에 말입니다. 그래요. 도겸은 한나라의 충신이면서 동시에 야심가이기도 했습니다. 인재 등용을 중요시했으면서도 소인배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서주로 모여들게 했으면서도 결국 그 백성들이 조조에게 학살당하도록 했습니다. 도겸은 그런 인물이었죠.
지나치게 모순적이라고요?
역사는, 대체로 그렇더라고요. 역사는, 본질적으로 인간을 다루는 학문이니까요. 그리고 인간은 항상 모순덩어리인 존재죠.
그렇기에 역사는 언제나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