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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10/16 14:35:12
Name 글곰
Subject [일반] 불륜이 향하는 끝, 메리가 셸리를 만났을 때 (수정됨)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1792년에 영국에서 태어나 1822년에 죽었으니 미처 30년도 되지 않은 짧은 인생이었지요. 그러나 그 짧은 생애 동안 써낸 시로 그는 조지 고든 바이런, 존 키츠와 함께 영국 낭만주의 시인의 정점에 올랐습니다.

  어려서부터 영민한 영재였던 그는 이튼 스쿨을 졸업하고 옥스퍼드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을 주장한 책자를 배포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지요. 무신론이 죄로 여기지던 시대였으니까요.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그가 선택한 길은 결혼이었습니다.(응?) 그 상대는 열여섯 살 된 소녀 해리엇 웨스트브룩이었지요.(응??) 두 사람은 슬하에 두 남매를 두게 됩니다.

  당시 윌리엄 고드윈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무정부주의의 효시로 여겨질 정도의 자유주의자였습니다. 이상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던 퍼시 셸리는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아 마치 스승처럼 모셨습니다. 그런데 윌리엄 고드윈의 딸, 문학소녀인 메리 고드윈이 이 젊은 시인에게 반해버리고 말았지 뭡니까. 자유주의 성향이 강했던 아버지는 그런 딸을 딱히 제지하지 않았고, 똑같은 성향이었던 제자는 자신을 좋아하는 여성을 거절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1813년 무렵, 16세의 소녀와 21세의 유부남은 서로 불륜관계에 빠지게 됩니다.

  두 사람은 유럽 대륙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아내와 자식을 버린 젊은 시인이 어린 애인과 함께 떠난 도피성 여행이었습니다. 몇 차례에 걸쳐 프랑스와 스위스 등 명소를 돌아다녔습니다. 동시대의 시인 바이런과의 만남도 이 시기의 일입니다. 재미있었을까요? 아마도요. 행복했을까요? 그랬을 겁니다. 그러나 퍼시 셸리에게 버림받은 아내 해리엇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상심한 그녀는 자식들을 남겨둔 채 투신 자살합니다. 불과 스물 한 살이었죠.

  아내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퍼시 셸리는 1816년에 영국으로 돌아왔지요. 그리고 마침내 원하던 바를 성취합니다. 메리 고드윈과의 결혼이었습니다.

  당대에 이미 명성 높은 시인이었던 퍼시와 문학소녀였던 메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뮤즈가 된 듯 깊은 문학적 영감을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년 후, 결혼으로 인해 이름을 메리 셸리로 바꾸게 된 그녀는 익명으로 소설 한 권을 내놓습니다. 제목이 다소 길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 책을 이렇게 줄여서 부릅니다. '프랑켄슈타인'이라고요. 한편 같은 해에 퍼시 셀리는 일생일대의 업적이 된 소네트(정형시의 종류 중 하나) 한 편을 씁니다.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의 거상(巨像)을 소재로 삼은 그 시의 제목은 '오지만디아스'였습니다.

  퍼시 셸리의 삶은 그다지 길지 못했습니다. 1822년. 그는 이탈리아에서 요트를 타던 도중 물에 빠져 실종됩니다. 메리 셸리는 그로부터 29년을 더 살았지만 결국 프랑켄슈타인을 뛰어넘는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어쩌면 퍼시 셸리의 죽음과 함께 그녀의 뮤즈 또한 사라졌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퍼시와 메리의 만남은 두 사람 모두에게 참으로 좋은 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고, 동시에 서로가 문학적인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서로를 지원했습니다. 말하자면 천생연분이자 찰떡궁합인 셈이었죠. 문학가로서 퍼시 셸리와 메리 셸리의 명성은 그 작품과 함께 결국 이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히 살아남아 있습니다.

  반면 해리엇 웨스트브룩, 퍼시의 아내이자 퍼시와 메리가 벌인 뜨거운 불륜으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받아야 했던 희생자인 그녀는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퍼시 셸리의 불운했던 전처로서 기록에 남아 있을 따름이지요. 그녀가 사망한 후, 아들 또한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매우 씁쓸한 결말이지요.

  그런 뒷이야기가 '오지만디아스'나 '프랑켄슈타인'의 작품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지는 않습니다. 송강 정철은 글러먹은 인간이지만 사미인곡은 빼어난 작품이고, 서정주가 아주 형편없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시는 여전히 위대한 것처럼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어떤 껄끄러운 감각 같은 게 자리잡고 있어요. '야, 이건 좀 그렇지 않냐' 싶은 거죠. 해리엇의 불행이 있었기에 비로소 셸리와 메리의 행복이 가능했던 것이라면, 거기에는 그 어떤 정의도 미덕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니 말입니다.

  이 글에 결론 같은 건 없습니다. 다만 퍼시 셸리의 걸작, '오지만디아스'의 뒷부분을 인용하는 걸로 적절한 마무리가 될 것 같네요.  



  ...
  그리고 길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네.
  "내 이름은 오지만디아스, 왕들 중의 왕이로다.
  나의 업적을 보라, 강대한 자들이여, 그리고 절망하라!"
  아무것도 없었다네. 그 거대한 잔해 주위로
  끝없는 황량함이 감돌고
  외로운 모래의 지평선만 멀리까지 뻗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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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아이
18/10/16 14:47
수정 아이콘
자유주의고 뭐고 합의하에 결혼을 하면 뭔상관이겠습니까만, 엄연히 동의하지 않고 엮인 피해자가 있는데 자유로운 영혼인 척 하는 것들은 진짜 혼나야돼요. 결혼 다 해놓고나서 자기는 구속 받는 거 싫다는 둥 자유롭게 살거라는둥 친구가 너보다 소중하다는 둥 떠들어대는 사람이 남녀를 떠나 생각보다 자주 볼 수 있는 인간들이더라고요.

그리고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인데 저런 사람들 작품은 거부감이 들더라고요. 같은 맥락에서 서정주는 진짜 악마의 재능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가 훌륭하다고 생각은 하는데 읽으면 거부감이 들더라고요. 아마 제가 문학을 해석할때 작품은 작가의 영혼이라는 관점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생각안나
18/10/16 17:25
수정 아이콘
저는 그래서 서정주의 시를 읽을 때 더 신묘한 기분이 듭니다. 한 인간의 자기모순, 그런 모순의 자기긍정 뭐 그런 솔직함이 느껴진달까요. 어떤 의미로는 진정 진실하게 느껴집니다. 작품이 작가의 영혼이긴 하겠지만 깨끗한 영혼이라야 좋은 평가를 받는 건 아니겠죠. 윤동주 부끄러움의 발견자 마광수가 윤동주를 높이 평가했던 건 윤동주가 깨끗하고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솔직하게 부조리한 자기 내면 들여다봤다는 데에 있을 겁니다. 단지 윤동주는 거기서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선호되는 거겠고 서정주는 자기 긍정 같은 걸 해버리는 바람에 위화감이 뒤따르는 것이겠죠. 저는 서정주의 시를, 아니 그의 영혼을 들여다보면서 그런 위화감을 느끼는 것도 문학적으로 중요한 감수성이라고 봅니다. 문학은 불온하다고 하니까요. 문학의 불온함이야 김수영의 말이지만, 이를 체제 저항적인 의미로만 수용하는 게 외려 기만적 태도라 봅니다.
착한아이
18/10/16 17:30
수정 아이콘
저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작품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용의도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안나님께서 말씀하신 감상의 방향성과 그러함으로서 작품을 즐기시는 것이 틀린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작품 해석에 대한 관점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18/10/16 17:39
수정 아이콘
저는 고등학교 시절에 자화상을 처음 읽었을 때, 서정주가 말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쓴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새파랗게 젊었던 시절에 쓴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좀 더 이후의 일이었지요. 그런데 그 전후에 따라 이 시를 받아들이는 저의 관점이 상당히 달라지더라고요.

결국 그는 자신의 말을 지켰죠. 끝내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으며 영욕으로 점철된 삶을 마무리했으니까요. 그런 그의 선택이, 제가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시어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어떤 미묘한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것 같은 감각을 저는 느낍니다. 어쩌면 생각안나 님의 느낌과도 비슷한 면이 있지 않을까요.
생각안나
18/10/17 00:27
수정 아이콘
(수정됨) 네 저는 위화감이라 표현했고 글곰님은 어떤 미묘한 화학작용이라 표현한 것이 저도 서로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떤 종류의 예술 엔터테인먼트는 즐거움이라고 하는 문자그대로의 감정적 충족이 아니라 외려 한편으로는 불쾌하고 한편으로는 혐오스럽고 그래서 기본적으로 매우 불편한 종류의 오락성을 제공해준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떻게 보면 지적 허영 같은 거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보다는 훨씬 원초적인 것이랄까요.

음... 한 마디로 표현해보자면 이쪽 업계에서는 포상입니다 같은 것? 위험하고 치명적인 것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이 아닐까 싶네요.
18/10/16 15:22
수정 아이콘
배우자가 있는 상태에서의 불륜은 나쁜게 맞는데..
그러면 전처와 이혼하고 연애하고 여행다녔으면 괜찮은 걸까요?
아니면 전처와 열렬히 사랑하고 동거했는데 혼인신고만 안한상태였다면 괜찮았을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현명하지 못한 결혼 생활 2년은 남은 인생을 모두 저당잡는 행위가 되는건가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18/10/17 10:13
수정 아이콘
결혼만 했으면 그-나마 모르겠는데
아이를 낳았다면 남은 인생은 모두 저당잡혀야죠. 그럴거면 애를 낳질 말던가.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18/10/17 12:23
수정 아이콘
아이에겐 저당잡히는 게 맞고, 저같아도 왠만하면 계속 가정을 유지할 것 같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그렇게 하라고는 못하겠네요..
애초에 다른 여자한테 틈을 주면 안되는 건데 말이죠.
지금만나러갑니다
18/10/16 15:44
수정 아이콘
좋은 글입니다.
이런 글 하나를 읽기위해 수십개의 눈살 찌푸려지는 글을 읽고있습니다만, 이정도면 만족스럽습니다.
18/10/16 15:51
수정 아이콘
(수정됨) 갑자기 영화 프로메테우스가 생각나는데...

일단 넘어가기로 하고요...


만약 제가 아무생각 없이 싼 똥이 전 세계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높은 가격이 메겨지고 누구나 보고싶어하고 누구나 가치있어하고 누구나 가지고 싶어한다면...심지어 제가 싸는 똥마다 그렇다면 어떨까요?크크

제가 별생각 없이 싼 똥이 인류에게는 위대한 예술...
18/10/16 16:08
수정 아이콘
여담이지만 프랑켄슈타인의 원제는 [프랑켄슈타인 : 혹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입니다.
데오늬
18/10/16 16:47
수정 아이콘
가끔 인간의 예술적 재능과 사회적 도덕성은 반비례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다리기
18/10/16 16:59
수정 아이콘
그런 예술가를 심심찮게 봐서 그런가 봅니다.
사실은 사회적 도덕이란 틀 안에서 예술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18/10/16 17:16
수정 아이콘
뭔가가 있다면 뭔가가 없는듯한... 자주 보게되죠..
폰독수리
18/10/16 17:27
수정 아이콘
참 별로죠
음냐리
18/10/16 18:51
수정 아이콘
저 개인적으로는 결혼이라는 제도는 정말 인류문화에서 최악의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유지의 목적을 위해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고 제한하거든요. 사실 자식만 없으면 결혼이라는 제도는 진작에 파탄났을껍니다.
모리건 앤슬랜드
18/10/16 19:26
수정 아이콘
불만있는 사람이 최대한 적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간 일종의 사회적 계약이면서 가문대 가문 수십 수백명의 사람들이 증인이 되는 앞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합의에 가깝죠. 내 자유를 제한할테니 너희의 자유도 제한하자 우리 모두의 자유도 제한하자. 그렇게 다른 방법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전정보를 후대에 전달할 수 있고 그 합의가 이행된다는 전제만 있다면야 남자입장에서는 확신없음에 따라오는 불안감에 떨 필요도 없죠. 그래도 이걸 최소 수천년 최대 만년단위가 넘어가도록 해왔으니 그 본성도 사실 이전에 비하면 많이 죽은 본성일겁니다.
음냐리
18/10/16 20:19
수정 아이콘
근데 요즘에는 별로 맞는게 아닌거 같아요. 인류가 탄생한 300만년 전부터 바로전 300년 이전까지보다, 요근래 300년이 인류역사적으로 더 많이 변화된것처럼 이제는 가치관도 변화될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국가적으로는 필요한데 현대사회와 같이 개인의 자유가 중요해지고 놀이문화가 발전하고 굳이 유전정보를 전달할 필요성을 못느끼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때에 말이죠.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죽었다고는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냥 억눌려져 있을뿐. 제약이 없어진다면 원래의 본성을 찾지 않을까요? 물론 사회를 혼란시키는 방향이 아닌, 개개인에게 위해가 가지 않는 방향으로의 도덕적인 교육은 이미 되어있다는 과정하라면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반다비07
18/10/16 19:43
수정 아이콘
저번주 서프라이즈에 나왔었는데 정확히는 이런 내용이었네요
킬고어
18/10/16 23:3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에일리언: 커버넌트에서 저 시를 바이런이 썼다고 생각하는 데이비드에게 셀리의 시라고 정정해주는 월터의 모습이, 돌연변이와 창조성에 대한 메타포로 등장하죠.

카라얀을 들을 대마다 저도 비슷한 감정을 느껴요. 어떤 레퍼토리들에서는 정말 마술적인 솜씨들을 발휘하거든요. 하지만 의도적으로 피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감상의 맥락에서 느끼는 불편함이나 혹은 혐오감에도 불구하고, 그 테크닉이나 예술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기만에 빠지는 것이겠죠. 이것들 흔들림없이 감상하고 평가하는 것은 참 어려운 기술입니다.
-안군-
18/10/17 14:15
수정 아이콘
오지만디아스... 하니까 제일 먼저 생각나는게 와치맨이면 막장인가요?? 제 문학적 소양이 이렇게 미천합니다. 흑흑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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