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팔에 안겨 쌕쌕 잘 자는 딸은 껌딱지에 흡착판이다. 산후조리원에서 집에 오자마자 낮잠은 혼자 누워 자지 않더니 안자고 울어제껴대는 통에 누워 재우려 갖은 애를 쓰다 결국은 항복해서 아기띠 포대기로 안아 재우게 만들었다. 특히 포대기로 앞으로 안아주는 걸 좋아했는데 안겨 자면서도 엄마 품을 더듬더듬할 수 있고 자다 눈 떠서 나를 안아주고 있는 사람이 엄마인지 확인할 수 있어서다. 누워 모빌보며 쿠션 걷어차며 놀다가 졸려서 우앵 하면 나는 포대기로 앞으로 안았고 둥기둥기 조금 하면 잠이 들며 그 작은 팔로 내 몸을 싹 끌어안았다. 물론 잠들어서 눕힌다는건 불가능했다. 포대기 끈 푸는 순간에 눈뜨고 울었으니까. 대박 더웠던 작년 여름, 망사포대기는 내 딸의 팔에 약한 자국을 남기기도 하며 모녀지간을 찰싹 달라붙어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점점 커가며 자기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뭔지 어렴풋하게 아는 것 같은 14개월 딸은 점점 더 떨어질 줄을 모른다. 아는 게 생기는 것만큼 겁도 생기는 것 같다. 자주 가서 잘 아는 공간과 사람들에게 보이는 친근감은 모르는 공간에서 모르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의 어색함으로 바뀌고 엄마가 없다는 걸 아는 순간부터는 공포로 바뀌는 듯 하다. 세상을 바다 바닥까지 들어엎을 기세로 울어제끼다 엄마가 오면 그치고 울음 후폭풍인 훌쩍임을 딸꾹인다. 애착 형성이 잘 되어 있다는 증거겠지.
가끔 딸인 나와 엄마인 나는 어떻게 다른 점이 있는지를 자각한다. 가난한 딸부잣집 셋째딸인 나는 위로는 언니들과 아래로는 동생들 틈바구니에서 엄마와 아빠에게 가까이 가지 못했다. 엄마에게는 언제나 동생들이 있었고 엄마의 품을 뺏긴 동생들에게 또 아빠를 뺏겼다. 아빠 옆에서 잘 때가 좋았지. 아빠 손을 붙잡고 자던 기억이 선하다. 엄마는 많은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부드러운 가르침보다는 무서운 얼굴과 통제로 일관했고 동네 대표 말썽쟁이였던 나는 거의 매일 그 무서운 표정과 마주해야 했다. 엄마와 친하지 않고 데면데면하다 못해 적대적이었다고 해야 할까. 부모님이 싫었고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근 25년여 동안 이어진 주말가족 생활은 안 그래도 뜨악했던 관계에 불을 지폈다. 모녀지간에 애착이란 건 없었고 관심조차 나를 부려먹는 공부만 열심히 한 작은언니에게 몰렸으니. 유년기에 채워져야 할 애정과 관심은 청소년기에 집안 살림을 돌봐야 할 책임으로 대신되었고, 결국은 소극적 반항으로 인한 꾸중과 책망으로 돌아왔다.
분노. 화가 났다. 나는 왜 아침에 일찍 학교에 가는 언니들의 도시락을 싸야 하며 일찍 가고 없는 언니들을 대신해 동생들 셋의 아침을 해서 차려 먹이고 학교에서 돌아와 교복을 갈아입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해 널었으며 동생들 숙제도 봐야 하고 저녁을 해 먹인 후 언니들 돌아오면 청소 안해놨다고 혼나야 하는가. 학교에서는 그런대로 공부 잘하고 어른스러운 아이였지만 집안에서는 이거 내와라 저거 해와라 밥 먹으라고 앉으라 소리 못 듣는 식모나 다름없었다. 결국 내 일이 아닌데 라는 생각으로 엄마에게 분노의 화살이 꽂혔다. 농사를 지으셔서 1년에 8개월은 지방에 계시고 겨울에 올라와 듣기 싫은 소리만 하는 엄마. 그나마도 고등학교 올라가기 직전에는 겨울에도 내려가셔서 모래알같은 주말가족은 계속되었다. 엄마가 없는 집. 어른이 안 계시는 집에는 아이들만 살았다.
결혼 즈음 일주일간 내내 울었다. 심리적 탯줄이 끊어진다는 결혼이라는 이벤트. 나는 그렇게나마 이어져 있던 마지막 연결고리를 내 선택으로 끊어야 한다는 게 정말 슬펐다. 엄마와 시장 한번 못 가 보고, 맛있는 거 한번 못 먹어보고, 영화 한번 못 보고 엄마의 딸에서 새 가정을 이루는 객체로 떨어져 나간다는 게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어릴 때 필요했던 애정과 관심, 애착은 지금 채울 수도 없고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서러웠던 감정은 깊게 남아 눈이 따갑고 아프도록 눈물이 났다.
지금은 엄마가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걸 인정한다. 2명씩 연년생, 총 6명은 키우기 힘들다. 가방끈이 짧고 해 온 일은 농사를 짓는 것, 할 수 있는 일은 막노동. 그나마 아이들이 똘똘해 좋은 대학에 보낼 수 있다는 희망으로 궂은 일 꿋꿋하게 버티셨지만 아빠가 벌이는 지엽적인 행각의 뒤치닥거리는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해야 하는 시간들을 저당잡아야 했고 결국 희망도 온전히 이루지 못하셨다. 한 인간의 삶, 여자의 삶, 엄마의 삶 모두 이가 세개씩은 빠졌으니. 고단하고 피곤하며 화가 나지만 가정을 지키기 위해, 필요없는 딸들 식모로 보내버려라, 아들도 못 낳는 잘난 여편네라는 조소와 막말을 견뎌가며 살아온 70년 조금 안 되는 인생은 자식들과 조금씩 더 많이 이야기하며 조밀해지는 중이다. 8명의 손주를 그렇게 예뻐해 하며 그 때의 자식들에게 예쁘다 예쁘다를 못한 게 한스러우시다며.
내가 화장실도 못 가게 문을 닫아버리는 이 작고 소중한 딸더러 껌딱지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 아기는 그때의 작은 나를 치유해 준다. 내가 이만했을 때 집에는 고등학생 막내이모가 나를 봐 주러 와 있는데 마당에는 개들이 돌아다닌다. 위험하니까 이모는 마루 밖으로 못 나가게 붙잡으러 다니는데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는 걸 보면 바르고 고운 말을 하지는 않은 걸로 생각된다. 대신 나는 딸에게 솔톤으로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말을 하고 건다. 내가 듣고 싶었고 필요로 했을 말을 해 줌으로 그 시절의 어린 나에게 위로를 건넨다. 괜찮아, 내가 알아. 다 알고 있어.
남편과 연애를 시작하던 시절에 한 말이 있다.
"나는 절대로 가족이랑 떨어져 살지 않을 거야. 내 아이가 날 필요로 할 때 나는 절대로 그 옆에 있을 거야."
그래서 그런가, 딸이 흡착판인 거슨.
침대를 굴러다니며 아빠를 발꿈치로 가격하는 딸이 옆에 엄마 없다고 우앵하며 일어나 앉으며 두리번거리면 오른팔로 안아 누이며 다정하게 말해 준다. 응, 엄마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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