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 헌법학, 통계학, 사회학, 신학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문외한입니다. 여기저기 주워 들은 지식으로부터 떠오르는 생각을 되는 대로 적어 보려 합니다. 때로는 부정확한 지식, 때로는 개념에 대한 곡해나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표성이라는 말은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 말들 중 하나입니다. 모두가 '대표성'을 요구하면서도,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가치와 목표를 추구하며, '대표성'이라는 동일한 말을 내걸고, 그러다 보니 제시하는 수단도 저마다 다릅니다.
누가 우리를 대표할 자인가? 대의 민주주의를 거버넌스 방식으로 채택하는 모든 정치 공동체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크게는 공화국부터, 작게는 학급 반장 선거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대표자를 선출하고, 대표자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실패한 대표자 선출을 문책하며, '대표성'을 부르짖습니다. 모든 대표자의 후보자들은 자신이야말로 '대표성' 있는 자임을 내세웁니다. "나는 여러분을 대표하는 자" "나야말로 여러분을 대표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대표성이라는 말에는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는 듯 합니다.
하나는 '탁월성'입니다.
누가 반장 선거의 반장이 되어야 할까요? "1등"이 되어야 합니다. 성적으로건, 운동 실력으로건, 하다 못해 인기나 싸움 실력으로건, 전교 1등, 못해도 학급 1등이 '대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중 가장 탁월한 놈이 대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반을 대표하는, 우리 반의 얼굴인 반장을 어디 내놔도 안 꿀리니까요.
대표를 선출하는 자들은 은연 중에, '우리 중 가장 탁월한 자가 우리의 대표가 되어야 하고, 그래야 우리가 더욱 탁월해진다, 더욱 탁월해지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탁월하게 보인다' 라는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우리 중에 1등을 찾아야지요.
곧 있으면 총선입니다. 선거 날이 되면 곳곳에 벽보가 붙겠지요. 그 모든 포스터의 이력 란은 후보자의 '탁월성'을 강조할 것입니다. "나는 어디 명문대를 졸업했고, 나는 어디서 무슨 고위직을 겸한 바 있고, 나는 여기서 학사, 저기서 석사, 또 저기서 박사 학위가 있고, 나는 무슨 단체장을 한 바 있고, 기관장을 한 바 있고, ..." 이들 모두 탁월성을 어필합니다.
그리고 유권자들도 은연 중에 탁월함을 제1 고려 대상으로 삼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고졸이기만 했다면 당선되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졸임에도 불구하고 독학으로 사시에 붙었다는 그 탁월함까지 있었기에 그를 고려 가능한 옵션, 선택 가능한 후보자로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대표성의 또 다른 의미는 '평균성'입니다.
누가 한 공동체의 대표자가 되어야 할까요? 사람들은 공동체의 평균인(average man)이 바로 그 공동체의 대표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 집단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경험, 기억, 사고방식, 생활습관, 생활방식, 특성 등을 공유하는 사람이 대표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또한 사람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표자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어야 하고, 우리와 '닮은' 사람이어야 하고,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어야 하고,
그러자면 우리의 '평균'이어야 합니다. (수학은 잘 못합니다만, '평균'은 정의상 집합 내의 모든 관측치들과 가장 거리가 가깝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대표자는 '보통 사람'이어야 합니다. 저 높은 윗사람, 범접할 수 없는 천룡인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어야 합니다.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으로 보면 노태우와 노무현은 정반대의 극단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보통 사람' 전략에 호소했다는 점에서 꼭같습니다.
노태우도 '보통 사람'이었고, 노무현은 '대통령이기 이전에 보통의' '시민'이었지요.
한 때 정몽준 전 대표가 버스 비를 정확하게 모른다고 비난을 한 몸에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류의 비난은 흔히 등장합니다.
청문회만 열리면, 장관님은 삼겹살 값이 요즘에 얼만지 아시냐, 의원님은 택시 비가 요즘 얼만지 아시냐, 물가도 모르시냐, 힐난이 쏟아집니다.
네이버 댓글 창만 보면, 진보 정치인들에게 돈도 안 벌어 본 놈들이 정치를 한다, 일도 안 해 본 놈이 정치를 한다, 힐난이 쏟아집니다.
얼마 전에는 황교안 대표가 "좌파들은 돈도 안 벌어봤다"라고 이야기했다지요.
사람들은 대표자가 보통 사람이기를, 우리가 타는 버스를 타고, 우리가 먹는 삼겹살을 먹고, 우리처럼 물가를 걱정하고, 우리가 돈 벌 듯 돈 벌어 보고, 우리가 일 하듯 일 하기를 또한 바랍니다.
그러나 이는 모순된 요구입니다. 사람들은 탁월함으로서의 대표성과 평균으로서의 대표성을 동시에 대표자에게 요구합니다.
완벽한 엄마이자 완벽한 커리어우먼인 슈퍼맘이 되라는 요구만큼이나 모순적입니다.
어떻게 탁월한 자가 동시에 평균인 자가 될 수 있나요? 탁월한 자는 이미 탁월한 순간 평균치와는 한참 벗어난 것입니다.
어느 분야에서건 1등을 하는 순간 그는 이미 평균은 아닙니다. 그 분야의 극단값이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사람들은 모순의 공존을 요구합니다. 결국 대표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은 이에 부응하고자 연기합니다.
나는 탁월한 자가 아니다, 스스로를 낮춥니다. 나는 여러분과 같은 보통 사람이다, 여러분과 같고, 닮고, 여러분의 삶의 체험의 현장을 공유하는 자다, 끊임없이 어필합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의 탁월함이 드러나야 합니다.
사람들 역시, 정말로 탁월함이라고는 없는 순수한 보통 사람은 대표자로서 고려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평균성을 연기조차 하려 하지 않고 탁월하기만 한 자, 탁월함을 뽐내기만 하는 자는 역시 대표자로서 고려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표성의 세 번째 의미는 '다원성'입니다.
통계학은 잘 모르지만, 통계학자들이 말하는 대표성이란, 모집단(포퓰레이션, 즉 인구)의 다원성을 표본('샘플')이 재현해야 하는 정도에 대한 개념입니다.
한 집단에 남자와 여자가 반반이면, 그 집단의 '샘플'도 남자와 여자가 반 반에 근접해야 대표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반반인 집단의 샘플이 여자만 80%라면, 그 샘플은 대표성이 없는 샘플이라는 의심을 받게 되지요.
우리 나라에 8도가 있다 하면, 여론조사 '샘플'에도 8도 출신이 고루 있어야 그 여론조사 샘플이 대표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공동체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청년도 있고, 노년도 있고, 부자도 있고, 빈자도 있고, 버스 기사도 있고, CEO도 있고, 명문대생도 있고, 고졸도 있고, 다원적입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대표자들이, 우리 공동체의 다원성을 재현하는 "대표성 있는" 샘플이 되기를 또한 바랍니다.
그러나 1인의 대표자가 공동체의 모든 다원성을 "대표"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남자면서 여자이고, 부자면서 빈자이고, 청년이며 노인이고, 고학력자이며 저학력자일 수 없습니다.
(신이면서 인간이고, 남자이나 Y염색체가 없고, 세상의 주인인데 머리 둘 곳 조차 없었으며, 태초부터 존재했으나 서른 살 새파란 청년이었고, 성전에서 바리새인들을 가르쳤으나 나사렛의 목수에 불과했던 그리스도 정도가 되어야 이 모든 다원성을 한 몸에 대표할 수 있을까요.)
대의 민주주의는 '복수'의 대표자로 입법부를 구성하여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 복수의 대표자에는 남성 대표자도, 여성 대표자도, 여성주의자의 대표자도, 청년 대표자도, 노인 대표자도, 노동계의 대표자도, 재계의 대표자도, 자영업자의 대표자도, 농민의 대표자도, 호남의 대표자도, 영남의 대표자도, 강원과 제주의 대표자도, 서울 대표자도, 실향민 대표자도, 탈북자 대표자도, 난민의 대표자도, 종북의 대표자도, 환경주의자의 대표자도, 채식주의자의 대표자도, 기독교인의 대표자도, 무슬림의 대표자도, 불교도의 대표자도, 무신론자의 대표자도, 그야말로 모든 이들의 대표자가 있기를 공동체는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세금만 축내는" 국회의원 정수는 줄어들기를 바랍니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국회의 구성이 더욱 더 다원적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계속 제기되고 있습니다.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는 그 중 한 수단으로 주장됩니다. 그러나 지역구 선거제도도 지역 다원성을 보장하는 하나의 수단이었기도 합니다.
국민들은 입법부에도 열거한 세 가지 대표성을 동시에 요구합니다.
우리의 대표자들은, 우리의 국회의원들은, 우리의 입법자들은,
우리 중 가장 탁월한 자들이어야 하고,
그러면서 우리의 평균이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가 다원적인만큼 다원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표자들에게 세 가지를 동시에 요구하기에,
그만큼 우리는 세 배로 더 실망합니다.
탁월한 자들이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 아님을 확인할 때 실망합니다.
하지만 우리 '평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이들을 보면서는, 그들의 탁월하지 못함에 실망합니다.
우리의 중 평균인 이들이 마이너리티의 특성까지 대표하지 못함을 확인하며 실망합니다.
하지만 마이너리티를 대표한다는 이들이 평균의 사고방식과 충돌할 때 또한 실망합니다.
우리의 대표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탁월'하면서, 동시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평균적'이면서, 동시에 그들이 각각 마이너리티를 대표하여 대표자의 샘플이 '다원성'까지 갖출 수 있을까요?
우리의 국회의원이, 일 년에 수 천 개의 법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킬 정도로 유능하면서, 동시에 술은 항상 소주에 안주는 삼겹살을 먹고 우리처럼 생활고와 물가에 시달리며 때때로 로또 복권을 긁으면서 버스와 지하철과 도보로 출퇴근할 정도로 평균적이면서, 남성이면서 여성이고 지방민이면서 서울사람이고 빈자이면서 부자이고 명문대생인데 고졸이고 정규직인데 비정규직이고 자산가인데 노동자이고 조직인인데 자영업자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대표자들에게 모순적 존재가 되기를 요구하고
우리의 대표자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단번에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