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번째 지지인 개 술(戌)의 자원과 파생된 한자들을 살펴보자. 마지막 지지인 돼지 해(亥)는 이미 다루었기에 이 戌이 간지 시리즈의 마지막 한자가 되겠다.

왼쪽부터 戌의 갑골문, 금문, 연 문자, 초 문자, 소전, 진(秦) 예서, 전한 예서, 신 예서, 후한 예서. 출처: 小學堂
갑골문과 금문에서는 도끼날 모양이 선명하다. 위 그림의 갑골문에서는 도끼날에 붙은 자루가 매우 단순한데, 다른 갑골문 중에서는 금문처럼 자루 부분이 창 과(戈)와 유사한 형태인 자형도 있다. 이 도끼날을 표현하는 선들이 펴지면서 지금처럼 천간 무(戊) 안에 한 일(一)이 더해진 듯한 모양이 되었다. 《설문해자》에서도 이렇게 자형을 분석해 “멸하는 것이다. 9월은 양기가 쇠미하고, 만물이 이미 거두어지며, 양기가 내려와 땅으로 들어간다. 오행에서 토는 무의 방위에서 생겨나, 술의 방위에서 성하므로, 천간 무(戊)가 뜻을 나타내며 한 일(一)을 머금는다.”라고 풀이했으나, 갑골문과 금문의 모양이 나타내듯 이는 오행에 끼워맞춘 풀이에 불과하다. 이 풀이를 보면 파생된 한자인 멸할 멸(滅)을 의식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戌은 갑골문에서 이미 본의를 잃고 지지의 뜻으로 가차되어 쓰였다. 스미스는 이 한자가 滅에 접사 s-가 붙어서 파생된 한자로, 멸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달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을 상징하는 열한번째 지지가 된 것으로 보았다. 달로는 음력 9월, 십이시로는 오후 7-9시, 이십사시로는 오후 7:30-8:30, 방위로는 정서에서 북으로 30°를 중심으로 한 15° 이내를 가리킨다. 동물로는 개가 상징하지만, 순수하게 가차된 것으로 보인다.
개 술(戌, 술년(戌年), 경술국치(庚戌國恥) 등. 어문회 3급)에서 파생된 한자는 다음과 같다.
戌+火(불 화)=烕(불꺼질 혈)
급수 외 한자.
烕에서 파생된 한자는 다음과 같다.
烕+水(물 수)=滅(꺼질/멸할 멸)
멸망(滅亡), 불멸(不滅) 등에 쓰이며, 어문회 준3급.

왼쪽부터 烕의 제 금문, 초 문자, 진(秦) 문자, 소전, 진(秦) 예서, 전한 예서, 후한 예서. 출처: 小學堂

왼쪽부터 滅의 춘추 금문, 연 문자, 초 문자, 진(秦) 문자, 소전, 진(秦) 예서, 전한 예서, 후한 예서. 출처: 小學堂
불꺼질 혈(烕)과 꺼질/멸할 멸(滅)은 《설문해자》 해설에선 烕의 뜻을 '멸하다[滅]'로 풀이해 자형뿐만 아니라 뜻으로도 서로 관계가 있는 글자로 나온다. 이 해설에선 '불은 술(戌)에서 죽으니, 양기는 술월에 이르러 다한다.'라고 해, 불 화(火)와 戌이 모두 뜻을 나타내는 회의자로 보았다. 열한째 지지라는 戌의 뜻은 가차된 것이기에, 烕의 《설문해자》 풀이 역시 오행설에 의지한 견강부회일지도 모른다. 도끼로 물건을 부수어 망하게 하듯, 불을 꺼서 없애는 것이 烕의 뜻일지도 모르겠다.
烕은 용례가 없어 보이지만 의외로 후한 예서에까지 출현하는데, 이 한자가 《시경·소아·기보지십》의 한 싯구를 이루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혁혁종주(赫赫宗周), 포사혈지(褒姒烕之)” 곧 “주나라가 혁혁해도 포사가 이를 멸한다”는 구절이다. 주나라는 수도가 서쪽 호경에 있던 시기의 서주, 동쪽 낙양에 있던 시기의 동주로 나누는데, 이렇게 나눈 계기가 바로 포사에 푹 빠진 유왕이 정치를 어지럽게 한 사건이다. 유왕은 포사의 아들인 백복을 총애해 태자 의구를 폐했고, 의구의 외할아버지인 신나라 제후가 여러 나라들과 중국 밖의 민족까지 끌어들여 호경을 무너뜨렸다. 그 결과 유왕과 백복은 모두 죽었고, 그 다음 평왕이 수도를 낙양으로 옮겨서 서주를 닫고 동주를 열었다.
꺼질/멸할 멸(滅)은 《설문해자》에서는 '다하다'[盡]로 풀이하며, 물 수(水)가 뜻을 나타내고 烕이 소리를 나타내는 형성자로 분석했다. 그러나 烕과 滅을 현대에는 같은 글자로 보기도 하며, 그렇다면 滅에서 烕은 소리뿐만 아니라 뜻도 나타낸다.
滅은 음이 '멸'인 한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한문 교육용 기초 한자에 포함된 한자이기도 하다. 일상생활에서도 멸균(滅菌), 멸망(滅亡), 소멸(掃滅/消滅/燒滅), 자멸(自滅), 전멸(全滅/剪滅/電滅), 점멸(點滅) 등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이 중에서 점멸(點滅)은 불빛이 켜졌다 꺼졌다 한다는 뜻으로, 滅이 '꺼지다'의 뜻으로 쓰였다.
성경에서는 먼저 물로 세상을 심판하고 그 다음으로는 불로 세상을 심판하다고 나오는데, 烕에서는 불이 꺼졌고 滅에서는 그 꺼진 불을 물로 다시 한 번 확실하게 꺼트리는 동작 같아서 대비된다.
戌은 도끼의 모습을 그린 상형자며, 파생된 글자에 도끼로 치듯 멸한다는 뜻을 더한다.
烕(불꺼질 혈)은 火(불 화)가 뜻을 나타내고 戌이 소리를 나타내며, 戌의 뜻에 따라 불을 끈다는 뜻을 나타낸다.
滅(꺼질/멸할 멸)은 水(물 수)가 뜻을 나타내고 烕이 소리를 나타내며, 烕의 뜻에 따라 물로써 불을 끈다는 뜻을 나타낸다.
戌은 도끼의 모습을 그린 상형자며, 열한째 지지, 나아가 개의 뜻으로 가차되었다.
戌에서 烕이, 烕에서 滅이 파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