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우에 타케히코의 명작 농구 만화 슬램덩크의 극장판 영화입니다. 30대 이상의, 특히나 농구를 좋아하는 아재 덕후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슈퍼 인기작이죠. 사실 저도 어린 마음에 이 만화를 보고 농구팬이 되었는데, 저같은 사람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저는 이 만화의 열렬한 팬이며, 얼마나 많이 봤는지 만화책 어디에서 무슨 대사가 나오는지 외울 지경입니다.


이번 영화판 제작에는 원작자의 손길이 상당히 들어가있다고 들었습니다. 슬램덩크 정도 되는 작품은, 사실 있는 그대로 만들면 '날먹이다'는 비난을 들을 것이고, 또 감독이 나름 어레인지를 하면 '니가 뭔데 맘대로 재구성하냐'는 욕을 먹을법 하지만, 이번 작품은 원작자가 직접 만들었으니 비난의 여지가 없습니다. 익히 소문이 났듯이, 이 작품은 그동안 조명을 못 받았던 북산의 PG 송태섭을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좋았던 점]

3D 애니메이션이라길래 좀 어색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그런 모습은 거의 없구요.
농구 덕후 이노우에답게 이번엔 작정하고 농구 경기를 현실감있게 묘사했습니다. 흔히 비판하던 "코트 달리는데 10분은 걸리더라"는 비아냥은 안 들어도 됩니다. 일본산 스포츠물에서 흔히 나오는 슬로우 모션 떡칠? 별로 없습니다.

산왕전 자체가 너무 매력적인 경기였기 때문에, 원작에서 터지는 그 부분들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별로였던 점]

저는 아마 원작주의자일 겁니다. 원작의 내용을 어레인지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하지만 제작자 본인이 건드리고, 또 새롭게 다듬는 걸 굳이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그게 얼마큼 잘 나왔느냐가 더 중요하지요. 이번편은 그야말로 작정하고 송태섭만 크게 밀어줍니다. 이것이 아마 호불호를 크게 가를 것으로 봅니다.


먼저 송태섭 과거 이야기가 좀... 너무 평범한 이야기인데 지나치게 길어요. 대충 요약하면 뛰어났던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가정에 닥친 혼란, 그리고 사춘기 송태섭의 반항 기질, 그리고 결국 형은 형이고 나는 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성장 스토리. 진부하다면 진부할 수 있는, 진짜 평범한 이야기에요. 사실 저는 큰 감명을 못 받았습니다.

문제는, 송태섭 가정사는 굉장히 우울합니다. 그래서 송태섭이라는 캐릭터 해석 자체가 바뀌었어요. 원작에서의 송태섭은 구김살없고 밝으며 에너지 넘치고 자신만만한, 사실 부정적인 감정이 거의 없는 캐릭입니다. 물론 이건 송태섭 캐릭터 자체를 깊게 다루지 않은 원작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이번 극장판에서 송태섭 서사를 추가하며 캐릭터의 내면은 풍부해졌습니다. 그런데, 캐해석이 변했어요. 원작에서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사실 허세고, 내면에는 형을 잃고 두려움에 떠는, 한 인간으로서의 송태섭이 있습니다.

이거야 그렇다 쳐도, 경기 중간중간에 회상씬이 자꾸 나오는데 이게 큰 감점 요소입니다. 좀 농구에 달아오를만 하면 자꾸 회상씬이, 그것도 마이너스 감정이 넘치는 씬들이 나와서 경기 몰입을 방해합니다. 스포츠라는게 상승적인 감정, 활기, 폭발, 유쾌, 뭐 이런 감정들이잖아요? 근데 화이팅 했다가 우울해졌다가 하는 퐁당퐁당을 반복하니까 산왕전에 집중을 할 수가 없어요.

그냥 송태섭 서사는 영화 전반에 몰아주고, 영화 후반은 산왕전만 묘사하는게 훨씬 깔끔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영화는 주인공이 송태섭입니다. 그래서 송태섭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부분들은 많이 잘려나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산왕전 전반, 신현필을 투입하며 강백호를 압박하자, 강백호가 역으로 신현필을 제압하면서 자신감을 챙기는 부분. 통째로 다 짤렸습니다. 채치수의 경우 신현철에게 발리는 중 변덕규가 난입하는 장면이 있는데 짤렸구요. 서태웅은 윤대협이 정우성을 들먹이는 부분이 짤렸습니다. 그러니까 경기에 직접적인 부분이나 너무 인상깊은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조리 잘렸다 보면 됩니다.

문제는, 물론 만화판 슬램덩크의 주인공은 강백호지만, 결국 산왕전의 주역은 모두나 마찬가지입니다. 산왕전은 모두가 힘을 합쳐 산왕이라는 적을 물리쳤다에 가까운데, 영화는 억지로 송태섭을 띄어주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다 보니 나머지 캐릭터 팬들은 좀 아쉬움이 있을 법 합니다.



송태섭 이야기를 잠깐 해보지요. 송태섭은 놀랍게도 북산 주전 멤버 중 유일하게 전 경기를 선발로 풀 출전한 캐릭터입니다. 나머지 캐릭터들은 부상, 교체, 체력 저하 등등으로 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송태섭은 한번도 빠진 적이 없어요. 북산으로서는 유일한 볼핸들러이기 때문에 송태섭이 없으면 경기 조립 자체가 안 됩니다. 그런데 그만큼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다른 캐릭터에게 많이 뺐겼었지요.

산왕전에서는 강백호와 더불어 유이하게 경기 내내 투지를 불태우고 제 정신을 잡고 있는 캐릭터입니다. 근데 이게 극장판으로 만드니 역으로 쓸만한 물건이 아니게 됐어요. '처음에는 지고 있었으나 각성해서 적을 격파' 서사가 안된다는 겁니다. 채치수는 신현철, 정대만은 최동오, 서태웅은 정우성이라는 존재가 있는데, 송태섭과 이명헌의 매치업은 거의 강조가 안 되요. 왜냐하면 이명헌도 만만찮게 비중이 공기거든요.

주인공이 송태섭이면, 물론 정우성도 중요하지만 송태섭의 매치업 상대인 이명헌을 좀 살리는 편이 어땠을까요? 마지막 미국 원정에서 송태섭과 정우성이 마주치는것도 너무 뜬금없고.... (송태섭 자리에 서태웅이 있었어야 그림이 났겠죠) 애당초 원작에서 송태섭이 가장 돋보였던 것이 존 프레스를 돌파하는 드리블이었는데, 득점력이 없는 송태섭 캐릭터의 한계로, 좋은 부분은 다시 다른 캐릭터에게 뺏겨버립니다. 서태웅이 패스에 눈을 뜨는 장면은 명장면이지만, 캐릭터 비중으로서 보자면 송태섭은 더더욱 작아지는 비중으로...


정리하자면, 애초에 조연 정도의 비중이 적당했던 송태섭에게 주인공 자리를 과도하게 밀어줬지만, 원작 캐릭터 자체의 한계로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이 영화에서 좋았던 부분은 전부 원작 장면이구요. 나빴던 부분은 대부분이 영화 오리지날 내지는 어레인지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결론은, 충분히 괜찮고 재밌었지만 원작 중시의 관람객에게는 별로 안 맞을 수도 있다. (많은 부분에서 해석이 달라지거나 추가됨)
경기가 농구답게 박진감 넘치고 연출이 좋았던 건 좋음. 경기 내내 회상씬을 끼워넣은 것은 안 좋음.
송태섭을 많이 챙겨주고 비중을 높이려 애썼지만, 결국 극복할 수 없는 캐릭터적 한계가 있다.




ps. 번역문제는 전반적으로 납득할 법 한데,

송태섭이 존 프레스에 갇혔을 때, "젠장, 이 덩치들에게 둘러쌓여서 뭘 어떡하라는거야!" 라는 대사가 "키 큰 놈들이 상대라면 오히려 더 낫지!" 로 늬앙스가 완전히 바뀌어있더군요. 오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이건 오역이라고 할 순 없지만) 정대만 4점 플레이를 보고 준호가 "대만아, 정말 잘 달려주었어!" 라는 대사가 그냥 밋밋하게 "잘했어 정대만!" 으로 했는데, 이 때 쯤의 정대만은 손도 제대로 안 올라갈 정도로 체력 방전된 상태에서 죽기살기로 달려온 것을 표현해주는 대사인데 너무 밋밋하게 처리해서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이상입니다.


ps2. 사족 하나 더. 송태섭 이야기 다룰 거면 가족 얘기를 줄이고 갓한나 양 비중을 늘리면 좋았을 것을.... 한나 예쁘게 나옵니다. 비중은 제로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