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
2019/04/25 01:30:11 |
Name |
꿀꿀꾸잉 |
Subject |
[일반] [8]어릴땐 그랬다. (수정됨) |
어릴때 일이다.
선반위가 손이 닿지 않아
보물상자처럼 느껴지던 작은 시절이였다.
그즈음 나는 '눈감고 걷기' 놀이를 좋아했다.
놀이라고 해도 단순한 것이었다.
단지 엄마와 함께 시장에서 오는 길에
엄마의 손을 잡고 눈을 감고
오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집에 도착했다고 엄마가 말해줄때면
순간이동을 한것처럼 연기하면서 즐거워했다.
그런게 좋았다.
몰래 몰래 눈을 뜰때 들어오는 햇빛들이
어둠속에서 밝게 번질때
자글자글한 자갈들과 돌맹이가 굴러다니던
울퉁불퉁한 보도블럭위의 감촉
약간은 무서운 도로를 다니는 자동차 소리
'이제쯤인가' 하며 중간 중간 생기는 호기심
그런게 좋았다.
조그만한 내 손아귀가 안심할 만큼 커다랬던 온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눈을 뜨면 편안한 집에 도착할거라는 안도감
한 손에 의지하고 눈을 감으면서도,
나는 몇번인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때는 그런게 좋았다.
아니,
실은 거짓말이다.
사실 나는 오늘 저녁에 무언가
글을 쓰겠다는 충동이 들기전까지는
까마득하게 그때의 기억을 잊고만 있었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정말 즐거웠던것인지
다른 어린시절 추억들처럼
머리속에 남아있는 것은 흐릿한 잔상뿐이다.
분명히 그랬던 때가 있었던거 같다
시간이 흐르고 흐른다
처음으로 이사를 가고 내방이 생겼다며
기뻐하던 때는 언제였을까
교복을 입고 어른같다고
생각했던 적은 언제였을까
합벅적으로 술을 마신다고 어른이라며
신난건 언제였을까
눈을 뜨고 보니,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지났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부쩍 자랐다.
정신은 멀쩡하고. 머리는 더 똑똑해진거 같은데
눈뜬채로 보내는 하루하루는
여전히 모든것들은 컴컴하고 어둡다. .
사고싶은 장난감은 언제든지 살 수 있을텐데,
어느샌가 세상은 잿빛처럼 느껴져서
주위의 풍경은 색을 잃어버렸다.
따분한 나는 놀이를 입에 담지 않게 되었다.
그 빈틈에는 어느순간 불신과 의심만이 남았다.
어느샌가 노쇠해진 엄마는 힘들었던 탓인지
앨범속 사진 몇장에 당신의 기억을 놓아두시고는
깔끔하게 모든것들을 잃어버렸다.
시간이 흐르고 흐른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두컴컴한 길을 혼자서
잘도 잘도 걸어가고 있다.
갈길은 멀고 조급함만이 남은채로,
떨어지는 벗꽃들은 이쁘기만 한데
얼굴에 보이는 주름들은 왜그리 슬픈지.
어릴때 일이다.
엄마와 함께 시장에서 오는 길에, 억지를 부려
눈을 감고 손을 잡고 집에 오곤 했다.
그땐 그런게 좋았다.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