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참 나쁜 사람이다..
중2병이 들기도 이전인 중1 부터 부모님을 마구 무시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냐면 어떤 말을 걸더라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가끔 내가 불리한, 가령 용돈을 받고 싶다든지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부모님에게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고 의사소통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
중3 졸업식 날 아침에 거실 컴퓨터로 카스를 즐기다가
애지중지하던 단종된 A급 mx300 마우스 선을 잘리고 난 이후로
나의 이러한 마음가짐은 더욱 불붙었다.
고등학생이 된 어느 날 부터는 집에 있다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정확히는 IMF 이후 패배주의에 찌든 집안 분위기가 싫었다.
겨울마다 보일러가 터지는 서울 6천 전세집에서 4명이 산다는 것은
화목한 가정의 친구들 집이나 인터넷으로 접한 북유럽풍 인테리어와는 하늘과 땅 차이었기에
그냥 집이 싫었다. 싫은 이유도 많았고 구체적으로도 대 여섯가지는 됐다.
이미 중학교때부터 경제적으로 완전한 독립은 아니더라도
편의점, 고기집, 출장부페, 심지어 폭죽 판매나 전단지 배달 같은 아르바이트 등으로
요즘 말로는 흙수저 같은 집에서 짐이 되고 싶지 않았던 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부모님의 도움 없이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내가 뭔가를 받는건 이유 없이 빚을 지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다 내 돈 벌어서 쓴 것도 아니지만은 크게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는 내가 자랑스러웠던 것 같다.
대학교 들어가서도 부모님과 데면데면한 관계는 계속됐다.
심지어 내가 입학금을 내야하는 마지막 날까지 부모님은 내가 어느 대학교에 들어간지 조차 몰랐었다.
왜냐면 말을 안했으니깐. 이런걸 왜 알려야 하지? 라는 마음이 들어서 친구들은 다 아는 내 대학교를 부모님은 몰랐었다.
남들은 반항이고 불효라고 했지마 난 그냥 이게 편했다. 내 일에 간섭하려드는 부모님이 싫었다.
그래도 잠깐 각별했던 느낌이 잠시나마 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군대.
누구나 잠깐동안 효도를 하게 된다는 그 시기에도 난 부모님에게 훈련소 포상 전화 기회를 쓰지 않았다.
받지도 않는 전여자친구에게 첫번째로 전화했고, 두번째는 곧 입대할 지금은 친하지도 않은 친구였다.
그래도 면회를 하면 잠깐이나마 주말 일과 열외를 하게되니 그게 좋아 부모님에게 그 먼길을 발걸음하게 만들었다.
물론 군생활에 대한 애로사항이라든가, 씩씩함이라든가, 구체적인 대화를 적극적으로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나마 일말 이후로는 면회도 오지 말라고 했다. 그냥 생활반 선후임들이랑 노는게 더 재밌었다.
전역하고 다시 예전과 똑같은 태도로 부모님을 대하던 나.
어느순간부터는 부모님 또한 나에게 말을 걸지 않기 시작했다.
가족이 다 추석에 내려갔는데 공부한다는 핑계로 내려가지 않고 여자친구를 데려와 집에서 놀다가 걸려서
혼나는데 오히려 내가 욕하면서 뛰쳐 나갔던 이후였던 것 같다.
난 오히려 이게 더 편했다.
더이상 나의 장래에 대한 욕이 섞인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고, 집 안에서 하는 일을 아무도 터치하지 않으니깐 좋았다.
새 컴퓨터를 조립하고, 미친듯이 LOL에 빠졌다.
3학년 1학기 기말고사 마지막 전공 시험지는 그래서 백지로 냈다. 그리고 LOL하려고 휴학도 했다.
그래도 재수 좋게 중소기업 파견직으로 뽑혀서 주일야겜을 즐겼다.
휴학을 1년 반을 했고 일을 1년을 했는데, 일이 끝날때까지도 부모님은 내가 어디서 일하는지도 몰랐다.
사실 부모님은 휴학한 것도 친구의 부모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부모님은 항상 찰진밥을 해 먹었다.
소화 잘 된다고 항상 그렇게 먹었는데, 난 꼬드밥이 아니면 그 특유의 식감때문에 잘 넘어가지도 않았다.
같은 집인데 밥솥을 따로 샀다. 미니 밥솥으로 꼬드밥을 두 세번 해먹다가 싸구려라 그런지 설익은 밥만 완성시키다 다시 집어넣었다.
그렇게 25살의 겨울이 지나갔다.
26살, 또 재수가 좋게 대기업 공모전에 붙고 인턴직을 확보받았다.
지금생각해도 이때는 스스로 자신감이 좀 있었다. 남들이 요즘 뭐하냐고 물어보면 인턴 준비하느라 바쁘다며 으스댔다.
실상은 하루종일 연애질이나 하다가 새벽 늦게까지 LOL하는 삶의 반복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내 소식을 다 알게 됐고 더 자랑할 데 어디 없나, 하고 둘러보니
부모님이 있었다.
하루종일 닫혀있는 아들의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있는 안방의 문을 7년만에 처음 열어봤다.
엄마가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다.
설날이었는데, 사업 실패 후 명절에 움직이는 돈이 아까워서 항상 아버지만 시골에 내려가는게 일상이었다.
13년의 세월동안 대부분 엄마는 조그만한 안방에서 TV랑 설날, 추석 연휴 2박 3일, 3박 4일을 그렇게 보냈다.
쓰레기같은 아들이지만 그 순간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었나보다.
슈퍼에 가서 맥주 4캔을 사왔다.
좁디 좁은 안방에 앉으면서 이야기나 좀 나누자고 했다.
그때 내가 그 용기를 냈던게 지금도 살면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인 것 같다.
한 집에서 27년동안 살던 아들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랐는지
엄마의 표정은 뭔가 불안하고 무슨일이 있어서 온건지 싶었다.
순간 내가 이렇게 엄마한테 자식같지 않은 존재였나 싶어 슬펐다.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듯 주절주절 활발하게 최근 나의 상황을 말했다.
이래저래해서 모 인턴을 하게 되었다. 잘 되면 전환도 된다더라. 라고 떠들어댔다.
엄마는 웃으면서 그래 열심히 해 라고 말해주었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시집오기 전까지 부자집에서 배 따뜻하고 예쁜 옷 입으면서 잘 살고 있었다.
외할아부지가 돌아가시고 아빠 사업도 망하면서 길거리로 나앉게 생기자
전업주부였다가 평생 해본 적 없는 일과 사회생활이란걸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름에 물이 허리까지 찼던 반지하 집에서 인형에 눈깔 붙이는 것 부터 했다. 두개 붙이는데 십원 줬을거다 아마.
그러다가 그걸로 수입이 안되니깐 배운건 없으니 어이없게도 가전제품 영업이란걸 시작했다.
일을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안했던 엄마가 아는 사람도 하나도 없는데
신축 원룸 빌라 사장님들을 공사 현장에서 만나가며 영업을 하러 다녔다.
새벽마다 안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지만 난 그게 듣기 싫어서 이어폰 끼고 라디오나 쳐 듣고 있었다.
그때 엄마 나이가 마흔이었다.
작년 여름, 인턴은 보기 좋게 실패로 돌아갔고, 부랴부랴 없는 스펙으로 하반기에 자소서를 넣었던 기업들도 다 고배를 마셨다.
여자친구한테도 차였다. 하 존나 사랑했는데..
막상 다음 상반기 공채를 넣어야 하는데 가지고 있는 영어점수도 없었다.
불면증과 정서불안과 무식욕, 무성욕, 해탈을 넘어 멘탈이 가루가 되어서 남아있지도 않을 정도였다.
사람을 만나는게 무서웠고, 누군가 나의 근황을 궁금해하는게 무서웠다.
12월부터 지금까지 딱 6명의 친구들을 만났다.
2명은 헬스장에서 만나서 같이 운동하고 있고, 2명은 귀국 기념으로 꼭 한번 만나자고 했고, 2명은 그놈들 취업 기념으로 만났다.
그 이틀 외에는 카톡은 항상 비어있고, 전화 한 통 없으며 나머지 시간은 냄새나는 청소년 독서실에서 하루 1천원을 내고 토익 공부를 했다.
하루동안 하는 말이 안녕하세요, 4층 20번 주세요 가 끝이었다.
그리고 집에 들어오면, 원래 활발한 나는 미친듯이 말이 하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게 바로 엄마다.
아버지는 인턴 전환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 인생을 역전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걸 날리냐 라고 말했다.
엄마는 인턴 전환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괜찮아 라고 했다.
아버지는 여자친구랑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금 너 할 일을 신경 쓰라고 헤어진거라고 말했다.
엄마는 여자친구랑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괜찮니 라고 했다.
사실, 어제부터 엄마가 조금 아팠다.
감기인데, 열이 펄펄나는 정도는 아니지만 자꾸 끙끙대는걸로 보아 정도가 조금 있어 보였다.
평생 안하던 짓을 하기로 했다. 난 결코 효자가 아니기에 간단하게 해줄 수 있는걸 찾아보았다.
저기 대추로 우려놓은 물을 끓여서 주면 좋아하겠네, 싶어서
대추물 냄비를 끓이다 생각해보니 이건 내가 어제도 그제도 몸 건강해지라고 마셨던 대추물이었다.
죽을 쒀서 주면 좋아하려나 싶어서 쌀통과 냉장고를 뒤적거리다보니 불린 쌀이 나왔는데
저건 일주일 전에 내가 감기라고 엄살 부려서 불려놓은 쌀이었다.
따뜻한 수건같은거 해서 주면 좋아하려나 싶어서 현미를 넣은 조그만 베개같은걸 전자렌지에 돌리고 있는데
이건 내가 하도 잠도 못자고 그러니깐 만들어서 연말에 두개를 잘때마다 뎁혀서 내 이불 위에 올려져있던 것이었다.
생색 좀 내보려고 했는데 그게 안됐다. 이미 엄마가 나에게 몇 십년간 해주고 있던 것이었다.
혼자 꺽꺽거리며 울었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왜 이렇게 별거 아닌걸로도 눈물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엄마가 나에게 뭔가를 물어봤다. 팩스 보낼 일이 있는데 몸이 너무 아파서 팩스가 있는 친구네 가게까지 못가겠다고.
엄마 요즘 이런건 핸드폰으로도 할 수 있어. 이러면서 시범 보여주며 앞으로 이걸로 하라니깐 너무 좋아하신다.
엄마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무시해버리고 대답도 안하던 예전일이 생각나서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고 슬프고 죄송했다.
예순이 다 되도록 아직도 청소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화장실 청소하고, 요리하고, 회사 팀장으로 일 까지 하고...
아들내미는 집에서 팡팡 쳐 놀고 앉아있는데, 싶어서 일단 얼른 눈물을 몰래 닦고 죽이랑 김치랑 먹으라고 드렸다.
얼마 전, 우리집 밥솥이 고장나서 새 밥솥을 살까 하다가 예전에 내가 쓰던 미니 밥솥이 생각나서
가스불에 밥을 해서 미니 밥솥에 옮겨놓는 식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래도 이놈이 보온은 나름 잘 해준다.
이걸 쓴지가 3달이 다 되가는데, 단 한번도 엄마는 귀찮다고 미니 밥솥으로 밥을 해서
모난 아들내미에게 설익은 밥을 준 적이 없다.
원래 엄마가 그런건지, 우리 엄마가 참 좋은 엄마인건지 모르겠는데 알 것 같다.
취직도 못하고 빌빌거리고 있으니 내가 똥을 푸고 살더라도 결국 남는건 가족이라는 걸 느낀다.
그 중에서도 어메요. 어메는 내 앞으로 평생 잘 해드리리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읽어 내려가면서 목이 메이면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
다들 힘나는 덕담해주셨으니 전 제가 하고싶은 말 좀하겠습니다.
왜 그토록 뀨뀨님을 낳고 자기 몸처럼 아끼고 소중하게 대해 주었을 엄마에게 모질게 했나요.
왜 그토록 이쁘고 빛나는 한번 뿐인 젊음을 버리고 가족을 지키고 고생한 연약하고 착하고 불쌍한 엄마에게 모질게 대했나요.
이세상에 사랑하는사람이라고는 어쩌면 뀨뀨님 밖에 없었을 엄마에게 무슨짓을 하신건가요?
정말 못된 분입니다. 제 친구였다면 등짝 정말 쎄게 때렸을겁니다.
정신 똑바로 차려서 말씀 꼭 지키셔서 평생 효도하시고 미친듯이 행복하시길 빕니다.
엄마가 너무 행복해서 눈물 흘리시게 만들어주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