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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4/02 01:07:52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나폴레옹의 수많은 해꼬지를 교황이 은혜로 돌려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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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과 교황 비오 7세


나폴레옹과 교황의 관계에 대해서 일전에 쓴글. 완전히 새글이 아니라 보완 정도라 겹치는 내용이 많습니다.









중세부터 유럽의 역사에서 종교의 역사는 빼놓을 수가 없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에서 가톨릭의 위상은 땅바닥에 추락했습니다. 지식인들은 가톨릭을 구시대 유물로 여겨서 공격을 퍼붓었고, 원래 성직자 출신으로서 시대 분위기를 보고 환속한 뒤, 결혼 등으로 가정을 꾸린 환속 사제 출신들도 대거 있어서 여러모로 좋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지식인 유무를 떠나서 혁명 분위기를 타고 출세한 자코뱅 성향 장군들도 여기저기 주위에서 들은것 때문에 종교에 대해서 시큰둥했었구요. 




한 마디로 말해서 가톨릭은 새로운 프랑스에서는 '구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았습니다. 종교관에 대한 철학적인 판단 이런걸 떠나서, 혁명으로 인해서 한 몫 벌고 출세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왕당파들 비스무리하게 "지금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서 우리를 밀어내고 다시 자기들이 해먹으려고 하는 놈들" 이런 비슷한 느낌도 있었을테구요.





유명한 일화로 나폴레옹이 정교협약을 해서 대대적으로 정계요인들이나 장군들 불러서 미사도 하고 접견도 하면서 행사 자리를 만들었는데, 거기 참석한 장군들 대다수가 뭣 씹은 표정으로 있다가 자기들끼리 요란하게 소란이나 피우면서 딴청 부리고, "우리가 이런 꼴 보려고 그렇게 전쟁터에서 피를 흘렸나?" 고 대놓고 나폴레옹이 들으라고 비아냥 거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톨릭의 위상이 땅에 떨어진 프랑스에서 다시 가톨릭을 부흥시킨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 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건, 나폴레옹 본인은 무얼 어떻게 보더라도 열렬한 가톨릭 신자와는 거리가 있었다는 겁니다.




나폴레옹은 어린 시절 학창생활 때 당시 학교에 있던 사제와 별로 좋지 못한 추억이 있었던 탓에, 딱히 신앙생활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이 계속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면 가족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겠지만 철이 들 무렵부터 혼자 코르시카와 떨어진 프랑스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기도 했었고, 또 십대 시절 나폴레옹은 '장 자크 루소' 의 열렬한 추종자였는데 루소는 저서 《에밀》이 교황청에서 분서(焚書) 명령도 내려진 적도 있었던 지라 그런 루소의 저작을 읽으며 자란 나폴레옹의 사고관에도 큰 영향을 끼쳤을 테구요. 



(다만 나폴레옹은 중년 무렵에는 루소를 완전 부정했는데, 세인트헬레나에서 죽기 얼마전 무렵에는 또 루소를 다시 찬양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나폴레옹은 본인 자체는 죽을때까지 종교적 신앙은 엶었지만, 이와 별개로 종종 종교에 대해 비난을 퍼붓고 부정하기도 했던 당대 몇몇 지식인들과는 거리를 두고, 종교에 대해서는 아주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좀 종교에 호의적이다 라는 것이 뭔가 좀 거시기 한게... 





혁명 이후에 프랑스는 하루만 지나면 어제 멀쩡하던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대혼란이 계속 되고, 파리에서는 온갖 돈 많은 사람들이 난교 파티를 해대고 지방에서는 도망 가서 산적이 되버린 사람들이 넘쳐나는 등 당대의 모랄이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산책을 하다가 교회 종소리를 듣고 자기 입으로 말하기를, "주둥이만 산 철학자, 관념론자들이 아무리 떠들어 봐야 순박한 농촌 사람들에게 정신적 안정을 줄 수 없는데, 교회 종소리 한번만 울리면 사람들은 모두 마음의 편안을 얻는다. 느그들 지식인들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종교는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는 입장이었습니다.




즉 나폴레옹은 '통치를 안정화 시키기 위한 수단' 으로서 종교에 주목했고, 종교를 높이 여겼습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이 생각하는 종교는 '조직' 이었지 결코 무슨 개인의 겸허한 신앙이 어쩌고... 하는 건 별 관심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또 그런 의도를 대놓고 자기가 여러번 입으로 말하기도 했으니, 종교를 높이 여겼다고 해도 뭔가 신앙심 깊은 군주와는 거리가 있었던 겁니다.




일례로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 무렵에 이슬람교와 접촉한 이후에는 이슬람교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이며 "나는 알라의 신자다." 운운하고, 세인트헬레나 시절에도 무함마드를 찬양하는등 이슬람교에 극히 호의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폴레옹의 눈에 이슬람교의 교리는 통치를 하는데 있어 크리스트교 보다 더 좋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인트헬레나 시절, 부하들과 토론을 하다가 "중국에서는 황제를 신과 같이 여깁니다." 라고 하자 갑자기 별안간 "바로 그거야!" 하고 소리를 지르며 주위 사람들을 놀래키기도 했으니...






바로 그런 사람인 나폴레옹이 교황청과 협상을 통해 정교협약(政敎協約)으로 프랑스에 다시 가톨릭을 도입하고 되살렸지만, 애초에 목적이 저러했으니....





교황청 입장에서는 처음에는 프랑스 쪽에서 가톨릭을 다시 받아들이겠다고 하니 이게 왠 떡이냐 싶었겠지만, 저쪽에서 내걸은 내용을 보니 뭔가 이상했습니다. 여러가지 내용이 있었지만, 가장 핵심적인 요구 조건들은 다음 조건들이었습니다.




"주교의 선임은 나폴레옹이 하고 교황은 그걸 승인만 한다."


"주교가 임명하는 본당의 신부들은 정부의 정책에 반하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주교든 신부든 일단 모두 정부에게 충성 맹세를 한다."


"그 외 이런저런 교황이 내리는 칙령들은 프랑스 정부가 인정해야 효력이 생긴다."





말 그대로 나폴레옹 쪽에서 교황청을 바지사장 격으로 정통성을 위해 이름만 빌려 쓸테니 너희들은 우리가 이거 하자고 하면 도장이나 찍어라, 라는 것입니다.




또한 교황청은 처음에 협상 과정에서 '프랑스는 로마 가톨릭교를 국교로 한다' 를 협약 내용에 집어넣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막판에 나폴레옹 쪽에서 협상으로 '프랑스 공화국은 로마 가톨릭교가 대다수 프랑스 시민의 종교임을 인정한다.' 으로 내용을 바꿔 버렸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가톨릭 도입에 대해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만큼, 가톨릭 국교 선언을 하지 않고 이들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주는 편이 나폴레옹 입장에선 내부 불만을 잠재우기 좋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교황청은 이런 대놓고 나폴레옹 좋은 일만 해주는 협상에 반발했지만, 나폴레옹은 그때마다 "내 말 안들으면 프랑스 전국을 루터 교나 칼뱅 교로 개종시키겠다." 고 큰소리를 치는 한편, 협상관을 통해서 "만약 협상이 결렬되면 장군 뮈라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할 것이다. 뮈라는 로마를 정복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고,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뮈라 부인 역시 로마의 진기한 물건에 대해 아주 큰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라는 둥 '맞고 싶지 않으면 도장이나 찍어라' 라고 대놓고 협박을 자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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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할때 교황 비오 7세 역시 불려나가 대관식에 참석했는데, 보통 교황이 왕관을 주는 관습을 무시하고 나폴레옹이 스스로 왕관을 쓴 일화가 유명합니다. 물론 이 역시 사전에 협의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교황 입장에선 좀 껄끄러운 일이긴 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교황청 내에서 이 일을 두고 교황에게 '일부러 파리까지 갔는데 성별식만 하고 왕관을 수여하지 않는게 말이 되는가' 라고 따지며 비난하는 여론이 있었고, 교황의 권위를 공격하는 로마 추기경들의 등쌀에 입장이 몹시 난처해진 교황은 대신 나폴레옹에게 자신에게 대가로 무얼 해주기를 원했습니다.




이를테면 앞서 실패했던 '로마 가톨릭은 프랑스의 국교임을 분명히 한다.' 라는 선언 문제라던지, 프랑스가 장악하고 있는 로마냐 지방을 교황청에 떼어주는 일이라던지, 그것도 아니라면 프랑스가 민법전으로 허용하고 있는 이혼 문제를 폐지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게중에 하나라도 해주면 교황 입장에서도 돌아가서 할 말 정도는 생길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뻔히 교황의 사정을 알면서도 전부 거절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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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의 코 앞에 있는 안코나 지역






결국 나폴레옹의 프로파간다 용으로 실컷 쓰여지고 대가라곤 하나도 얻지 못한 채 불쾌감만 느끼고 돌아온 교황이나 교황 주변의 추기경단 모두 '이건 사기다' 라고 생각하여 이 무렵부터 교황청과 프랑스의 관계는 극히 악화되었고, 교황청에선 정식으로 서한을 보내 "솔직히 굉장히 불쾌하고, 호의를 기대했지만 전부 빗나가고 말았다. 현재 안코나에 있는 프랑스군을 철수 시켜달라. 그게 우리가 바라는 조건이고 그것이라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계속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것마저도 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들이 뭐라고 나에게 이래라저래랴 하느냐' 되려 불쾌감을 강하게 표시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나폴레옹은,



"교황에게 있어 나는 카를 대제 같은 사람이다. 상대가 얌전하게 있다면 관계는 그대로 유지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교황을 로마의 일개 주교로 격하시키고 말겠다. 정말이지 로마 궁정만큼 터무니 없는 헛소리를 하는 데가 없다."




라며 대놓고 교황을 쫒아낼 수도 있다고 말하는 한편, 교황청에 정식적으로 서한을 보내 "전 이탈리아가 나에게 복종한다. 교황은 로마의 주권자지만, 나는 로마의 황제다." 라며 '넌 그냥 내 부하다' 라는 의사표시를 노골적으로 보내기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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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드 보아르네





이 당시 이탈리아 부왕 자리는 나폴레옹의 양아들인 외젠이 맡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에 교황청이 있는 만큼 나폴레옹은 외젠과 서신으로 교황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이 편지 내용을 보면




 "언젠가 적당한 시기와 장소를 봐서 로마 궁정을 손봐줄 생각이다. 처절하게 후회하게 만들겠지만 아직은 그 시기가 아니다.. 로마에는 편지를 더 안보내기로 했다. 그 '멍청한 영감쟁이' 와는 더 드잡이를 펼치고 싶지 않다."



이렇게 비오 7세를 '멍청한 영감' 이라 부르는 한편, 
 



 "내가 볼때, 지금 교황이라는 작자는 세상을 뒤집어엎고 인간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나타난 가짜, 사기꾼 구세주가 분명한 것 같다. 어쨌거나 다행이도 그 작자가 무력하기 짝이 없으니 이것은 신에게 감사를 드릴 일이다. 아무튼 난 그 따위 엉터리 성직자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더라도 얼마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며 교황을 '인간 세상에 고통을 주기 위해 나타난 사기꾼' 으로 표현하며 완전히 얼간이 취급을 하기도 했습니다.






평소에도 이렇게 같잖게 여기며 뒷담화를 하고 있을 정도로 무시하고 있으니, 실제 정국에서도 프랑스는 교황청에 대해 고압적인 분위기를 계속 이어가서 마침내는 '계속 이 따위로 굴면 로마만 남겨 두고 나머지 교황령 전부를 군사력으로 점거하겠다' 고 대놓고 직접적인 군사 협박이 나오는 상황까지 되어버렸습니다. 이에 놀란 교황청은 "지금 로마 내에 있는, 프랑스의 적인 영국인들을 추방하도록 하겠다." 면서 프랑스가 펼치는 대륙전쟁에서 반(反) 프랑스 연합쪽의 편을 들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주는 건 없어도 받는건 끝없이 해야겠다는 나폴레옹은 "그 정도로는 만족 못한다." 면서, '프랑스 제국의 적, 황제의 적에 대해 항상 제국과 공동 전선을 펼치겠다고 약속' 하라고 계속 협박을 감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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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에 승낙하면 이제 교황청은 중립국도 동맹도 뭣도 아니고 그냥 프랑스와 나폴레옹이 시키는 대로 졸졸 따라가야 하는 졸개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교황 비오 7세는 "아무리 그래도 도저히 그런건 할 수 없다." 이를 거절했고, 나폴레옹은 진짜로 이탈리아 주둔 사령관에게 지시를 내려 '로마 진격' 을 감행했습니다.




결국 프랑스군이 로마에 진입했고, 프랑스군은 교황의 수입 및 재산, 교황이 다스리는 관할 구역 그 모두를 프랑스 제국에 합병했으며, 로마는 '자유 도시' 로 선포되었습니다. 교황청을 하나의 국가로 본다면 이때 교황청은 멸망한 거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든 영토와 재산마저 뻇긴 상태로 퀴리날리스 궁에 사실상 감금된 상태였던 비오 7세는,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나폴레옹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나폴레옹을 파문 시켜 버리는 초강경 대책으로 맞섰습니다. 아무러한 나폴레옹도 여기에는 벙쪘는지, "교황이 완전히 미쳤나 보다. 추종자들을 전부 다 체포해라!" 며 대응했고, 교황 주변의 여러 사람들 역시 마구잡이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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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되어 교황 추종자들 뿐만 아니라, 교황 본인 마저도 체포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직후 "난 절대로 교황 체포 명령을 내린 적 없다. 이건 지시가 잘못 이행된 거다." 라며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아마도 나폴레옹이 직접적으로 체포 명령을 내리진 않은 것 같지만, 워낙 나폴레옹이 평소에 관련자들에게 편지로 자주 "교황이 자꾸 이딴식으로 나에게 반항한다면 마땅히 체포해야 한다."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기 때문에, 그의 영향 역시 아예 없다고 볼 수는 없는 상태였습니다.





일단 사고든 뭐든 교황이 체포된 상태에서, 나폴레옹은 교황을 풀어주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일단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교황을 풀어줘봐야, 풀려난 교황이 "폭군 나폴레옹의 행위를 규탄한다!" 라고 하면 자기 이미지가 구겨진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교황은 결국 유배 생활을 하는 꼴이 되어 나폴레옹이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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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나이에 이리저리 끌려다닌 교황의 수난







교황은 처음에는 로마에서 피렌체로 끌려갔습니다. 하지만 피렌체에 있던 나폴레옹의 누이인 엘리자는 "황제가 여기에 교황을 두라고 확실하게 말을 했었던가? 정확한 지시가 없는데 교황을 여기에 두다가 불호령을 받으면 성가시다." 며 교황이 머무는 것을 거부했고, 일개 불청객으로 전락한 교황은 한참 더 북쪽으로 가서 그르노불에 감금되었다가, 다시 또 이동하라는 명령에 이번엔 사보나로 끌려갔습니다. 좀 더 나중에는 나폴레옹이 있는 퐁텐블로까지 끌려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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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교황은 69세였습니다. 요즘 기준으로도 적잖은 나이는 아닌데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힌 고령이었기 때문에 장기간의 이동에 매우 힘들어했고, 이리저리 끌려다녀 완전히 녹초가 되어 그 처량한 모습을 본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교황씩이나 되는 인물을 무슨 개를 몰듯 끌고 다닌 셈이었지만, 나폴레옹은 주도면밀하게도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그 늙은이가 절대로 투옥된 것처럼 보이게 하면 안된다. 교황을 감시하는 호위병의 복장을, 마치 교황을 모시는 의장병 같은 차림새로 꾸며라." 라며 지시를 내렸습니다. 때문에 교황은 실제적으론 무장한 병사들에게 감금 되고 생활이 통제되는 상황이었지만, 명목상으로는 '교황의 안전을 위해 수비병들에게 둘러 쌓인 상태' 였고 당시 무소불위에 달하던 나폴레옹의 권위 때문에 타국에서도 교황의 처지를 어떻게 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에게 전재산과 전영토가 다 날라가고, 일신의 자유마저도 빼앗기고 주위 측근들도 모조리 잡혀간 상태임에도 불구, 비오 7세는 나폴레옹이 하라는 대로 졸개 노릇을 하지 않고 투쟁을 계속 했습니다. 사실 비오 7세는 성격이 완전히 '성자' '순직자' 타입의 순도 100%의 종교인이었는데, 나폴레옹은 이런 비오 7세를 완전히 오해해서 정치정략에 능해서 대충 협상으로 먹을거 주면 따라오는 타입, 혹은 워낙 겁이 많아서 주위 측근 사람들에게 휘둘리기나 하는 타입,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훗날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 스스로 이렇게 후회할 정도였습니다.




"내가 눈이 멀었었지. 교황을 나약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었으니. 그가 나에게 저항할때도 난 그게 그가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의지가 약하니까 주변 측근들의 사악한 충고에 굴복했다고 말이야."




재산도 없고 영토도 없는 상태에서 교황이 나폴레옹에게 대항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주교 임명권 거부' 였습니다. 어쨌거나 나폴레옹이 아무리 황제 노릇을 한다쳐도 교황은 아니었고, 주교 임명은 형식적으로나마 교황이 승인해야 합니다. 나폴레옹이 고른 사람을 교황이 도장만 찍으면 끝나는 일이었지만 교황은 결코 이를 따르지 않고 거부했습니다.




때문에 나폴레옹은 1811년 '제국 주교회의' 를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교 임명이 6개월 이상 지체되면, 대주교가 그의 대리인으로 주교를 임명할 수 있다' 는 원칙을 동의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일단 비오 7세가 이를 거부했고, 모인 주교들마저도 "교황이 이 자리에 없는데 이런 회의가 무슨 정통성이 있느냐" 며 따지고 들자 회의는 난장판이 되었고 나폴레옹은 공의회를 해산시키고 반발하는 주교를 잡아 가두는 것으로 대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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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나폴레옹






이런 일이 있은 후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그 무소불위의 나폴레옹도 결국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패망 직전 나폴레옹과의 협상으로 교황은 무려 5년만에 유배 생활을 끝내고 로마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나폴레옹이 교황에게 한 행동을 모두 합쳐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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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에게 있어 나는 카를 대제 같은 사람이다. 얌전하게 있으면 그대로 두겠지만 계속 까불어댄다면 교황을 로마의 일개 주교로 만들어버릴테다!"


"정말이지 로마 궁정만큼 헛소리를 하는데는 없군..."


"전 이탈리아가 나에게 복종한다. 나는 로마의 황제다!"


"교황이 자꾸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교황령의 연안 지역을 모조리 점령해버릴 것이다."


"언젠가 적당한 시기와 장소를 봐서 로마 궁정을 한번 제대로 손봐줄 생각이다. 처절하게 후회하게 만들겠다."


"그 멍청한 영감쟁이와는 더이상 드잡이를 벌이고 싶지 않다."


"지금의 교황이란 작자는 세상을 뒤짚어엎고 인간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나타난 가짜 사기꾼임에 분명하다. 이 작자가 무력하기 짝이 없으니 신에게 감사드릴 일이다."


"나는 그 엉터러 싱직자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 작자를 무시하더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교황이 자꾸 이따위로 반항하면 체포해야 한다."


"(체포 이후)그 늙은이가 감금당한 것처럼 보이면 안된다. 감시병에게 근위병의 옷을 입혀 보호중인것처럼 꾸며라."




- 모두 실제로 한 말




여타 행적 : 교황청에 대한 군사 협박, 외교적 기만, 대관식에서 망신 주기, 교황청에 대한 군사개입, 교황 측근들 체포, 교황청 영토 불법 점유, 교황청 재산 불법 탈취, 교황 납치, 납치된 교황을 수없이 이동시키며 호위중인것처럼 기만, 5년간의 감금 등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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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으로 해꼬지 당한것으로 따지면 나폴레옹에게 수없이 패배했던 여타 유럽 국가 지도자들 등을 합쳐도 최고로 수난을 당한 교황이라, 그 누구보다 나폴레옹에 대한 원한이 깊어도 이상하지 않았던게 비오 7세 였습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순교자 타입의 종교인으로서 나폴레옹에게 굴복하지 않았던 비오 7세는, 이후 놀라운 관용을 보여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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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치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패망한 이후, '모후' 로 불리던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치아는 일단 파리를 벗어나 이탈리아 쪽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이때 레티치아는 교황을 만났는데, 교황은 레티치아를 이렇게 말하며 격려했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언제나 중요한 망명자들의 나라였던 로마에 가시더라도, 환영받을 수 있으실 겁니다."




레티치아는 교황의 배려 덕분에 로마에 일단 머물면서 대리인을 시켜 서둘러 파리의 재산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명색히 황제의 어머니인데다 레티치아가 저축을 워낙 좋아했으니 그렇게 정리한 재산도 상당해서 나폴레옹 일가는 이를 통해 그래도 곤궁하지 않게 생활 할 수 있었습니다. 일단 정리 끝난 레티치아는 로마를 떠나 나폴레옹이 있던 엘바 섬으로 옮겨 가, 잠깐 동안 아들과 함께 생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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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떠나 이른바 '백일천하' 정권을 일으키자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나폴레옹이 처음 패망할떄 나폴레옹은 '퐁텐블로 조약' 을 맺어 '협상' 을 통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협상이었으니 이런저런 신변 보장은 있었구요. 또한 프랑스에 돌아온 루이 18세 정권 역시 일단은 "옛 일에 대해 죄를 묻지 않겠다." 고 했었기 때문에, 다소 괄시나 푸대접은 있을지언정 나폴레옹 관련자라고 해도 그것만으로도 처벌 받는다는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엘바를 탈출하면서 조약을 위반함에 따라, 나폴레옹에 협력하는 관련자는 '반역자' 가 되었고, '반역도당 수괴' 의 지인인 나폴레옹의 가족들도 위험해졌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이 승리한다면 상관없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패배했고 나폴레옹 본인도 세인트헬레나에 유배 당하는 신세가 됩니다.(만약 영국이 아니라 프로이센 블뤼허에게 잡혔다면, 그냥 바로 총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레티치아를 비롯한 나폴레옹의 가족들도 다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1년 전보다 훨씬 위험해진 상태였습니다. 다시 돌아온 루이 18세 정권은 이제 대놓고 나폴레옹 관련자를 처벌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레티치아 일행은 일전에 사이가 좋던 토스카나의 페르디난트 3세 대공에게 의지하기 위해 토스카타로 갔지만, 프랑스에 대해 척을 질 수도, 그럴 힘도 없는 대공으로서도 입장이 몹시 난처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외교적 압력 때문에 대공은 "일시적인 체류만 허락한다." 고 지시를 내렸고, 레티치아 일행은 다시 떠날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갈데가 없었습니다. 일행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1년 전 약속 - 언제라도 교황청은 망명자를 환영한다 - 을 기억해내고 교황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윽고 답변이 왔습니다.



"만일 레티치아 부인과 (레티치아의 남동생) 페쉬 추기경이 자유로운 몸으로 도착하든 아니면 감시를 받는 상태로 도착하든 교황께서는 체류에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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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7세




교황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치아 일행은 로마로 이주하여 자리를 잡았습니다. 당시 이미 66살의 고령이었던 레티치아는 감격해서 교황에게 이런 감사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저는 정말 온갖 아픔을 간직한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제게 유일한 위안이 되는 것은 교황께서 과거를 잊으시고 제 가족 전부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시는 것을 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교황 정부에서만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에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에 자리를 잡는다고 모든 안전이 확보된 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프랑스 황제의 적이 로마에 머물고 있는 것 자체가 프랑스 국왕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교황청 주재 프랑스 대사 역시 여러 안 좋은 이야기를 교황청 내에서 퍼뜨리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이런 작전이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치아의 남동생이자, 성직자였던 페쉬 추기경이 동료 추기경들의 장례에 참석하려고 했지만 문제를 우려한 수석 추기경 선에서 '불허' 가 나면서 참석도 하지 못하면서, 로마에서 점점 붕 뜬 위치의 불청객이 되어갔던 겁니다.



그런데 레티치아 일행이 점점 로마에서 위치가 붕 뜨며 눈칫밥 먹는 불청객으로 전락하려고 할떄, 사태를 파악한 교황은 직접 움직였습니다.



교황은 자기가 페쉬 추기경을 받아들인다는 의사를 표시했고, 추기경들에게도 그와 문제없이 교류하라고 직접 언질을 주었습니다. 또한, 교황이 직접 레티치아를 방문하기까지 합니다. 교황이 나폴레옹의 가족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의사표현이었던 셈입니다. 교황이 이렇게까지 하자, 감히 교황이 보호하는 사람들에 대한 쑥덕거림이 더 이어지지 못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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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나폴레옹은 죽기 직전까지도 영국의 집권 정부가 바뀌어서 자기를 이 황량한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이 여러가지로 꼬였고 무엇보다 딱히 나폴레옹을 대변해줄 세력도 없는지라 오히려 엑스 라샤펠 회의에서  '나폴레옹의 억류는 계속한다.' 는 재확인만 있어 별 희망없는 기대를 한 셈이었습니다.




어쩄든 세인트헬레나는 나폴레옹이 진저리를 낼 정도로 기후가 좋지 않는 곳이었고,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나폴레옹은 건강이 심하게 안 좋아 고통을 자주 드러냈습니다. 그 소문은 로마에 머무는 어머니인 레티치아에게까지 전해질 정도였는데, 늙은 레티치아는 아들이 그 먼곳에서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하고 병에 시달릴것이라는 두려움에 어떻게든 나폴레옹을 그곳에서 빼내보려고 수 많은 사람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물론 대체로 고생만 하고 소득이랄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주요 인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한 사람, 교황만이 늙은 레티치아의 부탁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자기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행위는 다 한 사람이 나폴레옹이었지만, 교황은 나폴레옹의 처지와 그 어머니의 눈물어린 부탁에 측은지심을 느꼈고, 나폴레옹이 자신에게 행한 온갖 수많은 해꼬지는 제껴두고 (교황 입장에서)나폴레옹이 했던 선이라고 할 수 있는 '그래도 나폴레옹 덕분에 프랑스에서 가톨릭이 부활했으니...' 라는 점만 생각하며, 영국의 섭정 왕자에게 친필 편지를 보냅니다.






"...황제의 가족은 바위산에 불과한 세인트헬레나 섬이 건강에 치명적이어서 불쌍한 유배자의 시력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분명 당신도 우리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프랑스 왕국에서 종교의 복원에 기여한 것은 특히 그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1801년, 그의 경건하고 용기 있었던 행동은 우리를 감동시켰고, 그 후의 여러 잘못을 잊고 용서하게 합니다. 물론, 사보나와 퐁텐블로에서의 일은 판단의 잘못이었고, 또는 과다한 인간 야심의 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의 '정교협약' 은 치유를 위한 기독교적인 동시에 영웅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나폴레옹의 고통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건 우리 마음에 가장 큰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누구에게도 위협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디 그로 인해서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교황이 이런 탄원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답장은 없었고, 나폴레옹의 세인트헬레나 생활이 끝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인트헬레나에서 고통 받으며 어떻게든 유럽 내 여론이 바뀌어 자기가 나갈 수 있기만을 바란 나폴레옹을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비호한 사람이, 나폴레옹이 셀수도 없이 폭언을 퍼붓고 수도 없이 해꼬지를 가했던 인물이었던 사실이 참 아리송 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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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02 02:03
수정 아이콘
나폴레옹은 그 일을 저지르고 영국 정부가 빼주길 기대하다니....
닭장군
19/04/02 02:58
수정 아이콘
나폴레옹의 수많은 꼬치를...
패트와매트
19/04/02 06:03
수정 아이콘
나폴레옹 혐성이야 뭐...
ioi(아이오아이)
19/04/02 07:09
수정 아이콘
교황 진짜 잘 뽑았네요. 물론 그 때는 호구 취급 당하면서 욕을 먹긴 했겠지만 종교가, 교황이, 필요한 이유를 몸으로 보여줬네요
19/04/02 11:33
수정 아이콘
엄청 재미있네요 잘읽었습니다
걸그룹노래선호자
19/04/02 12:24
수정 아이콘
은혜를 원수로 갚은게 아니라

원수를 은혜로 갚았네요.
19/04/02 16:28
수정 아이콘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죠?
교리든 이념이든 그것에 투신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게 좋은 쪽으로 나타난다면 굉장히 훌륭해질 수 있지요
다만 반대로 위험해질 수도 있는게 문제지만
묵언수행 1일째
19/04/02 16:51
수정 아이콘
오랫동안 죽어라고 싸우다가 뭔가 교감이 생긴 것이 아닐까요 ?
평생을 미워하고 싸우던 적수가 어이없이 무너졌을 때 생기는 감정은 통쾌함이 아니라 뭔가 안타까움이나 아쉬움인 경우도 많죠.
허전하고 .....
19/04/02 17:23
수정 아이콘
타락하지 않은 성직자는 정말 선 그 자체인듯
복슬이남친동동이
19/04/02 18:06
수정 아이콘
언제나 잘 보고 갑니다. 충성댓글 남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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