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체 양해 부탁드릴게요^^; 지난번에 영창썰 재미있게 읽어주신분들 계신거 같아서 또 군대썰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크크. 혹시 안보신 분은 순서대로 읽으면 더 재밌을 거 같아요
https://cdn.pgr21.com./?b=8&n=77526 내 인생에서 진짜 특이하다고 할만한 사람 7~8할을 군대에서 만났으니 꽤나 신기하고 다이나믹했던 군생활이었던거 같아. 제목을 약간 자극적으로 뽑아 봤는데, 이야기의 호흡을 위해 다소 축약하거나 과장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실제 겪은일을 바탕으로 쓰는 글이라는걸 알아 줬으면 좋겠어. 이거 소설이죠? 하고 물어도 증명할 방법은 없어ㅠ 왜 그런 사건이 발생했는지 말하려면 내부 사정에 대해 몇가지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래서 기억에 남는 신기한 에피소드 몇개로 부대 특유의 분위기가 전달 될 때쯤 본편 이야기로 들어갈게. 명탐정 코난처럼 개별 에피소드와 검은 조직이 등장하는 메인 스토리가 교차되는 형식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 두서없이 시작해볼게.
나는 정상과학을 신봉하고 귀신을 한번도 본 적이 없으며 점을 보러 다니는 엄마를 앉혀 놓고 훈계를 하는 평범하고 이성적인 대한민국 남자 사람이야. 군대에 가기 전까지는 무슨무슨 증후군이라고 하는 그런 종류의 정신병 같은 것을 거의 믿지 않았어. 아예 정상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침 질질 흘리고 이런 중증 환자분들 말고 겉보기엔 멀쩡한데 대인공포증이라거나 무슨 불안장애라고 군대 면제받고 이런 사람들 말야. 그런건 비난을 회피하기 위해 적당히 꾸며된 변명이라고만 생각을 했어. 처음 자대에 전입와서 R상병을 만나고 이 세상에 내가 알지 못했던 기묘한 병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거 같아.
R상병이라고 부르지 않고 익숙하게 '삼류'라는 별명으로 부를게. 관등성명을 어찌나 맥아리가 없이 댔는지 '상병 류XX'라는 소리가 항상 '삼류'까지만 들렸거든. 관등성명을 성의 없이 댄다고 고참들한테 많이 맞았는데 그래도 안고쳐지더라고. 고참들도 나중엔 포기했는지 '야 삼류야' 그냥 이렇게 불렀어. 사람은 이름따라 간다고 하더니, 하는 일도 그렇고 부대 내 위상도 딱 3류 그 자체였어. 내가 헌병대에 왔을 당시 헌병 근무자로서 근무도 못나가고 테니스장이나 막사 뒷편의 텃밭 같은 것들을 전담해서 관리하고 있었거든. 삼류가 기억에 남는건 내가 부대와서 가장 처음으로 친해졌던 고참이기 때문이야. 저번 영창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C일병은 근무를 같이 나가면서 가까워졌고 삼류는 노란 견장을 달고 근무도 나가기 전에 작업을 같이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
삼류는 살벌한 부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권위의식이란게 아예 없어서 빨리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 서로 물고 뜯는 육식 동물들 사이에서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는 어류 같은 느낌이 들었어. 부대 내에서 벌어지는 일 따위 나랑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현실에 초월해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거든. 짬이 상병쯤 되었는데 군대 말투가 입에 붙지 않는지 여전히 사회의 냄새가 베어 있더라고. 가끔 '요'자를 섞어 쓰기도 하고 "형이 사회에 있었을땐 말야...." 이런식의 화법을 많이 썼어.
지독한 폭력이 일상인 이 부대에서 삼류는 동네 형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았어. 신병 대기기간이 지나고 근무를 나가기 시작 했을 때도 내무실에 있기가 무서워서 삼류가 작업하는 곳에 같이 데려가 달라고 금방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눈빛으로 매달리곤 했거든.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를 폭탄 때문에 불안에 떨고 있느니 삼류랑 작업을 하는게 훨씬 속 편하고 재미있었으니까. 삼류도 내가 만만했던지 근무가 없는 날에는 종종 나를 끌고가 주어서 기뻤어.
"R상병님, 오늘 작업 끝나고 PX 한번 데려가 주시면 안됨까?"
"개새끼가 졸라 빠져가지고. 점호시간에 스타 되고 싶냐?"
"죄, 죄송함다;;"
"크크크, 쫄긴 새끼. 8시쯤 연병장 화장실로 내려와."
한달 정도 지나고, 이정도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 사이가 되었어. 우리 부대에는 한평 될까 말까하는 PX가 있었는데 워낙 좁고 물량도 적다보니 병장 밑으로는 PX를 이용할 수 없다는 관습법이 있었어. 삼류는 PX 관리병이니 그런 부분에서는 완전 프리였지. PX문 닫을때 오예스 같은거 몇개 챙겨와서 연병장에 있는 구식 화장실에서 먹여주곤 했어.
근무를 나가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성향의 고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우리 부대에 관해 온갖 종류의 드러나지 않은 사실들에 대해 들을 수 있었어. 나는 무엇보다도 삼류가 왜 사람 취급을 못받고 근무에서도 제외되었는지 그게 궁금했어. 특이한 사람은 분명했지만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거든. 어느날 근무중에 약간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싶었을 때 C일병에게 삼류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슬쩍 궁금증을 던져 봤거든.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질문에 대한 답은 없고 나에게 조심하라고 이야기를 하는거야. 이 좁은 부대에서 삼류 작업하는데 너 매번 알짱거리는거 모르는 사람 없다고. 어디서 어떻게 소문이 난건지 내가 연병장 화장실에서 몰래 뭐 받아먹은 것까지 다 알고 있더라고.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져서 당분간은 내무실 생활에 충실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오전 근무가 없어서 루틴대로 내무실 청소를 하고 있던 어느날이었어. 그날 아침 휴가자가 2명 있어서 내무실 분위기가 어수선 했는데 갑자기 1내무실에 집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어. 청소를 그만두고 1내무실에 들어갔더니 한쪽 침상에 근무 아닌 사람 전원이 열을 맞춰 앉아 있고 반대편에는 휴가자 2명이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어. 무슨일인지 전혀 짐작 할 수 없었지만 뺨이 따끔따끔 할 정도로 공기가 날카로워져 있어서 분명 대형 사고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어. K병장이 무거운 침묵을 깨트리고 입을 열었어.
"야, 좀 전에 M 관물대 앞에 있는 지갑에서 돈 5만원 훔쳐간 새끼 누구야? 빨리 자수해 개새끼야 죽여버리기 전에. 누구 본사람 없어?"
휴가 출발하기 전에 담배를 피고 온 그 잠깐 사이, M상병의 지갑에서 누군가 돈을 꺼내 갔던거야. M상병은 키가 187에 체대 출신이라 사단장을 경호하는 초병으로 나갈 정도로 몸이 좋았어. 헌병에는 경찰특공대처럼 '특별 경호대'라는게 있거든. 육군 전체 헌병대에서 병사나 간부 가리지 않고 소수를 차출해서 육군교도소에서 일정기간 집체교육을 실시하는데 여기에 다녀오는 것을 굉장한 커리어로 인정해주는 편이야. 특경대에서는 '테러화'라고 걸을때 소리 안나는 전투화를 신거든. 집체교육을 다녀온 M상병 혼자 부대에서 그걸 신도록 허용해주고 전투복에 붉은색으로 '특별 경호대'라고 수놓아진 공수휘장을 달고 다니게 해줬어. 병장들 뿐만아니라 간부들에게도 신임이 대단했어. 나도 처음엔 그냥 멋있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었거든. 샤워실에서 찬물이 약간 튀었다고 바로 발길질을 당하는 바람에 타일 바닥에 발가벗은 채로 구르고 난 이후로 나는 M상병을 사람새끼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야 니네들 끝까지 이럴래. 휴가 가는 날이라고 좋게 넘어가려고 했더니. 씨발."
자수하는 사람이 없자 K병장은 M상병에게 내무실 문을 걸어 잠그라고 하고 나직하게 소리쳤어.
"사마귀 실시."
사마귀가 뭐냐하면, 다른 부대에도 있는건지 모르겠는데, 손모양을 당랑권 모양으로 만든 상태에서 팔꿈치로 엎드려 뻗쳐를 하는 고문법이야. 그러면 모양새가 딱 사마귀와 비슷해지거든. 밖에서 웬만큼 운동하다가 온 사람도 이거 10분 이상 지나기 시작하면 온 몸에서 걸레 짜듯 땀을 흘리게 돼. 이 자세가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근육을 쓰는 거라 팔 다리도 아프지만 허리하고 목이 아파서 결국 버틸수가 없게 되거든. 긴장감이 극에 달해 통각조차 마비되어 버린건지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지 않던 차에 뒷통수를 둔기로 묵직하게 치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들렸어.
"야 M. 넌 애들 관물대 뒤져봐. 나는 한새끼씩 센타 깔테니까."
자수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자 K병장과 M상병은 직접 수색을 하려는 것 같았어. 사마귀 자세로 엎드려 있는데 척추에서부터 뇌까지 전기가 찌리릿 타고 오르면서 번뜩 한가지 사실이 머리를 때리더라고. 몇일 전에 집에서 편지가 왔거든. 오랜만에 엄마의 친필로 쓰여진 편지를 읽을 수 있어서 눈물이 날만큼 기뻤는데 그 편지 마지막 장에 급할때 쓰라고 5만원의 돈을 스카치 테잎으로 붙여서 동봉해줬던게 기억이 난거야. 공교롭게도 지금 분실된 액수와 정확히 일치하는 금액이었지.
사마귀 자세로 엎드려 있는데 정말 돌아버리겠더라고. 이대로 기다리다가는 완벽하게 휴가나가는 고참돈 훔친 도둑놈새끼가 될게 뻔했으니까.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끔찍한 군생활이 보이는 것 같았어. 그런 상황이 되니까 몸 아픈건 전혀 느껴지지도 않고 월드시리즈 7차전을 치르고 있는 메이져 감독이나 핵미사일 위기 앞에서 결단을 해야하는 대통령이 된 것처럼 냉철한 상태가 되더라고. 모든 일에는 골든타임이라는게 있잔아. 그걸 놓쳐버리면 아무리 진실이라고 한들 사람들의 믿음을 얻을 수 없는 경우가 왕왕 생기니까. 나는 다짜고짜 벌떡 일어나서 말했어.
"드, 드릴 말씀 있습니다. 제, 제, 제 주머니에 5만원 있습니다..."
"뭐 이 개새끼야? 이새끼 완전 미친새끼네. 니가 범인이었냐? 씨발, 이등병 새끼가 어이가 없네...아까 자수하라고 할때 왜 안나왔어 개새끼야."
K병장의 기에 눌려서 몸이 짜부러질것 같았어. 전투화를 신고 침상위에 올라가 관물대를 뒤지던 M상병까지 눈에 불꽃을 튀기며 이쪽으로 걸어오더라고. 너무 무서워서 목소리가 덜덜 떨렸지만 마음을 다잡고 나의 결백함을 설명하기 시작했어.
"그, 그, 그게 아니라...집에서, 어머니가 편지로 부쳐주신 돈임다. 지금 말씀 안드리면 의심 받을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는겁니다."
"야이 씨발새끼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너같으면 이 상황에서 믿겠냐? 아까 뭐하다가 이제와서 그딴 개소리를 지껄이냐고."
"설, 설명 드리겠습니다. 증, 증거가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내 관물대 쪽으로 튀어가서 편지를 꺼내왔어. 거기에는 돈을 동봉한다는 취지의 편지내용과 뜯어낸 스카치 테잎 자국이 남아 있었거든. 이정도면 완벽한 무죄 입증은 어렵더라도 유력한 결백의 증거가 될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어. M상병이 편지를 내 얼굴에 던지면서 소리쳤어.
"개새끼가... 장난해? 얼마 보냈는지도 안쓰여있네. 전에 샤워실에서 나한테 맞았다고 그런거냐 개새끼야. 완전 또라이 새끼네. 이거."
내 이야기는 들을 생각도 않고 나를 범인으로 확정하고 몰아부쳤어. 나는 말문이 막혀서 어버버하다가, 여기서 정신을 놓으면 진짜 죽을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어서 심호흡을 하고 설명을 이어갔어.
"그, 그러면 휴게실에 1541 전화기로 집에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저는 전화기에 입도 뻥긋 안할테니 직접 확인해 보시지 말입니다..."
여전히 분노과 의심이 뒤섞인 눈빛이었지만 필사적으로 결백을 증명하려는 나의 시도가 어필이 되었던건지 K병장이 내 뒷덜미를 잡고 휴게실로 끌고 갔어.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옆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엄마가 콜렉트콜을 처음 받아봐서 그런지 통화 연결이 잘 안되더라고. 연결이 안되면 간신히 얻어낸 무죄 증명 기회가 무산되어버리는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어. 다행히 엄마가 전화를 받은건지 K병장이 수화기에 대고 말을 하기 시작했어. 나와 같은 부대에 있는 고참이라고 밝히고 혹시 편지에 돈 5만원을 동봉해서 보냈냐고 물었어.
"네? 돈을 안보내셨다구요?"
K병장은 격노한 눈빛으로 수화기를 든채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라고. 난 정말 미치고 팔짝 뛸것만 같았어. 아마도 헌병대에서 전화가 와서 다짜고짜 돈을 보냈냐고 물으니 혹시 규정 위반으로 처벌 받을 것이 염려되서 그런건지 어머니는 돈을 부쳤다는 사실을 부인한거야. 나는 필사적으로 손사래를 치면서 그게 아니라는 신호를 보냈어. K병장은 목소리를 좀 누그러뜨리고 아까보다는 다소 상냥한 목소리로 나에게 절대 피해가 오는 상황이 아니니 사실대로 말씀하셔도 된다고 끈기 있게 설명을 했어. 몇 분동안 이야기를 듣고 K병장은 어머니의 해명에 납득한 모양이었어. 전화를 끊고 내게 말했어.
"아놔, 시발...야 너 진짜 아니야? 다른데 숨겨둔거 아니야?"
"관물대하고 다 찾아보셔도 됩니다. 진짜 저 아닙니다."
결국 굉장히 찝찝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지만 어쨋든 나의 무죄가 증명이 된 것 같았어. 이상하게 화가 나거나 억울한 감정이 들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기뻐서 눈물이 날 것 같더라고. 난 처음부터 잘못한게 아무것도 없는데, 마치 흉악범이 증거불충분으로 방면이 된 것마냥 고개도 못들고 쭈뼛쭈볏 K병장의 뒤를 따랐어. 내무실 쪽으로 다가가니까 분위기가 어수선한게 누군가가 언성을 높이고 있더라고.
"R상병이 가져간거 맞잖슴니까? 다 알고 있슴다. 내 놓으십쇼."
"나 아니라고 개새끼야. 몇 번 말하냐?"
M상병이 삼류의 앞길을 막고 시비조로 이야기를 하더라고. 나는 약간 의아한 기분이 들었어. 내가 부대에 온지 몇달 안됐을때라 80명쯤 되는 부대원들 기수를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거든. 근데 분명히 기억나는 사실은 내가 전입 왔을때부터 M상병은 상병이었고 삼류는 전입온 바로 다음달에 진급했다고 계급장을 바꿔달고 싱글벙글 했던게 기억이 난거야. 그래서 당연히 M상병이 고참이라고 생각했는데 삼류에게는 존대말을 쓰더라고.
"야 뭐야. 삼류 저새끼 주임 원사랑 텃밭 작업한다고 오전에 나갔다며? 너 왜 여기 있냐?"
K병장이 내무실을 향해 소리치자 삼류가 짜증섞인 표정으로 대답했어.
"아까 똥싼다고 잠깐 올라왔슴다."
"니가 M꺼 돈 가져갔냐?"
"저 진짜 아님다. 올라와서 화장실에만 있다가 지금 내려가는 길임다."
"진짜야? 야 아까 청소할때 누구 이새끼 내무실 들어온거 본사람 없어?"
K병장이 열맞춰 침상위에 앉아 있는 일병들에게 묻자 2~3명이 손을 들고 내무실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진술했어. 갑자기 K병장이 삼류의 가슴팍에 주먹을 풀스윙으로 꽂아버렸어.
"야이 씹쌔끼야. 짬 쳐먹고 뭐하는 짓이냐. 후임들 보기 안 부끄럽냐? 이새낀 영창을 두번이나 갔다오고도 아직 정신 못차렸네."
침상에 쓰러져서 고통스러워 하는 삼류를 아랑곳 하지 않고 M상병이 삼류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어. 뒷주머니에서 돈 뭉치를 꺼내는데 정확한 액수는 기억 안나지만 만원짜리로 20만원 이상 되어 보이는 두툼한 돈뭉치가 딱 나온거야.
"씨발, 이럴줄 알았어. K병장님, 찾았슴다."
엄밀히 말해 병사가 지니고 있기에 다소 많은 돈이 나온것일 뿐 삼류가 훔쳤다는 사실과의 연관성은 전혀 증명된 바가 없었어. 그런데 M상병은 마치 기정 사실이라는듯 돈 뭉치에서 5만원을 빼서 자기 주머니에 넣더라고. 나는 약 몇 분후에 그런 행동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어. K병장과 M상병이 삼류의 관물대를 털기 시작한거야. 상단의 문을 열고 안에 든 것을 한아름 꺼내와서 병사들이 모인 침상 앞에 흩어 놓기 시작했어.
"야 니네들 중에 여기에 자기 물건 있는 사람들 찾아가."
K병장이 말하자 사람들이 쌓여있는 물건 들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더니 놀란 표정으로 자기 물건을 손에 들고 자리로 돌아갔어. 나도 슬쩍 물건들을 확인했는데 육군 훈련소에서 헌혈을 하면 주는, 야간에 편지를 쓸수 있게 불빛이 나오는 후레쉬팬이 있는거야. 내 것이라고 확신했던게 육군 관련 로고와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게 벗겨진 모양이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랑 정확히 일치했거든.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물건의 다양성과 특이성에 나는 아연실색하고 말았어. 가령 군에서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사제 방한 장구류나 캠핑 장비, 카시오 전자시계 이런 품목들은 뭔가 납득이 가잔아. 근데 다른 사람이 입던 사제 팬티나 후임 여자 친구가 선물해준 커플 칫솔 같은 것들도 있더라고. 담배도 안피는 사람인데 터미널 근무때 장병안내소에서 타부대 병사들에게 뺏아온 양담배까지 잔뜩 있었어. 심지어 신병이 헌혈하고 훈련소에서 받아온 로션세트 같은 것들은 종류별로 다 모아놓은거야. 마치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집이 넘칠정도로 잡동사니를 모아두는 뉴기니의 어느 새처럼 도대체 물건의 값어치를 가늠 할 수 없는 물건들을 잔뜩 수집(?)했더라고.
학창시절에 흔히 볼 수 있는, 빌린 돈을 상습적으로 값지 않거나 주변사람 물건 훔치는 그런 종류의 친구들과는 뭔가 느낌이 달랐어. 그 아이들의 행태는 제각각이었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금전적 욕심을 채우기 위한 행동이었거든.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삼류의 도벽이 금전적 욕심이 아닌 순수한 형태의 심리적 자극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이 사람은 훔치는 행위 그 자체를 위해 훔치고 있었던거야.
왜냐하면 우리부대에서 돈을 모으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거든. 내가 신병으로 자대에 와서 일주일 정도 지났을때의 일이야.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서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더니 어둠 속에서 누가 비틀거리며 내 자리 앞에 서 있었어. 완전 비몽사몽인 상태에서도 술냄새가 확 끼쳐오더라고. 머리가 왜 이렇게 아픈가 했더니 그 사람이 내 머리를 발로 밟은게 분명했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상황에서 침상 아래를 봤는데 축구화를 신고 있는게 보이더라고. 나는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재빨리 허리에 붙이고 차렷자세로 섰어. 그 고참이 비틀거리며 말했어.
"야이 개새끼야 돈 가져와, 돈 가져 오라고!"
발음도 불분명하고 어안이 벙벙해서 무슨의미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
"잘, 잘 못들었슴다!"
"개새끼야 돈 어디있냐고! 못 알아듣냐?"
"전, 전투복 상의 왼쪽 주머니에 있씀다!"
갑자기 시야가 까마득해지면서 침상에 쓰러졌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배를 가격당한거더라고. 그 고참은 바닥에 서 있었고 나는 침상위에 서 있었으니 배에다 주먹을 꽂아넣기 딱 좋은 자세였지.
"뭐 씨발새꺄? 지금 내가 신발 벗고 올라가서 꺼내 가라고? 엉? 내가 직접 올라가야돼? 직접 해야 되냐고?"
"죄, 죄송합니다. 꺼내 드리겠습니다."
나는 비어져 나오는 신음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전투복 상의에서 돈을 꺼내 양손으로 공손하게 바쳤어. 이런 일은 그냥 일상처럼 일어났어. 꼭 짬 안되고 약한 애들만 골라 깨워서 다리미실 같은데 가둬놓고 줄 싸다구 때리면서 내가 진짜 너네들을 아껴서 이러는거라고 여기 없는 애들은 잘되든 못되든 관심도 없어서 안깨운거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해대며 괴롭혔으니까.
삼류는 그런 종류의 인간들과는 결이 달랐어. 잡동사니로 지어진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싶었던거야. 그 잡동사니의 성벽 안에서 군주로서 군림하며 세계를 통치하는거지. 자신이 다스리는 국경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전혀 흥미도 관심도 없었어. 재미있는건 삼류가 전역하기 전까지 총 4번의 영창을 다녀왔다는거야. 내가 전입오기 전에 이미 절도로 2번 영창을 다녀와서 2번의 진급 누락을 당했었어. 3번째 영창도 내가 초소에 파견을 갔을때 간거라 이야기로만 전해들었는데 무려 수사계장이 군납용 술을 사라고 준 돈을 야금야금 횡령해서 영창에 갔다고 하더라고. 그때쯤 되니까 진짜 이 사람이 순수한 형태의 콜렉터(?)인지 아니면 단순히 욕심 많은 범법자들 중 한명인지 헷갈리게 되었어. 4번째 영창은 뜻밖에도 후임병 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갔었어. 삼류가 거의 말년이었는데 군생활이 얼마나 꼬였는지 동기들이 애들 때리는데 옆에 서있기만 했는데 피해 조사할때 이름이 나와서 약간 억울하게 가더라고. 하긴 간부들에게 더 이상 잃을 신뢰가 없을 정도로 믿음을 잃었으니 어쩌면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삼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잘못된 습벽을 바로잡고 과거를 지운채 정상인들의 틈에 스며들어 잘 살고 있을까, 아니면 잡동사니로 지어진 자신만의 왕국 안에서 끝없는 욕구를 채우고 있을까. 여전히 정상인과 범법자 사이에 세워진 성벽 위를 아슬아슬하게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끔 궁금할때가 있어. 날씨가 쌀쌀해진 것이 혹독한 추위 속에서 군생활 같이 했던 사람들이 생각나는 계절이 오는 것 같아. 이번 에피소드는 이쯤에서 마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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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급하니 이야기 진도가 더 안나가네요ㅠ
2탄은 좀 여유를 가지고 올리겠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