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3/03/30 20:36:23
Name Eternity
Subject [리뷰] 워낭소리(2008) - 팔순 노인과 마흔 살 소의 이야기 (스포있음)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반말체인 점 양해바랍니다.*





[리뷰] 워낭소리(2008) - 팔순 노인과 마흔 살 소의 이야기



소가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있다.
소도 나이가 들고 할아버지도 나이가 들고, 소가 아프고 할아버지도 아프고.
그렇게 30년을 함께해 온 팔순 노인과 마흔 살 소의 이야기. <워낭소리>.

일반적으로 보통, 소의 수명은 15년이라고 한다. 하지만 영화 <워낭소리> 속의 소는 이러한 생물학적 상식을 뛰어넘어 마흔 살이 넘게 살아왔다. 편하게 사료를 먹여도 괜찮으련만 소의 건강을 위해 할아버지는 소 먹일 꼴을 베기 위해 매일 밭에 나가고 산에 오른다. 할머니는 이런 할아버지가 못마땅하다. 한 쪽 다리가 불편해서 제대로 거동하기도 힘든 아픈 몸을 이끌고 매일같이 밭에 나가고 산에 오르는 할아버지가 못마땅한 할머니는 자꾸만 소를 팔라고 잔소리를 하지만 할아버지는 요지부동이다.

머리가 아파 방 안에 몸져 누워있을 때에도, 귀가 잘 안들림에도 불구하고 소에 매달린 워낭에서 딸랑 딸랑 울리는 워낭소리만큼은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고 소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남들처럼 논에 농약도 치면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농사를 짓고 싶어 하지만, "농약 치면 소가 죽어."라며, 혹시라도 소에게 해가 갈까봐 논에 농약을 치지 않고 농사를 지어 온 고집쟁이 할아버지. 어느 날 풀썩 주저앉은 소를 진찰하러 온 수의사로부터 소가 1년을 못 넘길 거라는 얘기를 듣지만 할아버지는 애써 "안 그래, 안 그래.."라며 수의사의 말을 부정한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인 [Old Partner]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보다 이 소가 나아."라고 말하는 할아버지에게 소는, 집에서 기르는 가축 이상의 소중한 식구이자 동반자이다.

소 또한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어 비쩍 마른 몸집에 한 걸음 한 걸음이 힘에 부치는 나이든 소는 그러나, 할아버지가 고삐를 잡고 밖에 나가려고 하면 묵묵히 달구지를 이끈다. 할아버지가 몸이 아파 읍내 병원에 갈 때에도, 가을에 추수한 무거운 쌀가마니들을 달구지에 싣고 팔러 나갈 때에도, 겨우내 때기 위해 베어낸 땔감을 한가득 싣고서도 소는 아무런 불평도 없이 주인을 위해 힘든 걸음걸음을 옮기며 묵묵히 달구지를 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만은 않아서 소를 팔기를 원하는 할머니의 고집과 명절에 시골집에 내려온 자식들의 강권으로 인해 할아버지는 결국 마지못해 소를 팔기로 하고 읍내의 소시장에 소를 데려간다. 수명이 다 된 늙은 소를 보며 "거저 줘도 안 가져간다.", "이런 소는 고깃값도 안 나온다."며 비웃는 사람들. 100만원이면 많이 주는 거라며 100만원에 소를 팔라는 사람들에게 500만원 이하로는 절대 소를 팔 수 없다고 완강하게 말하는 할아버지에게는 진작부터 소를 팔 마음은 없다. 결국 할아버지가 고집을 부린 500만원이라는 액수는 소를 팔기 위한 최소한의 금액이라기보다는 30년을 함께해 온 소에게 담긴 할아버지의 마음과 소를 향한 할아버지의 정이 담긴 끈끈한 그 무엇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시끌벅적한 소시장 한켠에 묶여있던 소의 커다란 눈에서는 눈물이 한 방울 흘러 내린다.

이렇듯 <워낭소리>에는 현대 사회에서는 거의 사라져 버린 농사꾼과 소의 끈끈한 교감, 인간과 동물의 순수한 정이 담겨있다. 그래서 감동적이고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프다. 영화를 본 누군가는 늙고 아픈 소에게 매일같이 무거운 달구지를 끌게 만드는 할아버지가 너무 심하다며 소가 불쌍하다고 말하지만, 현대적인 개념의 '동물 학대'라는 시각으로 쉽게 재단해버리기에는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 해 온 할아버지와 소의 시간이 너무도 깊고 넓다.

영화를 관람한 어느 배우의 말처럼, 아픈 몸을 이끌고 아픈 소를 부리며 밭에 나가서 일을 하는 할아버지와 소의 하루는,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죽지 않고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는 그런 시간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정해진 각본이나 설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상업 영화처럼 기-승-전-결이 뚜렷하지도 않은 다큐멘터리 독립 영화이다 보니 영화를 보는 사람에 따라서 '지루하고 밋밋하다'라는 평가를 내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부하고 통속적인 최루성 영화를 보며 쏟는 눈물 한 바가지보다 이 영화를 보며 떨구는 눈물 한 방울이 더 깊고 진하다.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감동보다, 한 마리 소가 인간에게 주는 감동이 더 깊고 진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영화는, 정해진 틀 속에서 무미건조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울림과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영화 자체의 오락성이나 상업적 재미를 떠나서, 따뜻한 심장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봐야 할 영화가 바로, <워낭소리>이다.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5-03 21:21)
* 관리사유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3/03/30 20:44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 이 영화 참 재밌게 봤는데,
문제는 추억에 잠겨서 영화관에서 중얼중얼 하시는 중년분들 때문에 참 힘들었었던 기억이 나네요. -_-;
어른들이라 한 마디 하기도 뭐하고, 한 마디 하자니 손 쓸수 없을만큼 많은 곳에서 중얼중얼 하셔서 ;;;
Eternity
13/04/01 08:33
수정 아이콘
사실 저희 어머니가 딱 그런 스타일이셔서 함께 영화관 갈때마다 제가 옆에서 노심초사하곤 하죠;;
마치 거실에서 드라마보시듯 영화를 보시더라구요ㅎㅎ
위원장
13/03/30 20:47
수정 아이콘
이 영화 붐이 일기 전에 독립영화 전용관에서 봤었는데 조조로 봐서 그런지 사람도 없어서 중간중간 지루한 부분에서 졸렸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기가막히게 할머니께서 웃겨주셔서 졸음을 떨쳐낸 기억이 있네요.
Eternity
13/04/01 08:34
수정 아이콘
저도 중간 중간 빵빵 터졌던 기억이 납니다ㅎㅎ
인위적이고 자극적인 코미디보다도 이런 웃음이 진짜 웃음이죠.
13/03/30 20:50
수정 아이콘
전 이런거 못보겠어요...왜죠??
동물 관련+ 슬픈 이야기 = 못보겠음 공식이 나오네요..

제목은 기억나지않지만 맞후임이 강력 추천한 '남극의 연구원들이 급하게 철수하느라 버리고 간 개들의 이야기'에 관련된 영화도

'그래서 그 개들이 죽어 안죽어?'로 시작해서 '몇마리는 죽어요...'라는말에 보질 못하겠고...

아무튼 동물이 죽는다는 것에 거부감이 크네요... 곤충은 아니니까 정확히는 표유류겠군요..
모데카이저
13/03/30 20:52
수정 아이콘
에이트 빌로우 말씀하시는건가 음...

참 재미있게 봤던 영화였는데...

오래전에 봐서 그런지 가물가물하네요.... 오랜만에 다시 봐야할듯
13/03/30 20:54
수정 아이콘
아 맞아요 그거네요!

그런데 개가 죽는다면서요..ㅠㅠ
Eternity
13/04/01 08:36
수정 아이콘
동물이 죽는 영화들이 슬프긴 하죠. 하지만 동물 영화에도 그 종류와 색깔이 천차만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눈물을 짜내기 위해 신파적으로 연출한 <각설탕>류의 영화보다는 <워낭소리>가 훨씬 더 슬프고 감동적이더라구요.
양지원
13/03/30 20:51
수정 아이콘
눈물을 억지로 참고 있다가, 끝날 때 잔뜩 쌓여있는 땔감을 보고 아주 그냥 펑펑 쏟아냈던 영화입니다.
Eternity
13/04/01 08:36
수정 아이콘
저도 댓글을 읽고 나니 그 땔감이 떠오르네요.
푸른봄
13/03/30 20:54
수정 아이콘
저도 이거 보고 정말 펑펑 울었던 기억이... 이 글만 봐도 다시 눈물이...ㅠㅠ
Eternity
13/04/01 08:37
수정 아이콘
저도 좀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운수좋은놈
13/03/31 01:04
수정 아이콘
저도 엄청 울었었던 기억이 나네요... 소도 그렇고 할아버지도 그렇고.. 마지막을 함께할때.. 참 슬펐습니다ㅠㅠ
Eternity
13/04/01 08:39
수정 아이콘
운수님 많이 우셨군요ㅎㅎ
<워낭소리> 다큐영화라서 나름의 담담함이 있는 영화였는데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슬프고 찡하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13/03/31 11:17
수정 아이콘
친구녀석이랑 맘먹고 울 요량으로 극장 맨 앞에 앉아서 봤는데, 친구는 화면이 이쁘다고만 하고 전 말 없이 아주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ㅠㅠ
Eternity
13/04/01 08:40
수정 아이콘
역시나 피지알에도 펑펑 우신 분들이 많으시군요.
유리별
13/03/31 14:18
수정 아이콘
아니 글만 봤는데 왜 저는 벌써 주룩주룩 울고 있는걸까요..
워낭소리보고 대성통곡을 하고 나왔던 뭔가 기억하고싶지 않은 것이 떠오르고 있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저도 슬프고 동물관련된 영화는 못보겠더라구요.. 진짜 마음이 너무 아파서..
하지만 망고를 좋아했던 멍뭉이 영화는 정말 재밌게 봤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노란응가...
Eternity
13/04/01 08:41
수정 아이콘
멍뭉이 영화는 뭘까요? 노란응가라..;
제가 동물 영화는 잘 몰라서 감이 오질 않네요ㅎㅎ
Lovephobia
13/03/31 17:49
수정 아이콘
무려 소개팅..에서 워낭소리를 보고... 아웃빽-_-을 갔던 이도 있습니다 크크.....
Eternity
13/04/01 08:41
수정 아이콘
헉.. <워낭소리>를 보고나서 스테이크를 써셨군요;;
GoodSpeed
13/05/07 22:46
수정 아이콘
제가 본 영화중에 제일 많이 울었던 영화입니다.

읍내 나가서 소자랑 하면서 웃으시는 할아버지 얼굴이 떠오르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2248 [LOL] Olympus LOL The Champions Spring 2주차 경기 보고서 [20] 노틸러스8312 13/04/14 8312
2247 [LOL] Olympus LOL The Champions Spring 1주차 경기 보고서 #2 [17] 노틸러스8012 13/04/09 8012
2246 [LOL] Olympus LOL The Champions Spring 1주차 경기 보고서 #1 [24] 노틸러스10498 13/04/08 10498
2244 지나치다. [99] 절름발이이리12072 13/04/06 12072
2243 그런데 소수는 정말 무한하긴 한걸까?...(내용 수정) [48] Neandertal11797 13/04/06 11797
2242 피지알의 수렴진화 [42] 골든리트리버9978 13/04/06 9978
2241 창조주의 암호는 풀릴 것인가? - 인류 최대의 수학 난제 리만 가설 [54] Neandertal19662 13/04/06 19662
2240 [역사]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여름에 얼음을 쓸 수 있었을까. [22] sungsik10848 13/04/05 10848
2239 [요리잡담] 제가 알고 있는 요리 팁, 노하우(?) 이야기. [75] 다시한번말해봐11240 13/04/04 11240
2238 영화 '지슬'과 제주 4.3 항쟁 [23] par333k6680 13/04/03 6680
2237 똥이야기 [26] 주본좌8862 13/04/03 8862
2236 [LOL] 늑대와 레이스로 인한 나비효과 [57] Leeka12761 13/04/08 12761
2235 망했다. [17] par333k8807 13/04/02 8807
2234 한국어 안의 한자어 이야기 [47] 안동섭9011 13/03/31 9011
2233 [LOL] 국내 LOL팀! 팀별 멤버변화 정리 (현존팀+사라진팀 전부) [34] LOO10053 13/04/01 10053
2232 소풍, 워낭소리, 한 친구에 대한 추억 [8] jerrys4795 13/03/31 4795
2230 [리뷰] 워낭소리(2008) - 팔순 노인과 마흔 살 소의 이야기 (스포있음) [21] Eternity7150 13/03/30 7150
2229 [LOL] 미드 카직스 공략 [20] 집정관9169 13/03/30 9169
2228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추게 글 모음. [78] OrBef18042 13/03/30 18042
2227 피지알은 생활이다. [33] '3'8081 13/03/28 8081
2226 커뮤니티와 친목질 [177] 절름발이이리16306 13/03/28 16306
2225 [리뷰] 조선탕수실록 - 그들은 왜 탕수육을 찍어먹을 수밖에 없었나 [24] Eternity12226 13/03/26 12226
2224 닭고기 탕수육을 만들어보자 [49] Toby9656 13/03/26 9656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