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로저에게는 노스 대령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기 위해 아직 물어볼 게 몇 가지 더 있었다. "피버 드림은 어떻게 된 겁니까?"
   대령은 커피 컵을 내려놓았다. "그것도 제가 담당자입니다."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나이트메어, 플루토도. 필요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라고 그분께서 말씀하셨고, 원하신다면 잉크도 안 마른 명령서도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지휘 체계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보류 상태이고 다음 번 군축협상에 포함될 계획입니다. 더 이상은 전쟁 억지력을 보유한 ORBAT의 일부가 아닌 셈입니다. 지금은 핵무기를 규격화하는 중이거든요.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그것들도 제 그룹의 일부인 이상, 필요하다면 포함시켜 악의 제국의 전쟁 수행능력을 감소시키는 데 사용할 겁니다."
   로저는 어린 시절의 공포가 피부를 타고 올라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 드레스덴 조약은...?"
"걱정 마십시오. 녀석들이 조약을 깨면 저도 가만 두고 보지는 않을 겁니다." 대령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 찰스 스트로스. "또 다른 냉전" 중.]


["내 인생은 너무 달라서, 남들과 구분이 안 가고..." - 출처: "실어증입니다, 일하기싫어증"]

반갑습니다. 직장인 여러분. PGR21에 고용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Farce라고 합니다. 같이 힘을 모아 일하게 되었군요. 오늘은 "테크노 스릴러"라는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왔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테크노 스릴러"라는 장르는 가장 '현대적인' 장르이거든요.
그렇기에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서는 이 장르에 대해서 한번 재미있게 읽어보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휴가철이 끝나갑니다. 정말로 슬픈 일이지요.

일터에 돌아가면 별로 반갑지도 않은 서류들이 '안녀어어엉'거리고 있습니다. 한 대 쥐어박고 싶지요.
여러분들께서는 자신이 가진 '특수 기술'을 이용하셔서 서류를 한 놈씩 무참하게 살해하는 일을 반복하실 것입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드실 겁니다. '어휴... 이거 남들도 하는 일인데...'

그런데 남들도 하는 일보다는, 아무래도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못 할 일'
그리고 '세상에서 나 혼자 밖에 모르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게 더 대단하고 짜릿짜릿하지 않을까요? 돈도 많이 벌고! 명예로울 것이에요!


["토끼발의 행방을 말하지 않으면 너의 아내는 죽은 목숨이다"- 출처: "미션 임파서블 3"]


["메이슨! 숫자를 말하게! 우리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야!" - 출처: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어때요? 정말 직장생활을 할 맛이 나지 않을까요?

"테크노 스릴러"는 당연히 영어 단어입니다. "Techno-Thriller"인데요.
직역하자면, 기술-긴장물. 또는 기술력으로 짜릿짜릿한 이야기 쯤 되겠네요.

또는 제가 감히 이름을 새로 붙어보자면 '직장인-공포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들어보니, 어떤 이야기를 제가 하고 싶은 것인지 감이 오시나요?

세상에서는 알려져서는 안 되는 물건이 있습니다.
또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야 하는데도 숨겨져 있던 추악한 비밀도 있지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우리 주인공은 고생을 해야 합니다. 평범한 월급 받는 직장인인데!
정보기관이 잡으러 오고, 마피아들이 입막음을 하려고 온다고요! 와! 내가 이런 정보도 인가받는 인재야 인재!


["제가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요." - 출처: "시간의 뒷면"]

음지에 살면서 양지를 지향한다! 우리 피지알러가 우리 아들, 부모, 친구들에게 무슨 거창한 일을 하는지 너스레를 떨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국가안보에 대한 중대한 위험성을 가지기 때문이지요!

가끔씩 이렇게 비상사태도 일어나고 말이야! "내 솜씨를 제대로 보여줄 시간이로군!"


["너무 멋있게 바라보진 마세요! 저도 월급쟁이랍니다!" - 출처: "시간의 뒷면"]

"테크노 스릴러"에 등장하는 '기술'은 작품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등장합니다.
거대한 첨단 기계뭉치일 수도 있고, 비디오 영상, 사람 한 명, 종이 쪼가리, 마이크로칩일 수도 있지요.


["1991년 12월 16일자 임무 보고서." - 출처: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이 사람 하나가 들고 다닐 수 있는 물건에 다 들어있습니다.
악당이 되었던, 주인공이 되었던, 들고 뛸 시간이지요.

그래서 도대체 그 물건이 무엇이냐고요?
이런 이런... 말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기술뭉치였다면, '대외비' 도장도 안 찍어놨을걸요!


["'비홀더(BEHOLDER)'계획이란 '추기경(CARDINAL)'이라는 인물이, '눈사람(SNOWMAN)'을 이용하여..." - 출처: "팬텀 독트린"]

수많은 '업계용어(JARGON)'들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코드명, 업소 이름, 가명... 지명... 본명... 이름 없는 사진만 늘어나지요.
기왕이면 프로젝트 이름을 업체에서 멋있게 지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GORANI-5" 같은 이름은 약해 보이잖아요? 없어 보이고.
그러니 기안에서 이름이 괜히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영어로 약자를 따면 얼마나 발음이 적절할지도 생각해봐야 하고요.

사실 사서 숨길 필요도 없지요. 예를 들어, 타임머신에 들어갈 초동역학위치전환기에 들어갈 PCB 도면을 CAD 하시는 분이시라면,
아마 저와 같은 문돌이에게 적의 정보원이 다가오기 전에 설명하려고 하셔도, 제가 못 알아먹어서 큰 곤란에 처하실 것입니다.


["아들! 아빠가 직장에서 무얼 하는지 SD카드에 넣어서 보여주려다가! 군사위성으로 추적당하고 있어!" - 출처: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이제 아빠가 좀 중요한 일 하던 사람인 걸 뉴스화면 보고 알겠지? 아빠 오늘 좀 늦게 집에 들어가! 라면 끓여서 알아서 저녁 먹어놔.

"테크노 스릴러"는 작품의 방향에 따라서, 가볍게 쓰이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기술 쪼가리를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 대모험! 와! 액션!

하지만, 진지한 작품에서는 이런 소재가 직장인들을 위로하는 것에 아주 특효약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려주기도 합니다.

["일상생활 없이, 탐측소로 출근해 도청한 내용의 보고서만 쓰며 정상적인 삶을 짐작만 하는 슈타지 요원의 삶" - 출처: "타인의 삶"]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기에, 가족을 먹여 살리려 국경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비자를 거부하며 월급을 받는 국경심사관의 삶"]
- 출처: "페이퍼 플리즈 (단편영화)"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크게 숨을 들이쉬면서 잠시 뒤로 기댄 채 애써 긴장을 풀었고, 손 떨리는 것이 멈출 때까지 가차 없는 빛 아래 허공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파이들이 총이나 KGB 요원이나 철조망 같은 걸 두려워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스파이들이 직면하는 가장 큰 위험은 문서였다. 비밀은 문서에 기록된다. 사형집행 명령도 문서로 전달된다. 이런 종류의 문서들, 흐릿한 18년 전 가짜 미사일 사진과 시간/생존자 곡선과 서서히 증가하는 정신병 발병비율이 실린 폴리오로도 충분히 악몽을 꾸다가 한밤중에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게 만들 수 있다. 그가 요약하고 있는 것은 기관장과 CIA 부국장이 승인하에 국가안보위원회와 대통령 당선자가 참고할, 상급 기밀로 분류된 서류 가운데 하나였고, 그는 여기 앉아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담배로 공포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몇 분 후, 로저의 손은 진정되었다.

[- 찰스 스트로스. "또 다른 냉전" 중.]


[모든 일은 서류와 보고서 때문에 일어납니다.]
다른 부서, 다른 일터, 다른 직장에서는 일하는 사람들이 상상하지도 못할 영어약자와 그래프가 버무려져서 무언가가 탄생하지요.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직장이라면, 그 안에 연봉협상, 유임, 승진과 해고가 걸려있습니다.
조금 더 위험한 장소에서 일하신다면, 그 안에 소비자 만족도 들어있지만, 사람이 죽거나 다칠 가능성, 죽은 사례도 포함되어 있을 거고요.

눈에 보이는 이야기, 귀에 들리는 이야기가 일터에는 많지 않던가요?

아주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웃으면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굳이 떠들지 않는 재미없는 이야기도 있을 겁니다.



  꿈속 세계 맨서스에서 덩치란 가변적인 개념이다, 덕분에 나는 어젯밤 벌레 박물관에 들어가, 오스트리아의 빈을 집어삼켰던 벌레 중에서 한 마리가 전시되어있는 꼴을 볼 수 있었다. 그 옆에는 한 아이의 영혼에서 떼어낸 다른 벌레 한 마리도 있었다. 꿈속에서는 그 벌레들이 깨어난 사람의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매끈거리며 무슨 보석처럼 검게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박물관 벽에는 제1차 벌레침공과 제2차 벌레침공에 대한 설명들이 적혀있었는데, 제3차 벌레침공은 역사적 기록이 남기에는 지나치게 최근의 일이었다.

[- 웨더 팩토리, "컬티스트 시뮬레이터" 중.]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톱니바퀴 뭉치가 아니겠어요? 그리고 톱니바퀴가 요동칠 때, 작은 바퀴에서 일하는 사람은... 깔려 죽지요.
보이지 않는 국제정세, 소시민이 정한 것이 아닌 무역갈등, 외부 악재, 자연재해,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보이는 손...

정상적인 사람이 어떻게 현실을 모두 원하는 대로 이끌어내고, 또 원하는 일만 일어나는 삶을 살겠습니까?

정말로 맨서스에서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꿈벌레들이 구멍을 타고 넘어와서 벌인 사건은 아닐까요?
왜 이 버전이 현실이 아니어야 하죠? 적어도 재미있는 작품의 줄거리를 만들 수는 있겠군요!



["세상과 관료제를 하나의 기술, 하나의 특이점, 단 하나의 기업으로 응집한 한국형의 직장인 스릴러 판타지" : 출처: 로보토미 코퍼레이션]
'혁신적인 대기업'이라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설마 사람이 '진짜 갈려 들어 가고 있나?'라고 상상하게 되겠지요?

만약 사람이 정말로 갈려 들어 가지 않고, 사지멀쩡하게 퇴근한다면요? 후우... 그럼 다행이고 재미없는 줄거리를 만들겠군요.
아니면 그래도 흥미롭게 현실에 대해서 다시 새롭게 생각할 비유적인 관점을 얻어가던가요.

그리고 비밀이란 지어낸 게임/영화의 줄거리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쓸 때 없이 자극적인 음모론이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정상적인 현실 세상에 왜 비밀이 없겠어요?



1975년, CIA는 '아조리안 프로젝트(Project Azorian)'가 일간지 LA 타임스에서 다루어질 계획이라는 첩보를 입수하자,
바로 국가안보를 이유로 검열관을 신문사에 급파한 일이 있었습니다.

LA 타임즈는 검열에 대해서 그렇다면, 'Glomar'라는 배가 CIA에 의해서 운용되고,
지금 첩보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냐, 라고 반문했었습니다.

자, 이에 대한 모범 답변을 보시지요.
Glomar식 답변 (Glomar Response)이라고 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길이길이 역사에 남을 헛소리가 등장합니다.

(중략) 'Glomar 함'의 출항 및 항해에 미합중국 정부 또는 그 산하 기관이 참여했는지 확인가능한 자료를 당 기관에 요청한 것에 대해,
[저희 기관(CIA)은 당 언론사가 요청한 자료의 존재여부를 '확인해 드릴 수도,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neither confirm nor deny)'.]

세상에가 대외비는 실존하고요. 3급 기밀, 2급 기밀, 1급 기밀, 기밀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기밀 등등등...
스파이는 존재하고, 내사과는 실존하고, 서류는 만들어지고, 비밀스럽게 세절되고 있습니다.


[러시아 군용 방송국 "UVB-76"에서 세절되지 못하고 유출된 암호책]

누군가는 공익을 위해서 폭로를 하고 있고, 누군가는 기밀 유출에 책임을 지고 옷을 벗고 있지요.
비밀이란 어떤 종류의 '이야기'가 그렇듯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힘'을 다루는 줄거리는 재미있지요.


[게임 "메탈기어 솔리드" 시리즈는 호불... 메호메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시리즈입니다. 애석하게도 저는 매우 좋아해요.]

냉전시대 첩보물의 일본적인 재해석인 "메탈기어 시리즈"는 혹자가 말하기로는,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미필 일본인이 만들만한 작품'이자,
'중2병 정서가 넘쳐 흐르는 주제에, 멍청하게 일방적인 반전-반핵 사상을 훈계하고 주입하려는 게임'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