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의 게임이 치열한 이유
어젯밤에도 치열한 5연전을 치렀습니다.
실제로 서로의 인생을 걸고('애쉬님 그냥 나가 xx세요'), 부상의 아픔을 딛고(경증의 목디스크 환자입니다), 1박 2일에 걸친 진행상의 오류를 겪어가며(중간에 1번의 다시하기가 있었습니다), 롤드컵 선발전에 비견할만한 절박함으로 게임에 임했죠.
그리하여 동작구 현지 시각 새벽 1시경, 결국 브2 승급전 자격을 얻었습니다.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실제로 브론즈들의 게임도 상대적으로는 진지하고 치열합니다.
제가 모르가나 q 한 번을 날리기 위해 몇 초를 조준하는 줄 아십니까?
상대 럭스도 마찬가지겠지요.
단지 결과적으로 둘 다 사이좋게 빗나갈 뿐입니다. 가끔은 뒤쪽으로도요.
그렇게 서로가 스킬샷을 미스하고 우리에게 살해된 미니언보다 자연사하는 미니언이 훨씬 많도록 방치하는 와중에, 게임은 20분 30분 가끔은 50분에 이르기까지 팽팽하고 치열하게 흘러갑니다.
제가 아무리 게임을 뭣같이 못해도, 대개의 게임은 그와 같이 아쉽거나 짜릿하게 결론이 나기에 우리는 내일의 출근을 걱정하면서도 입맛을 다시며 다시 한 번 게임찾기를 누르게 되는 것이지요.
롤이라는 게임은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2. 날카로운 피학의 추억
롤은 상대적인 게임이기에 실력이 비슷한 게이머들끼리 만나면 그 티어가 브실골이든 챌린저든 결과를 예측할 수 없이 흘러갑니다.
근데 실력이 아예 다르면요. 그냥 "양학"이 나옵니다.
제가 롤하면서 만났던 제일 멋진 팀원은, 언젠가 저랑 봇 라인을 섰던 전 시즌 플래의 케틀 원딜이었습니다.
아마도 저는 레오나를 골랐던 것 같은데, 초반에 좀 많이 쌌어요.
6렙 전에 한 3번은 죽었던 것 같습니다.
케틀이 딱 한 마디 하더군요.
"레오나님. 그냥 나가주세요"
보통은 제가 그런 말 한다고 기 죽을 성격이 아니고 그때부터는 정신승리를 위해서라도 따박따박 채팅 모드로 전환을 합니다. 만,
왠지 이 분은 포스가 느껴지더군요.
덫-평타-투망-평타-큐로 이어지는 스킬의 흐름이 군더더기 없이 매끄러워 승전보의 시작을 울리는 피날레.... 뭐였죠? 하여튼 자동 아닥 로그인을 하게 만드는 생소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그냥, 그냥 있었죠.
그냥 강가 쪽 산책하다가 정글이 바텀 쪽 오면 가서 블루 몇 대 때려 주고, 부쉬에 숨어 있다가 적이 와드 박으면 평큐평으로 그거나 깨주고....
왠지 좀 외롭고 학창시절이 생각나고 그랬지만 혼자서 춤도 추고 웃기도 하고 따봉도 누르면서 그냥 구경만 했어요.
......원딜 혼자서 그냥 라인전을 하대요? 그게 되대요?
케틀은 혼자서 라인전과 한타를 지배하고 넥서스 터지자 마자 쿨하게 게임 떠나기 전까지, 저 말 딱 한 마디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분명 개무시를 당했는데도, 기부니가 나쁘지가 않았어요.
오히려 아직도 가끔 바텀에서 케틀과 라인을 서게 되면 그때의 그 케틀을 떠올립니다. 혹시....? 하고 설레면서요.
부끄럽지만 가끔 다른 팀원이 똥을 싸면 그때 그 간지났던 대사를 따라하기도 합니다.
"가렌님. 그냥 나가주세요"
.....결과는 슬프니까 굳이 말하지 않을게요.....
우리가 가끔 이렇게 양학을 당하는 이유.
역시 롤이 상대적인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3. 2019년, 그리고 2020 초반의 LPL과 LCK
그나마 킹존이 결승의 한 자리라도 당연한 듯 맡아주었던, 그나마 KT가 사실상 준우승도르라도 할 수 있었던 18시즌과 19시즌은 달랐습니다.
챔피언 티어 분석에서도, 메타 분석에서도, 개인 기량에서도, 모든 측면에서 G2나 LPL 팀들에게 명확한 열세였고, 자위의 여지도 없었습니다.
이후의 국제전에서는 우리가 명백한 도전자임을 부인하는 팬들도 더 이상 없었고, 3부리그, 4부리그라는 자칭이 자연스럽게 뿌리내렸습니다.
그 와중에 LCK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았던 몇몇 선수들이 예년과 마찬가지로 LPL에 수출되었고, LCK에 있었다면 세대교체의 한 축을 담당했을 많은 유망주들 역시 LPL에서 데뷔하거나 커리어를 이어갔습니다.
LCK에 남아 데뷔한 루키들은 아직 완전히 무르익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무엇보다도 LCK라는 토양이 예전처럼 세계최고를 보증하지 못하는 이상, 어떤 선수가 리그 내에서 두각을 드러낸다 하더라도 전 세계 롤 씬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어느 정도의 위상인지, 측정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선수 풀만이 아니었습니다.
LPL은 LCK와 다방면에서 상당히 다른 스타일을 보여주었고, 무서운 교전력과 능동적이고 빠른 템포의 게임 운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정 팀이나 선수가 아니라 LCK 자체가 변해야 한다, 는 의견이 점차 우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2020 봄. MSC가 열렸고, LCK는 또 다시 LPL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그 직전에 LCK를 제패한 것은 또 다시 T1이었습니다.
4. 김정수 감독도, 페이커와 테디도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T1팬이 아닙니다.
안 그래도 여러모로 시끄러운데 타 팀팬이 왜 T1 얘기를 하느냐.....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솔까 롤판에서 T1 얘기, 페이커 얘기 안 하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롤 한 번 본 적도 없는 옆 사무실 형님도 페이커 얘기는 합디다.
그러니 롤판의 일개 시민이 "공적 관심사"에 대해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스프링 T1은 우승 자격이 충분했습니다.
라인전도 훌륭했고 오브젝트 관리도 부지런했으며 싸움도 훨씬 잘했죠.
반대로 젠지는 믿었던 바텀 라인전이 늘 상성 이상으로 고전했고, 조합도 플레이도 수동적이었습니다.
미리 계산된 다이브 플레이 외에는 한타 장면마다 콜이 갈리는 듯한 모습, 스킬 합이 맞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불리한 상황에서 T1의 벽을 뚫어낼 변수를 창출하지 못했고, 3세트를 제외하고는 그러한 시도의 횟수 자체가 적었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T1이 젠지보다, LCK의 다른 어떤 팀보다 빠르고 부지런했고 싸움을 잘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요.
현 LCK 최강팀인 담원이 MSC 이후 각성했다는 얘기를 많이들 합니다.
저는 각성한 것은 담원 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각성을 하고자" 했던 팀들이요.
그리고 당연하게도, T1 역시 그 중의 하나일 거라고 봅니다.
게임의 템포가 빠르고 교전이 자주 일어나는 것이 늘 보는 재미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건이 반복될수록 결과는 진리에 수렴하죠.
실력 차이가 있는 팀이 단판제에서는 이길 수 있어도 다전제에서 승리하기는 어려운 것처럼요.
게임 내에서 사건이 자주 발생할수록 게임의 결과는 실력 차이에 수렴하고, 각 사건의 결과가 골드라는 이득을 불러와 스노우볼의 형태로 빠르게 구릅니다.
그 결과, 교전이 좀 더 잦아진 서머에서는 매치업만 봐도 결과가 예측되는 경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방패챔만 잘 다뤄서는 최고의 탑솔러가 될 수 없듯이, 최고의 팀이 되기 위해서는 누울 줄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빠르게 굴리고 계속 부딪쳐서 이기는 플레이에도 능숙해야 합니다.
당연하게도 후자를 능숙하게 하려면 그런 플레이를 자주 시도하고 훈련하여 숙달해야 합니다.
칼챔을 잘하려면 칼챔을 많이 연습해야 하듯이요.
김정수 감독의 방향성도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상체의 강한 라인전을 바탕으로 사건을 자주 만들어내며 빠르게 굴려 이기는 게임.
이런 게임을 능숙하게 해낼 수 있어야 강팀이 될 수 있다는 방향성 말입니다.
저는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고, 감독으로서 할 수 있는 주문이라고 봅니다.
선수들 역시 이에 반대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노력했겠죠. 아마 겁나 열심히 노력했을 겁니다.
누구보다 승부욕이 강하고 노력하는 선수인 페이커 역시, 당연히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게임을 잘 아는 만큼, 김정수 감독의 방향성에 대한 이해도 깊었을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아무리 천재라도 마음먹고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도 나 혼자 성취하는 일이 아닌, 경쟁자와 끊임없이 경쟁하며 다른 팀원들과 손발까지 맞춰가는 가운데 성취해야 하는 일은요.
각성을 위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당연히 시행착오도 있고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도 있는 것입니다.
특히나 경력이 오래된 선수일수록, 특정 스타일의 게임에 익숙한 선수일수록 변화를 이루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시간이 걸릴 수 있죠.
그리고 이것 역시, 상대적인 겁니다.
5. 담원은 해낼 수 있을까?
스프링 우승을 했던 T1이 더 강한 팀이 되기 위해 변화를 위한 각성을 시도하는 동안, LCK의 다른 팀들도 당연히 발전을 위한 노력을 해왔습니다.
T1의 조합을 보면, 올해가 데뷔 시즌인 칸나와 클로저, 엘림, 구마유시, 베테랑인 페이커, 그리고 적당한 경력의 나머지 선수들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반면 T1과 서머 경쟁에서 이긴 팀들을 보면, 촉망받던 유망주들이 이제 막 절정에 오르는 멤버들이 많습니다.
담원의 쇼메이커, 너구리, 캐년, 베릴 모두 데뷔가 비슷한 선수들로 LCK 3년차에 들어섭니다.
아직 상승 중인 기량과 프로 무대 적응이 교차하며 딱 전성기의 시작을 맞이하고 있는 시즌인 것이죠.
DRX의 쵸비, 도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케리아와 표식이 데뷔 시즌이기는 하지만, 전성기를 맞이한 쵸비의 기량이 팀 전체를 견인할 정도로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 전에도 잘 하긴 했지만, 이번 시즌 들어서는 시야가 넓어지고 운영의 노련함까지 물이 오른 느낌입니다. 누가 뭐래도 쵸비는 이번 시즌에 가장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젠지는 스프링과 비교하면 순위가 떨어졌지만, 라스칼과 라이프의 기량이 눈에 띄게 발전했습니다.
라스칼 역시 시기로 따지면 보통 전성기를 맞이하는 시즌에 들어와 있습니다.
떨어진 순위에도 불구하고 젠지의 롤드컵에 기대를 갖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친듯이 날뛰는 룰러입니다만, 이는 라이프의 기량 발전으로 젠지 바텀의 라인전 자체가 스프링에 비해 엄청 세진 이유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길게 늘어놓았습니다만, 정리하자면 현재 롤드컵에 진출한 LCK 팀들은 스프링에 비해서도 기량이 엄청나게 발전한 팀들이라는 겁니다.
T1이 못해진 게 아니라, 다른 팀들이 엄청 쎄진 것 같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팀들이 그렇게 발전하기 전까지는 당연히 T1의 아래에 있었습니다.
프로 무대에 완전히 적응한 촉망받던 LCK의 뉴페이스들이 새로운 메타를 습득하면서, 스프링에는 뚫지 못했던 T1의 벽을 뚫은 거지요.
선발전 라인업이 칸엘페구에였든 칸커클테에였든 승리 확률에는 큰 영향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T1의 스프링 우승이 빈집털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암사자 얘기도 아니구요. 저는 오히려 암사자론과 완벽히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스프링의 T1이 몰락해서 다른 팀들이 롤드컵에 진출한 것인가, 혹은 반대인가의 관점에서 볼 때, 저는 다른 팀들의 발전 폭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는 거지요.
요컨대 19~20 시즌을 거치면서, LCK는 바야흐로 "세대 교체"를 완성해가고 있습니다.
19~20 시즌을 거치는 동안 LPL에 열세를 보여왔던 LCK가 각성을 거쳐 전성기를 맞이한 새로운 간판들로 다시 도전하는 최초의 무대가 이번 롤드컵이구요.
그래서 진짜! 이번엔 모른다, 올해는 다르다, 라고 생각합니다.
담원도, DRX도, 젠지도, 충분히 해 볼만 하다, 롤드컵을 되찾아 오는 시즌이 될 수 있다, 라고요.
물론, 롤은 상대적인 게임이지만요. ^^;;
덧붙여 김정수 감독의 경질이 조금 안타까운 건, 다음 시즌에는 T1이 세대교체를 완성하는 턴이 올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번 서머 시즌이 T1에게 LCK의 19 ~ 20일 수도 있으니까요.
데뷔 시즌에 충분한 잠재력을 보여줬던 칸나, 구마유시 등 신인이 한 시즌의 적응을 거쳐 담원의 유망주들처럼 만개하고 페이커 역시 시프트에 성공하면, 다음 시즌에는 T1에게 각성의 턴이 올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