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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3/03/31 18:33:32
Name 안동섭
Subject 한국어 안의 한자어 이야기
예전부터 관련된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용기를 내어 써보게 되네요.

나름 한문 자료를 다루는 전공이다보니 공부하는 과정에 '아니 이것도 한자였어?"하는 경험이 참 많았습니다.

나름 유명한 것들 (심지어, 도저히 같은 것들)은 빼고 생각나는 것들 몇 개만 적어볼까 합니다.




1. 可

음과 뜻, 그리고 문법적 역할까지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입니다.

可히, 가당(可當)키나 한 일이냐, 가공(可恐)할 위력, 가소(可笑)로운 일

요즘은 可/不可 를 can/can't 정도로 구별하지만, 원래 한문에서는 능(能)자가 그 역할을 주로 맡구요, 可자는 '할 만 하다, 해봄직 하다' 정도의 뉘앙스를 같습니다. 논리적으로는 충분조건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가소로운 일이라고 하면 '한 번 웃어볼 만한 일. 웃음거리로 삼기에 충분한 일', 가공할 위력이라고 하면 '그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낄 만한 위력',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하면 '그게 네가 감당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정도가 되겠네요.



2. 지금(至今), 초가(草家), 역전(驛前)

모두 한자어로 출발하여 본래의 기능과는 다르게 쓰이는 낱말들이죠.

예컨대 오늘날 우리말에서는 "지금까지,", "지금은" 처럼 사용하지만, 본래 至今의 至자 자체가 "~까지"라는 뜻이죠.

그래서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된 옛 자료들을 보면 지금 뒤에는 토씨를 잘 안 붙입니다. "까지" 같은 것을 붙이면 중복이 되기 때문이죠.

또 "옛날엔 이랬는데 지금은 다르다"와 같은 표현은 안씁니다. 지금은 말 그대로 옛날 어느 시점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을 지시하는 시제 표현이기 때문이죠. 영어의 현재완료형과 비슷합니다.

초가나 역전 같은 경우는 국한문 혼용 시대 때는 "초가집", "역전앞" 같은 조어로 쓰이기 어려웠을 겁니다 (귀차니즘에 확인은 못해봤습니다.)

왜냐면, 家자나 前자의 표의성이 그대로 텍스트에 노출되므로 그 뒤에 집이나 앞 같은 중복표현을 붙이기 어색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요즘이야 뭐..^^;

참고로 저희가 어려서 교육받을 당시 "역전앞"을 대표적인 잘못된 표현이라고들 배우셨을 텐데요,

요즘은 또 반론이 만만치 않습니다.

하나의 언어현상이므로 인정해야 한다는 거죠.

한글전용의 여파로 해당 한자어가 그대로 노출시켜주던 단어의 의미가 사라지면서, 의사소통상의 불편함이 발생하고,

이를 피하기 위해, 즉 단어의 의미를 분명히 확정하여 전달하기 위해 '집', '앞' 같은 말을 덧붙이게 되었다는 거죠.



3. 之

아주 특이하게도 그 '뜻'이랄까요? 그 문법적 여파가 남아있는 경우입니다.

아마 우리말로 작문을 하시면서 '의'와 '에'가 은근히 헷갈리는 경우를 많이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이게 전부 之로 쓰이던 표현들이 우리말화 하면서 생긴 오해인데요

화중지병이 그림의(에) 떡으로,

당금지(當今之)~~ 가 오늘날의(에)로,

고금지(古今之)~~가 고금에(의)로,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요즘은 거의 "의"로 정리되고, 일부만 "에"로 남은 상황이지만 (예컨대, '고금의 현인군자', '고금에 제일가는')

과거에는 상당히 많이 혼용되었었죠.




4. 理

개인적으로는 이게 제일 놀라웠습니다.

성리학의 이기일원론이니 주리론이니 할 때의 理가 바로 이 理입니다.

우리말 어디에 남아있을까요?

남아있을 리가 없다구요?

그럴 理가요 흐흐.

고등학교 윤리교사들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암기만 강요하다보니

나라 사람들 중 理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남지 않았는데, 사실 알고보면 '겨우 그거였어?' 싶을 만큼 특별한 내용이 아닙니다.

'그럴 理 없다.'에서부터 출발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잡한 논의를 모두 쳐내고 간단히 설명하자면, 오늘날 '상식적인 것', '말이 되는 것', 또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 '그럴 리'입니다.

우리집 암소가 숫소랑 붙여준 적도 없는데 돌연 송아지를 낳았다고 하면 대개 웃으면서 '그럴 리가! 어디 수컷이 있었겠지^^" 라고 하죠.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면 理가 없는 겁니다. 理는 그러므로 가능한 것, 말이 되는 것, 납득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사물의 움직임에 관하여 말이 되는 것, 공히 적용 가능한 원리는 物理가 되고,

인체의 생래적 운용에 관하여 말이 되는 것, 상식적인 지식은 生理가 됩니다.

신이 세계를 질서있게 운용하는 영원불변한 법칙은 보통 섭리(攝理)라고 합니다.

이런 온갖 종류의 理를 파악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혹은 그 기능을 담당하는 organ을) 理性이라고 합니다.

실제 사물이나 사회의 작동과 대조하여, 순수히 탁상에서 머리와 말로만 진행하는 논의를 理論이라고 하죠. 실제가 아닌, 그 이치만을 논한다는 의미로요.

성리학자들은 이 세상의 이 모든 理들을 결국 한 마디로 환원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해와 달이 뜨고 지는 물리도,

인간의 신체가 살고 죽는 생리도,

국가와 사회가 흥하고 망하는 理유도 모두 결국 한 마디로 통섭할 수 있다는 거죠.

바로 '사랑(仁)'입니다.

세상이 사 계절로 운행하는 것도 사실은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의 힘이 그 뿌리가 된다고 합니다. 소생의 봄기운은 다름아닌 사랑이죠.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음양의 운동 역시 음과 양이 서로를 추구하며 반복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반복의 율동을 통해 만물이 탄생하므로 이것 역시 사랑입니다.

인간 역시 만물의 하나이므로, 이 사랑의 이치가 마음 속에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 = 理이다, 성즉리(性卽理)라는 명제가 성립합니다.

따라서 "성즉리"란, 우리 모두가 사랑의 마음을 타고난다는 모토로, 성선설에 대한 세련된 철학적 해명입니다.

인간이 인간인 이상 서로 사랑해야 마땅하다는 것, 그것은 암소가 숫소 없이 송아지를 낳았을 리가 없다는 것만큼 자명한 이치라는 겁니다.




----------------

아이고, 글이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지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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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lousy
13/03/31 18:37
수정 아이콘
리가 한자였군요..
jjohny=Kuma
13/03/31 18:45
수정 아이콘
이런 맥락에서 전에 혼자 생각했던 것 한 가지 여쭙습니다.
'내가 너 따위한테 질쏘(소)냐!' 할 때의 '소'가 혹시 所(바 소)에서 온 것은 아닌가요?
안동섭
13/03/31 19:59
수정 아이콘
앗...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한 번 알아봐야 겠어요.
키스도사
13/03/31 19:01
수정 아이콘
다른 이야기긴 한데 부여,고구려 왕족의 성씨이자 태양을 뜻하는 해(解/풀 해)가

현재의 태양을 뜻하는 우리말 해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신선하더라구요.
jjohny=Kuma
13/03/31 19:03
수정 아이콘
'해모수'의 성씨인 해 말씀이신가보네요.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헤헤
13/03/31 19:16
수정 아이콘
한자 관련 제 경험으로, 흔히 쓰는 통신(通信, communication)이란 말을 보면서 도대체 무엇을 믿으란 말인가 고민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信에 믿다 뿐이 아니라 편지, 서신, 정보라는 뜻도 저 밑에 있더군요. 그제서야 국사 시간에서 들었던 통신사가 그런 의미였구나 싶었습니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요새 쓰는 통신과 묘하게 어울리니 이 또한 말의 묘미가 아닌가 합니다. 글과 말도 그 느낌이 조금 다른 것 같고요.

그리고 글을 읽자마자 PoeticWolf님 글이 떠올랐습니다. 한자는 내적입니다.
https://cdn.pgr21.com./?b=1&n=1529
안동섭
13/03/31 20:02
수정 아이콘
좋은 링크 감사합니다.
통신의 信과 서신의 信이 같은 글자라는걸 저도 처음엔 몰랐었어요;
13/03/31 19:36
수정 아이콘
'그럴리'의 리자가 한자였다니...헐(狘)...
구밀복검
13/03/31 19:46
수정 아이콘
딴소리를 좀 하자면 저는 역전앞이라고 - 정말 많은 예시에 등장하지만 - 말하는 화자를 아직 만난 적이 없습니다. 역 앞, 역 안이라고는 많이 하지만..
그래서 순수하게 예시로만 접한 사례.
아케르나르
13/03/31 20:09
수정 아이콘
그러게요. 보통은 ~역 혹은 ~역 근처서 보자..라고 하지 ~역전에서 보자 고는 안하는 거 같네요. 역전 이라는 말도 사어가 되어가는 걸까요?
13/03/31 20:37
수정 아이콘
이게 왜인지 모르겠는데 코레일 역들앞에서 만날때만 그런 단어를 들었습니다. 서울역 대전역 등등에만 '역전'이란 말이 일종의 고유명사화 한것은 아닐까 생각도 드네요
13/03/31 20:41
수정 아이콘
근데 생각해보니 대전엔 지하철이 없었구나...시골에서만 썼나봅니다;
13/03/31 20:45
수정 아이콘
전 역전앞 많이 들어봤네요. 윗분 말씀대로 예전부터 있던 큰 기차역과는 자주 사용하는 것 같아요.
ChojjAReacH
13/03/31 21:29
수정 아이콘
그리고 나이가 어느정도 있으시면 예전 습관이 남아있어서 역전앞이라고 자주 말하십니다.
13/05/07 14:51
수정 아이콘
저는 평생 살면서
한달 전 쯤에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역전앞이 어디유 총각?'
하고 말씀하실 때
평생 살면서 역전 앞이라는 단어 처음 들어봤네요..
13/05/07 22:33
수정 아이콘
나이좀 있는 택시기사분들이 많이 쓰시더라구요.
큐리스
13/03/31 20:14
수정 아이콘
'일리가 있다'라는 말도 '一理'라고 쓰죠.
아마 '一二'라고 생각하신 분도 있을 것이라고... @_@;;
밀가리
13/03/31 20:42
수정 아이콘
중국어를 전공하시거나 공부하시는 분들은 본문만큼 재미있는 한국어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한자를 알다보면 한국어 실력도 늘게되죠!

재미있는 사실은, 근대 이후에 생긴 단어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빌려온 한자어들이고, 반대는 중국에서 들어온 한자들이지요. 그 중에 근대에 생긴 한자어 중에서는 일본식 한자를 중국에서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양에서 들어온 이론들을 일본에서 번역을 시작했거든요. 우리가 쉽게 말하는 '문화','사회' 이런 단어들은 일본어에서 왔죠.

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부동층' 뜻에 대해서 헷갈리는데
不動層이 아니라 浮動層입니다. 浮는 '뜰 부' 짜로 부유물(물위에 떠다니는 물건) 할 때 쓰는 단어죠. 그러니까 부동층이라는 한자어의 의미를 보면 '움직이지 않는 층' 이 아니라 '떠다니며 움직이는 층'이라는 거죠. 하지만 이 단어의 유래는 엉어 "floats"입니다. 따지고보면 영어단어를 그대로 한자어로 옮긴 것이죠~
안동섭
13/03/31 21:06
수정 아이콘
헐, 처음알았네요;;
상큼비타C
13/03/31 20:55
수정 아이콘
죄송한데 한자 뒤에 괄호 안에 한글로 음을 달아주시면 안될까요?
까막눈이라 읽는데 어려움이 있네요.
Locked_In
13/03/31 23:36
수정 아이콘
죄송한데 한자 뒤에 괄호 안에 한글로 음을 달아주시면 안될까요? (2)
대충은 읽히는데... 글에다 미리 써주시면 검색해보는 수고를 덜 수 있을것 같아요.
요즘은 한자보다는 영어, 영어 하다보니 저같이 한자에 까막눈이신 분들이 많은것 같더군요.
안동섭
13/04/01 09:22
수정 아이콘
수정했습니다!
서린언니
13/03/31 20:57
수정 아이콘
신중한 검토를 要(요)합니다.

같은건가요?
ChojjAReacH
13/03/31 21:24
수정 아이콘
요는 요구라는 의미에서 줄여서 쓰는게 아닌가요..?
밀가리
13/03/31 22:22
수정 아이콘
맞습니다. 필요(必要)합니다. 할 때도 要 맞습니다. 요구,요청 할 때도 쓰이죠.
몽키.D.루피
13/03/31 21:08
수정 아이콘
유익한 글이네요~
ChojjAReacH
13/03/31 21:25
수정 아이콘
아 이렇게 설명해주셨지만 도저히 모르겠네요.
네 도저히요..
到底히...
13/03/31 21:28
수정 아이콘
전 여친이 한자 너무 모른다고 천자문 책 사줘도 결국 한자에 흥미는 못 붙였는데, 이 글은 되게 재미있게 봤습니다. 또 쓰신다면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13/03/31 21:47
수정 아이콘
어차피(於此彼), 심지어(甚至於), 별안간(瞥眼間) 같이 한자어구가 그대로 단어처럼 쓰이는 예도 많죠.
밀가리
13/03/31 22:24
수정 아이콘
漸漸(점점)도 한자어죠.
早晩間(조만간)은 낮과 밤 사이를 뜻하는 한자어인데, 뜻은 '곧'이라는 뜻이죠.
너구리구너
13/04/01 00:06
수정 아이콘
早晩間은 낮과 밤사이라기보다 일찍하거나 늦거나 라는 뜻이죠. 영어의 sooner or later와 일치하죠.
유리별
13/04/01 08:53
수정 아이콘
도대체(都大體)랑 도저히(到底-)도 한자어구요.
은하관제
13/03/31 22:03
수정 아이콘
다들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어렸을 적 한자를 배웟을 때 안녕하세요가 한자인걸 알고 놀랬었던 기억이 남아있네요.
안녕(安寧)하세요인 걸 알고 참 한자는 우리나라 말에서 정말 많이 쓰인다는 걸 느꼈었드래죠.
알파스
13/03/31 22:10
수정 아이콘
정말 유익한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13/04/01 05:41
수정 아이콘
이야 재미있었습니다!
13/04/01 07:49
수정 아이콘
헐.......
헐...........
이가 한자였군요.
플러스 헐.. 도 한자입니다.
유리별
13/04/01 08:52
수정 아이콘
그런거 있죠, 중학교때 N..N.....여튼 신문을 활용해서 수업하는게 한창 유행이었는데,
그때 신문 칼럼하나를 잘라서 거기에 쓰인 한자어를 모두 조사하는 숙제를 하다가 멘붕당한 적이 있어서...
지금 제가 쓰고있는 이 문장에도 한자어가 얼마나 많은지.. 에효. 생각해보고 싶지 않습니다.

3번의 '의'와 '에'가 헷갈리는 것은.. 제 약하디 약한 지식으로는.. 아마도 발음의 영향도 상당하지 않을까 싶어요.
조사 '의'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이중발음인 [의]로 읽는 것이 맞는데, 표준 발음법에 의하면 조사 '의'는 [에]로 발음하는 것도 허용하고 있거든요.
또 단어의 첫 음절 이외의 '의'는 [이]로도 발음할 수 있구요.
그래서 '민주주의의 의의'와 같은 단어는 원칙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의의]라고 발음하셔야 하지만, [민주주의에 의이]라고도 발음하실 수 있어요.
또 '주의'도 [주이]가 가능하고 '우리의'도 [우리에] 라고 발음하는게 허용되는 거죠.
그래서 혼동하시는 분들도 많으실 거라 생각해봅니다.^^
좋은 글 감사드려요.
안동섭
13/04/01 09:19
수정 아이콘
몰랐던 내용 하나 알고 갑니다^^
13/04/01 09:44
수정 아이콘
N...NIE?
유리별
13/04/01 11:57
수정 아이콘
아.. 네 그거에요. NIE. 창의적인게 유행하던 시기였는데 정말 저는 너무 싫었어요....
쑥호랑이
13/04/01 10:54
수정 아이콘
위에 일본식 조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이야기 꺼내보는데, 사실 물리(物理), 화학(化學)과 같은 단어들을 일본인들이 당시 번역하면서, 어떤 정신구조로 번역했는지를 살펴보면 꽤 재미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한학을 공부하신 분이라면 이 단어들이 이렇게 번역된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죠. 당시 일본에서도 지배적인 사상은 성리학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양명학의 영향도 있었겠습니다만, 도쿠가와 막부를 지탱한 관학은 성리학을 그 기조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물리, 화학만 가지고 말하자면 물리는 쉽게 보입니다. 사물의 이치, 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사물이 우리가 쓰는 사물이 아니라 성리학적 '물' 개념이고, 리 역시 성리학적 리에 가까운 것이죠. 그런데 화학은 왜 '화' 일까요? 우리가 쓰는 말 중에 '변화' 라는 말이 있습니다. 변화는 물상이 '변' 하고, '화' 하는 개념을 하나의 단어로 만든 것입니다. 주역사상을 통해 살펴보자면, 변은 말하자면 물체의 속성이 달라지지 않고 유지된 상태로 '변'한 것입니다. 너 변했다, 라고 하면 너라는 사람의 개념은 그대로인데 그 속에서 무언가 달라진 점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예를 들어 나이를 먹는 것이 변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대로 사람인데, 어린 사람이 늙은 사람이 된 것이 변입니다. 반대로 화는 속성 자체가 바뀔 때 화라고 합니다. 사람이 죽어 흙이 되면 그것은 '화' 입니다. 사람이라는 개념이 죽었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개념에서 보자면 물이 끓어 수증기가 되면 그것은 물이라는 속성이 유지된 채임을 알 수 있지만, 고전적 개념에서라면 그것도 '화' 일 겁니다. (어찌보면 고전적 개념을 따오지 않아도 '화'일 수도 있죠. 액체와 기체라는 속성 자체가 변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죠.) 액체가 기체가 되는 것은 그래서 '기화'라고 합니다. 보자면, 당시 그들이 접했던 화학은, 이렇게 물성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화' 하는지를 탐구하는 학문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화학은 변학도, 변화학도 아닌 화학이 되었습니다. 이 당시 일본인들은 당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서양의 학문을 번역했고, 그 결과가 우리가 쓰는 조어들인 것입니다. 굉장한 노력이 담긴 번역이었죠.
안동섭
13/04/01 12:02
수정 아이콘
공감합니다.

좋은 댓글 고맙습니다 :)
The finnn
13/04/01 17:16
수정 아이콘
섭씨 화씨 할 때 씨가 Celsius씨와 Fahrenheit씨 에서 따온, 김씨 최씨 할 때 氏(씨)라는 걸 얼마전에 알았습니다.
jagddoga
13/05/07 14:36
수정 아이콘
한국에서는 거의 섭씨만 쓰니 섭씨의 씨가 ℃ 의 C로 헷갈릴 수 있겠더라구요
도시의미학
13/05/07 11:39
수정 아이콘
와 이런 재밌는 글을..;; 왜 당시에는 못보고 추게에 오고 나서야 읽었는지.
재밌네요.
Granularity
13/05/07 17:35
수정 아이콘
우와 PGR 짱짱싸이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13/05/07 20:57
수정 아이콘
와 이런 재밌는 글을..;; 왜 당시에는 못보고 추게에 오고 나서야 읽었는지.(2)

댓글에 나왔던 역전앞과 같은 중복된 표현 (한자 + 우리말)중 자주 들을 수 있는 사례 몇개 더 들어보면,

o외가집-처가집-종가집-양옥집, 약수물, 라인선(요건 특이하게 영어+한자네요.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 체육선생님이 자주 썼던 표현입니다.), 목숨을 건 죽음의 사투.
o김장을 담근다, 빨래를 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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