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 이섭. 딱 봐도 순딩이 모범생인 그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런 이섭에게 매일 지각하고 수업도 대충 듣는 하윤은 다소 신기한 존재입니다. 방과 후 청소를 하며 이 둘은 점점 가까워집니다. 이후 이들의 관계에 하윤의 친구인 길수까지 추가되죠. 불량하게 살고 있는 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며 이섭은 도둑질도 배우고, 난생 처음 싸움도 하게 됩니다. 이섭의 위태위태한 우정과 짝사랑은 세상의 벽에 부딪힐 수 밖에 없습니다.
청소년기는 늘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격정적이고 무모하고 낭만적이죠. 그러나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에는 공감하기 어렵군요.
일단 <울보>는 청소년기를 다루는 초점이 오락가락합니다. 영화 제목처럼 청소년들은 사실 눈물 많고, 눈물 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일 수도 있죠. 그러나 이 영화는 “사춘기”라는 특정 시기와 “현실적 어려움”이라는 두 소재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주로 “청소년들은 이렇게 살고 있다” 라는 현실적 디테일을 나열합니다. 가난, 결손 가정, 어른들의 착취, 범죄 같은 현실적 소재들은 청소년들이 주로 겪는 사회적 문제가 맞아요. 하지만 이런 사건들은 이미 청소년 드라마의 클리셰 수준의 소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속에서 발화되는 감정들 자체는 이 영화 고유의 뭔가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가난해서 힘들고, 뭘 갖고 싶어서 힘들고, 외로워서 힘들고, 무시받아서 힘들고…. 그 뻔한 뉴스거리 속에서 도드라지는 청소년들의 감성적 디테일들이 새로울 게 없어요. 그런데 영화는 내러티브를 이섭이 겪게 되는 “현실”을 풀어내는 데 몽땅 소비합니다.영화가 각 인물의 내면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이섭, 하윤, 길수가 분출하는 감정적 파장이 훨씬 더 중요한데도 말이죠. 관객들이 보는 것은 달리 충격적일 것도 없는 현실과 식상한 서러움이죠.
그러다보니 <울보>가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들에서 유머나 눈물이 과합니다. 건조해야 할 장면들이 “이럴 수 밖에 없었다” 라는 감정적 변명을 미리 깔고 가는 거죠. 하윤이 원조교제를 하는 이유는 엄마가 아프고 가난해서, 이섭이 절도를 하게 되는 건 우정이 필요해서, 길수가 깡 있는 척 굴고 이런 저런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다 먹고 살기 위해서. 결국 이 영화가 보여주는 청소년기 비행의 현장 역시도 어떤 위악처럼만 보입니다. 드라마적 요소가 포함된 장면들은 미리 정해진 연민을 향해 영화가 관조적 시선을 가장하는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이들의 거친 삶은 "이해해주고 보듬어줘야 하는" 결론으로 치닫게 될 것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청소년들의 비행을 어떤 "결과"로 보는 관점이 늘 정답은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상"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감정을 증폭시키죠.
그래서인지 이 영화가 보여주는 비행 장면들의 톤은 그 농도가 어긋납니다. 고만고만한 비행만 보여주면서 이해를 구하는가 하면, 심하게 헝클어진 인생을 한 덩어리로 취급하기도 하죠. 이섭과 길수 무리가 도둑질을 하고 싸우는 이야기는 웃어넘길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가볍지 않은 범죄이지만 무거운 죄책감을 유발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하윤의 원조교제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원조교제를 가장하고 하윤이 어른을 속여서 돈을 훔치는 것까지는 좋아요. 그러나 그 어른이 하윤을 때리고 납치해서 집으로 끌고 가면 이건 더 이상 일탈로 인한 갈등의 영역이 아니죠. 납치라는 심각한 범죄입니다. 거기다가 영화는 하윤의 상처를 그리기 위해 “성병”이라는 설정까지 끌어들입니다. 원조교제를 하다가 성병에 걸린 여자애가, 납치를 당해서 강간을 당할 뻔 했다는 이야기로 영화가 급격히 무거워지는 겁니다. 그런데도 영화는 여기에서 이섭과 길수의 얼렁뚱땅 활극으로대충 마무리 짓습니다. 길수네 패거리가 좀도둑질 하고, 다른 비행청소년들이랑 싸우고, 이런 이야기랑은 다른 무게의 이야기를 똑같은 청소년기 방황으로 그리는 거죠. 이건 그냥 울면서 서러워하고 털어낼 일이 아니잖아요. 하윤이 겪은 심각한 위험은 트라우마에 가까운, 평생에 이어질 수도 있는 일입니다. 길수와 이섭이 저지르는 비행의 연장선상에 놓을 수가 없죠.
이처럼 이 영화는 성에 대한 묘사만 지나치게 셉니다. 아직 사회속에 편입되지 않은 아이들이니 좀 거친 언어를 쓰고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보짓살 존나 탱탱하던데” 라는 대사는 너무 과합니다. 이 영화에서 이 정도 수위의 욕설은 거의 나오질 않아요. 길수가 하윤을 강간하려고 하는 장면도 그렇습니다. 아직 어리니까 저지를 수도, 당할 수도 있는 일로 강간을 표현하고 있어요. 거기다가 하윤이 걸린 성병의 흔적을 보고 길수가 기겁하는 건 여성의 치부를 너무 편리하게 써먹는 혐의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하윤은 엄마도 없고, 친구도 없고, 돈도 없는, 충분히 불쌍한 소녀에요. 그런데 뭘 위해서 이런 최악의 설정을 끌어들이고 그 캐릭터를 이야기 내에서 이토록 밑바닥으로 떨어트려야 할까요? 만일 길수가 극중 변태에게 성폭행 당하거나 장애가 될 정도의 상처를 입는다면, 이 영화가 유지하는 “착한” 톤은 그대로 유지될 수 없었을겁니다. 하윤에게만 끔찍한 과거를 안기고, 이를 대수롭지 않게 처리하는 영화의 불균형한 시선은 꽤나 불편합니다.
영화의 결말, 하윤과 이섭은 우연히 알게 된 폐지 줍는 할머니의 집에서 현금을 훔치기로 합니다. 할머니가 계란찜을 요리하는 틈을 타 이섭은 서랍장을 열고 천만원 가량의 돈을 빼내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밥을 먹던 이들은 할머니가 혼자 사는 사연을 묻고, 할머니는 잠겨있던 서랍장을 열어 감옥에 가있는 아들의 사진을 보여줍니다. 분명 현금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는 걸 봤을 게 틀림없지만, 할머니는 별 말 없이 아들의 이야기만을 할 뿐입니다. 그리고 긴장한 채 계란찜을 떠먹고 있는 하윤과 이섭에게 말을 건넵니다. “너네들은 착한 아이들이구나.” 그럼에도 이들은 끝내 돈을 돌려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진 채 하윤은 이섭마저 뒤로 하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죠.
아마 영화는 이들이 착한 아이로 남을 수 없던 현실과 청소년들의 나약한 모습을 그리고자 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장면 역시 영화가 앞서 저질렀던 실수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하윤과 이섭이 어떤 사연이 있건 홀로 사는 할머니의 돈을, 그것도 복역중인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 맡겨둔 돈을 훔치는 행위는 이해하기가 어렵죠. 차라리 영화가 이들을 비겁하고 치사하게 그렸으면 오히려 연민의 여지가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섭과 하윤이 어쩔 수 없던 것처럼, 그리고 이들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제하고 이들이 “외롭고 쓸쓸한” 존재라는 것을 부각시켜요. 이런 식으로 가치판단을 미뤄서는 안됩니다. 나쁜 짓이지만, 그래도 어쩌겠냐 라는 체념은 청소년과 현실에 대한 공감이 아니에요. 연민은 모든 행위를 이해하지도, 눈감아주게 하지도 못합니다. 윤리적 논점을 제거하고 이 모든 걸 도피와 방종으로 그리는 것은 오히려 청소년을 제대로 된 개인으로 바라보지 않는 오만입니다.
시작은 미약했고 끝은 더 미미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담아내는 가운데도 눈물과 웃음이 척척하게 젖어있고 결국 끝에 가서는 성장도 타락도 아닌 어중간한 탈선만이 남습니다. 그래서 길수는, 그래서 이섭은, 그래서 하윤은? 이라고 물었을 때 이 영화는 아무 것도 대답해주지 못합니다. 과연 엇나간 이들의 인생은 모두 어른들의 탓이며 이를 보듬어줘야만 하는 것일까요. 야만이어도 아름답고 나쁜 놈들이어도 빛날 수 있다는 걸 영화는 종종 까먹습니다. 막 나가는 가운데서도 반짝거리고 투명한 이야기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착하고 어설프기만 한 이 영화가 어떤 의미가 있을려나요.
@ GV 현장에서 지켜본 바로는 누가 봐도 이섭이 감독님의 자전적인 캐릭터라는 걸 알겠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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