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글(?) :
https://cdn.pgr21.com./?b=8&n=59712
https://cdn.pgr21.com./?b=8&n=63392
서두에 설명을 붙이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몇 가지 미리 안내드립니다.
1) 주로 정사를 기반으로 하고 연의의 내용을 일부 추가한 후 살을 꽤 붙였습니다.
2) 인물들의 자(字)는 기록에 남아 있는 걸 사용했으나 간혹 기록이 불명확하거나 없는 경우도 있는데 상황에 따라 썼습니다.
3) 2편은 내일 오전에 올리겠습니다. 일단은 2편으로 끝입니다.
재미있게 읽어 주세요.
----------------------------------------------------------------------------------
집을 비운 사이에 손님이 다녀갔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심경은 몹시도 복잡했다. 출사(出仕)에 대한 불안 때문은 아니었다. 난세를 살아가는 선비로서 그는 한시라도 빨리 세상에 나아가고 싶었다. 훌륭한 주군에 의탁하여 뜻을 마음껏 펼치는 것이야말로 그가 항상 바라마지않던 일이었다. 더러는 지금이 혼란한 시대라 하여 초야에 묻혀 그대로 늙어가기를 택한 친지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선택지였다. 오히려 천하가 어지럽기에 자신의 재주가 더욱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그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그를 찾아온 유비라는 사람이었다. 유비는 가늠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그는 작금의 황제가 친히 인정한 황족으로, 비록 명목뿐이라 할지라도 좌장군(左將軍)이자 예주목(豫州牧)이며 의성정후(宜城亭侯)에 봉해진 거물이었다. 동시에 그는 탁현에서 자리를 짜서 내다 팔며 생계를 꾸리던 밑바닥 장사치 출신으로, 지금 천하를 절반쯤 거머쥔 조조에게 쫓겨 유표에게 의탁하여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를 찾아온 사람이 바로 그 유비였다.
“남긴 말은 없었습니까.”
“그저 다시 찾아뵙겠노라만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마침 최(崔) 선생님께서도 오셨는데, 두 분이 집 앞에서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주평(州平. 최균의 字)이 말입니까?”
“예.”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요?”
“치란(治亂)의 도리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길게는 아니었다.
“잠시 주평을 만나고 와야겠습니다.”
그의 아내가 입을 벌리지 않고 웃었다.
“보름도 넘게 집을 비우시더니 또다시 말씀입니까?”
“미안합니다.”
그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숙부 제갈현이 죽은 이래로 집안의 일은 전부 아내와 동생이 도맡고 있었다. 아내는 친정에서 가져온 재물을 팔아 그가 읽을 책을 마련했고, 동생은 직접 괭이를 들고 밭을 일구어 그가 먹을 음식을 장만했다. 그런 그들의 고생을 생각하면 그는 도저히 머리를 들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언제나처럼 책망하는 기색 없이 부드럽게 말했다.
“농이었습니다. 집은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부탁합니다.”
그는 바로 일어나 다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더러 와룡(臥龍) 선생이 아니냐고 묻더군.”
최균은 취기가 살짝 오른 얼굴이었다.
“아니라 하니 실망하는 빛이 얼굴에 가득하더군. 심지어는 내 이름을 듣고도 말일세. 내 비록 자네에 미치지는 못하나 나름대로 이름 있는 선비라 자부하고 있었네만 터럭만큼도 신경 쓰지 않더군. 용을 잡지 못한 다음에야 꿩이나 닭 따위는 필요 없다는 말이겠지.”
“겸손이 지나치군, 주평. 그 누가 자네를 그리 낮잡아보겠는가?”
“아니야. 내 말이 맞네. 그래서 나도 부아가 나서 부러 시비를 걸었다네.”
“치란의 도를 설파했다고 들었네만.”
최균은 얼굴을 찌푸리더니 돌연 파안대소했다.
“그랬지. 너희 같은 작자들이 아무리 움치고 뛰어 봤자 아무 소용없다고 말이지. 그런 헛소리를 좀 해 봤다네.”
치란의 도리란 안정된 치세(治世)와 어지러운 난세(亂世)가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것이 역사의 순리라는 것으로, 한갓 인간의 힘으로는 그 거대한 자연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사상이었다. 물론 최균 자신은 그런 헛소리를 눈곱만큼도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은 절친한 친구인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보다 궁금한 것은 유비의 반응이었다. 그는 재촉했다.
“그래서 무어라던가?”
최균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진지한 빛을 띠었다. 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말하더군. ‘그 또한 성현의 말씀이겠지만, 그렇다 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을 겪고 있는 저 백성들을 저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결코 하늘의 뜻은 아닐 것입니다. 비(備)가 비록 미력하나 할 수 있는 일은 끝까지 할 것입니다.’라고.”
그는 잠시 그 말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진심이던가?”
최균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모르겠네.”
그는 눈을 치떴다.
“자네가 모르겠다고?”
“그렇다네. 내 평소 사람 보는 눈이 있다 자부했네만 도저히 알 수 없었어. 그게 그의 진심에서 우러난 말인지, 아니면 그저 입에 발린 말일 뿐인지 말이네......”
최균은 말끝을 흐리며 술잔을 들었다. 그도 따라 잔을 들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할 뿐이었다. 뜨거운 술이 목을 따라 넘어갔지만 전혀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문득 최균이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공명(孔明. 제갈량의 字). 그 남자는 위험하네.”
“위험하다?”
그가 되묻자 최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드네.”
제갈량은 침묵했다. 그 조용함이 갑갑했던지 최균이 화재를 돌렸다.
“그보다 공명, 이 근처에 풍경이 괜찮은 강이 있네만 뱃놀이 한 번 가지 않겠는가?”
제갈량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거의 열흘이나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한담을 주고받으며 노니는 것이 즐거웠던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다시 찾아오겠다는 유비를 내심 피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피한다? 어째서?’
마음속으로 자문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가슴이 갑갑했다. 평소 책을 읽을 때도 한 줄 한 줄 따져드는 것보다는 큰 흐름을 명쾌하게 파악하는 데 집중하는 그였다. 이도 저도 아닌 이런 어정쩡한 상황은 그가 선호하는 바가 아니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펄럭였다. 그러나 그는 추위보다는 차라리 시원함을 느꼈다. 무엇이든 간에 그의 가슴 속에 있는 답답한 응어리를 시원스럽게 날려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오랜만에 도착한 집에는 뜻밖의 손님이 와 있었다. 유비는 아니었다. 그의 절친한 두 친구였다.
“광원(廣元. 석도의 字), 공위(公威. 맹건의 字). 여기까지 어인 일인가?”
제갈량이 그들을 반겼다.
“자네 얼굴이나 보고 가려 들렸네만 없어서 헛걸음을 했나 했지.”
석도 역시 공명 못지않게 반색했다. 옆에서 맹건이 거들었다.
“하마터면 작별 인사도 못 나누고 떠날 뻔했네. 다행이야.”
“떠난다? 어디로 말인가?”
제갈량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잖아도 그 이야기를 하려 왔네. 내가 이번에 출사하게 되었다네.”
“그래? 어디로?”
맹건이 조심스레 답했다.
“고향 여남(汝南)으로 가네.”
“여남이라면, 맹덕(孟德. 조조의 字)에게?”
제갈량이 믿기지 않는 듯 되물었다.
“중원에 사대부가 많은데 자네만한 사람이 어찌 굳이 고향에서 노닐려 하는가?”
“하지만 맹덕이 아니라면 누구를 택하겠는가?”
맹건이 되묻더니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이곳 형주의 경승(景升. 유표의 字)은 나이든 후 사람이 유약하졌고 그 두 아들은 모두 아비만도 못하니 미래가 없네. 익주의 계옥(季玉. 유장의 字)은 무능하여 고작 장로 같은 사이비 도사 따위와 티격태격하며 자기 땅을 지키는 것만도 벅찰 뿐이네. 중모(仲謀. 손권의 字)는 아직 젊어 강동의 호족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고, 위언(威彦. 사섭의 字)은 먼 남쪽 교주에서 왕 노릇 하는 데 정신이 팔린 노인네일 뿐이지. 그러한데 내가 누구에게로 가란 말인가?”
“현덕(玄德. 유비의 字)은 어떤가? 원직(元直. 서서의 字)도 그를 섬기고 있지 않은가.”
말하면서도 제갈량은 스스로에게 위화감을 느꼈다. 굳이 자신이 유비의 이름을 꺼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비록 친구 서서가 얼마 전 그에게 출사했다 하나, 유비는 고작 유표의 객장(客將)일 뿐이었고 미래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조차도 굳이 그런 유비에게로 간 서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맹건이 묘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실은 우연찮게도 바로 그 현덕을 만났다네.”
“자네들이? 어디서?”
“바로 오늘 아침이었네. 자네를 찾아왔다고 하더군. 자네가 없다고 하니 매우 실망한 눈빛이었네.”
“오늘 아침에 말인가?”
안도와 아쉬움이 한꺼번에 제갈량에게 찾아들었다.
“......어떤 사람이던가?”
제갈량이 망설이며 물었다. 맹건이 고개를 내저었다.
“껍데기뿐인 지독한 이상주의자네. 한실의 부흥과 백성의 안민을 이야기하더군. 물론 그 말인즉슨 옳으나, 이 혼란한 시기에 어찌 이상만 쫓아 살 수 있겠는가. 아마 평화로운 시기에 군의 태수(太守)나 봉국의 상(相)쯤을 했더라면 분명 백성들의 칭송을 받는 관리가 되었을 걸세. 그러나 지금은 난세니 그런 이상주의자를 어디다 쓰겠나. 백안(伯安. 유우의 字)은 황실의 종친으로 덕을 앞세우고 백성들을 살뜰히 보살펴 유주의 뭇 사람들이 그를 칭송해마지않았으며 십만의 군사를 지휘했건만 결국은 공손찬 같은 자에게 목이 달아나지 않았던가? 하물며 현덕이겠는가. 장차 제 한 몸 간수하기도 어려울 것 같더군.”
“내 생각은 좀 다르네.”
그때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석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도 공위와 함께 그를 만났네만, 그는 분명 영웅이라 할 만한 사람일세. 자세는 바르고 목소리는 힘찬데, 그러면서도 말과 행동에 인정이 있었네. 백성과 군사들이 그를 따를 만도 하더군. 원직도 그런 모습을 보고 출사한 것이겠지. 다만......”
“다만?”
석도가 천천히 말했다.
“때를 만나지 못했어. 지금은 힘의 차이가 너무 크네. 맹덕이 본초(本初. 원소의 字)를 격파한 이래 지금은 천하의 삼분지 이를 평정했고, 그 지위는 대장군에 이르러 더 올라갈 곳이 없는 형편일세. 그에 비하면 현덕은 비록 좌장군이라 하나 이름뿐이요, 지금은 궁벽한 신야성에 겨우 몸을 의지하고 있으나 맹덕의 군세가 내려오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이니 공위의 말이 맞네. 그에게는 미래가 없어.”
그들이 작별을 고하고 떠난 후 제갈량은 홀로 앉아 깊은 생각에 빠졌다. 유비 현덕. 맹건은 그를 한심한 이상주의자라고 일축했고, 반면 석도는 그가 때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영웅이라 높이 보았다. 최균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도저히 모르겠노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서서는 유비를 만나보겠노라고 가벼운 차림으로 신야로 떠났다가 그대로 눌러앉았다. 대체 그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이 있었다. 그는 다시 올 것이다. 제갈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은 길이 엇갈렸으나 세 번째는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 그는 알 수 있으리라. 유비라는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