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 - 팔왕의 난
"진나라 사람들은 우리를 노예로 부려먹었는데, 지금 그들이 골육끼리 서로 싸우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저들을 버린 것이며, 우리에게 호한야(呼韓邪) 선우가 세웠던 위대한 업적을 회복하게 한 것입니다."
- 유선(劉宣, 흉노족의 좌현우 유연의 수하), 자치통감 권85 진기7 혜제 영흥 원년(304), 국내 번역본 자치통감 9권 p. 426
보통 5호 16국 시대라고 하면, 서진이 폭싹 망하고 무주공산이 된 땅을 이 참에 한탕 크게 잡아보자고 이민족들이 죄 달려들어서 난장판이 된 시기로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만, 사실 완벽하게 들어맞는 말은 아닙니다. 서진이 폭싹 망한 것도 맞고, 이민족들이 죄 달려든 것도 맞는데, 엄밀히 말하면 명목상이나마 "무주공산"은 아니었기 때문이죠.
또 보통 5호 16국 시대라고 하면 영가의 난으로 서진이 폭싹 망하고 대혼란기가 왔다고 생각하게 마련인데, 기실 서진이 폭싹 망할 때는 이미 전 중국이 혼란 상태였습니다. 국가라는 게 무슨 유리창 갈듯이 한 번에 쨍 깨지고 깨진 유리를 신속하게 다시 갈아치우는 그런 식으로 들어서는 게 아니더군요. 무슨 소리냐면, 여러분들이 다 아실 삼국지를 들어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후한이 망하고 유비의 촉한, 조비의 위, 손권의 오가 서로 천하를 삼분하고 각각 황제를 칭한 건 다들 아실 겁니다(손권이 황제를 칭한 건 유비 사후의 일이지만). 그렇게 후한이 망하고 나라가 서로 갈라지기까지 각지의 군웅들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일어나서 할거하지 않습니까? 그런 비슷한 과정이 5호 16국 시대의 발단기에도 있었다는 겁니다. 한 번에 서진이 쨍그랑 하고 망한 뒤 서진을 갈아치우듯이 16국이 난립한 것이 아니라, 16국이 난립하는 과정에서 서진 정권이 무너진 것이라고 봐야 오히려 더 타당하다는 거죠.
그리고 이 서진 말기의 대혼란은 후한 말기의 대혼란 못지않았는데, 단적인 예가 서진 정권이 멀쩡히 살아 있던 시기에 이미 5호 16국이라 불리는 열여섯 나라 중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나타났다는 거죠. 삼국 시대에는 그래도 유비와 손권이 명색이나마 한실의 신하임을 자처하며(특히 유비는 한실의 후예라서 더더욱 명분을 중요하게 내세울 수밖에 없었죠) 후한 헌제 산양공 유협이 조비에게 선양한 이후에나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 5호 16국의 16국 중 두 나라는 멀쩡히 서진 정권이 살아 있음에도 황제를 참칭한 겁니다. 그 두 나라가 바로 성한(成漢)과 조한(趙漢, 또는 前趙)입니다. 오늘 다룰 부분은 이 두 나라가 들어서는 시기인데, 그 중에서도 팔왕의 난과 겹치는 시기입니다.
제가 쓴 이전 글, 즉 맨 위에 링크해 둔 팔왕의 난에 대해 다룬 글을 읽으시면 알 수 있으시겠습니다마는, 저는 이전 글에서 지방 정권의 반란에 대해서 전혀 다루지 않았고, 그렇다고 사마월이 전국을 평정하고 잠시의 평화기가 왔다는 식의 서술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죠. 어쩌면 이전 글을 읽으시면서 지방정권은 어떻게 된 것이며 대체 왜 제가 '평화가 왔다'고 서술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신 분들이 있으시다면, 이번 글이 조금이나마 그 의문을 풀어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팔왕의 난이 서진에게 있어서 비극적이었던 것은, 단순히 서진 왕조의 사마씨끼리 골육상쟁을 벌여서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로 인해 전국이 들끓었기 때문입니다. 의외라면 의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이야기는 놀랍게도 가남풍이 죽고 조왕 사마륜이 정권을 잡은 시기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이 일이 서기 300년인데, 팔왕의 난이 종식된 것이 306년 12월이고, 서진이 망한 것은 317년인데, 오늘 다룰 300년에서 306년 12월까지 그 6년 동안 16국 중 한 나라가 들어서고 다른 나라가 기틀을 잡았던 겁니다. 다시 말해서,
5호 16국이라는 대혼란기가 들어선 책임의 8할 정도는 팔왕의 난에 있다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그 때까지의 타임라인이 이번 글의 주제입니다. 다만 자치통감의 서술이 전반적으로 촉 땅에 대해서 대단히 자세한 관계로 이 글의 대부분은 촉 땅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되겠네요.
출처가 되는 책이 하나뿐인 관계로, 다른 표기는 생략하고 페이지만 남겨둡니다. 국내에 번역된 권중달 교수님의 자치통감 9권에 해당합니다.
조흠의 난
서기 300년, 가남풍이 조왕 사마륜에게 주살당했습니다. 그러나 가남풍이 중국을 통치했던 것은 9년에 이르는 꽤나 긴 세월이었고, 그 기간 동안 자기 사람을 여기저기 심는 것 정도는 (지금 같은 민주정 시기도 아니었던 만큼)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테죠. 그렇게 가남풍의 인척 중에서 감투를 쓴 사람 중에, 익주 자사 조흠(趙廞)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마륜이 조흠을 불러들여서 황후궁의 총책임자로 삼으려 불러들였는데, 문제는 이 조흠이 그냥 단순한 인척 정도가 아니라 가남풍의 사돈이 되는 사람이었다는 거죠. 자치통감에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가남풍과 가밀의 삼족이 주멸당한 것을 보았을 때 조흠을 불러들여서 죽이려는 속셈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여하간 조흠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아주 두려워했는데,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여기서 죽느니 일단 한 번 해 보자는 심산으로 반란을 준비합니다. 곡식을 풀어 촉 땅의 백성들의 마음을 사고, 이름있는 사람을 불러 자신의 수하로 삼았는데 이 중에 이특(李特)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흠의 수하가 되어 도적질을 한 인간인데, 이 이름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여하간 조흠을 중앙으로 불렀으니 누군가가 중앙에서 내려오겠죠. 경등이라는 사람이 그 사람이었는데, 조흠이 경등을 맞이하는 척하다가 경등을 죽이고 그 수하마저 제거한 후에 마침내 스스로 익주목, 대도독, 대장군에 취임하면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관중과 촉을 잇는 루트를 싹 끊어버리죠. 당장은 어디 오나라가 있을 때의 진나라도 아니고 하니 길을 끊어두는 편이 유리했을 테니까요. 이 사건으로 진나라는 촉 땅에 대한 지배권을 상당 부분 상실합니다. 이게 질질 끌리다가 결국 팔왕의 난이 끝날 때까지 촉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잃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겠습니다만.
함곡관 서쪽의 진주(秦州) - 대충 삼국시대의 무위, 서평, 음평, 무도 일대 - 에서 조흠에게 귀부한 사람으로 이상(李庠)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앞서 이야기한 이특의 형제 되는 사람입니다. 자치통감의 기록 중에서 이상이 저(氐)족의 4천 기병을 이끌고 조흠에게 귀부했다는 말이 있고(p. 321), 조흠이 그 수하들과 의논할 때 그 수하가 "이상이 우리와 같은 종족이 아니어서"(p. 329)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 이 이상과 이특 형제들이 한족이 아닌 저족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지 6 하셨던 분들이라면 뭣도 아니면서 성도와 자동을 귀찮게 만드는 저왕이 좀 귀찮으셨을 법도 한데 바로 그 저족입니다. 5호 16국의 5호 중 하나죠. 슬슬 감이 오시지 싶네요.
여하간 이 이상이라는 사람이, 조흠에게 칭제를 권했습니다. 조흠은 앞서 자기 수하들과 의논한 것도 해서 이상을 불안한 눈으로 보다가 얼씨구나 하고 이 기회에 잡아다가 죽이게 됩니다. 이상의 아들과 조카 10여 명도 죽였죠. 아 근데, 모름지기 일을 처리하려면 깔끔하게 해야 하는데 조흠이 이특과 이류(이특의 동생)는 또 그냥 내버려둡니다. 이특과 이류가 군사를 이끌고 밖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면 이상을 죽이지를 말던가, 아니면 이특과 이류까지 같이 제거했어야 했는데 조흠은 이도 저도 아닌 짓을 했으니 이특과 이류가 조흠을 원망하면서 면죽관으로 돌아가벌이고 이 와중에 조흠의 수하가 감군 자리를 놓고 싸우다가 모두 죽는 어이없는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조흠에게 드디어 망쪼가 듭니다. 그리고 이를 갈던 이특이 기회는 이 때다 하면서 7천 군사로 성도를 공격하니, 조흠은 패전하고 도망가다 죽고 성도는 그야말로 아비 규환이 됩니다. 이특이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한 때문이었죠. 약 40년 전인 263년의 종회의 반란 때 성도성이 아주 미쳐 돌아가던 때가 있었는데 그 비슷한 일이 벌어진 거죠.
그렇게 이특이 일단 (머릿속에 든 생각과는 별개로) 뭐가 어쨌든 조흠의 난을 진압하니, 이게 서기 301년의 일입니다. 조정에서는 양주 자사였던 나상(羅尙)을 보내 평서장군 및 익주자사에 봉하죠. 도적떼에 불과하던 이특은 일단은 지금은 숙여야 할 때임을 직감했는지 싸우지 않고 얌전히 나상 밑으로 들어갑니다. 나상은 기회를 봐서 이특을 죽여야 한다는 주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죠.
그리고 촉 땅이 어쨌든 잠잠해지니 기다렸다는 듯이 제왕 사마경이 일어나서 조왕 사마륜을 죽이고 삼족을 이멸합니다.
이특의 독립
어쨌든 조흠의 난이 진압되고 유민들을 이제 돌려보내려고 하는데 솔직히 유민들이 왜 생겼겠습니까. 돈 없고 땅 없고 가진 게 없으니 유민이죠. 그들에게 돌아가라고 하는 건 유민들에게 자살행위나 진배없는 일이라서 유민들이 크게 불안해하는 와중에 새로 익주자사가 된 나상과 그 수하들은 오히려 이 일을 서두릅니다. 유민(대충 아까 그 성도를 털었던 도적떼)의 수장 격인 이특이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오히려 이특을 잡으려고 하고 여기에 그 문제의 수장이 조흠의 난을 평정한 공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일부러 보고를 하지 않는 사건까지 겹치면서 앞서 7천 명 가량이었던 이특의 무리가 2만 명으로 불어납니다(물론 여기에는 이특 본인의 선동도 단단히 한 몫을 했습니다). 게다가 이 나상이란 인물은 탐욕스럽고 잔인한 인물이라 촉 땅의 백성들의 걱정거리였다는 이야기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p. 358) 용렬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과정으로 이특이 반란을 일으키려는 낌새를 보이고, 나상의 수하들이 3만 군사를 이끌고 이특을 습격했지만 역포위에 걸려서 그 대장들이 모조리 죽고 병사도 거의 전멸 상태에 이르니 드디어 이특의 난이 이렇게 시작된 거죠. 당시 조정의 정사에 참여하던 옹주를 기반으로 한 하간왕 사마옹이 군사를 보냈으나 오히려 이특의 아들 이탕에게 패배하는 사건까지 발생하니 이렇게 촉 땅의 이탈이 완전히 가시화된 겁니다. 저족이 역사의 흐름에 등판한 건 덤.
그리고 이 때 엎친 데 덮친다는 건지 제왕 사마경의 목이 달아납니다.
이류와 장창
익주 자사 나상의 군대가 형주의 군사까지 끌어들이고서도 연전 연패하고 있을 때, 이특이 방심하고 있다가 한 때의 기습에 제대로 걸려들어서 이 때 이특이 잡혀 죽는 대형 사고가 일어납니다(p. 379). 근데 보통 머리가 죽으면 자연스럽게 박살이 나게 마련인데, 이특의 동생 이류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군세가 수습되고 저족이 여전히 이씨 형제에게 호응하면서 난이 끝나지가 않습니다. 아니 결과를 생각하면 이미 난이라고 부를 수가 없는 상황이겠습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뒷일이고... 이특의 군세가 한 번 패하기는 했지만 전열을 가다듬고 나상의 군세에게 달려드니 나상이 다시 패주합니다. 이류는 담이 별볼일없는 사람이었는지 이특이 죽고 이특의 아들 이탕도 추격하다가 죽자 항복을 고려하지만 이특의 조카 이웅이 형주군을 퇴각시키니 이류가 스스로 아주 부끄러워하였고 군사에 관한 일을 모두 이웅에게 위임합니다. 이 때 이웅의 나이 불과 서른이었습니다. 서기 303년의 일이죠.
숭어가 뛰니까 망둥어도 뛴다던가, 이번에는 만족(蠻族)의 두목 장창이 난을 일으킵니다. 근데 이런 난을 일으키려고 무리를 모은 장소가 의양인데, 여기가 완성과 신야성의 중간쯤 되는 지점이거든요. 삼국지 게임 많이 해 보신 분은 알겠지만 여기는 그야말로 허도가 코 앞인 지점 아닙니까. 그런 곳에서 반란의 씨가 싹틀 정도였으니 뭐 알쪼죠. (p. 382, 서기 303년)
앞서 나상이 형주의 군사까지 끌어들였다고 언급했었죠. 당연히 형주의 백성들은 자기들이 이류 토벌군에 끌려들어갈까봐 크게 불안해했는데 이 심리를 이용한 것이 장창입니다. 웬일인지 이 때 강하에 풍년이 들었는데 여기로 밥을 얻어먹으려고 온 무리까지 끌어들이면서 드디어 장창이 강하군을 점령하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물론 장강 이남의 반란 때문에 관군이 군사를 일으켜서 모두 죽일 것이라는 선동도 포함해서 -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아닙니까? 이각과 곽사가 난을 일으켰을 때의 그 선동...
하여간 장창이 난을 일으키자 관군이 여남성과 완성에 주둔했는데, 그 말인즉슨 그 이남은 반기를 든 상태로 돌입했다는 이야기죠. 촉 땅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이류의 무리는 그간의 전투로 백성들이 죄 싸움에 동원되는 통에 식량이 떨어져서 아주 궁핍한 상태였는데 나상의 참군 서여가 헌책했음에도 나상이 받아들이지 않자 아예 이류에게 항복하고 역으로 이류에게 헌책하니 식량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 진언이라는 것이, 식량이 될 만한 큰 고을의 우두머리와 연결해서 이류를 치면 이류가 간단히 무너졌을 텐데 나상이 그렇게 하지 않자 역으로 그 우두머리를 설득해서 군량을 공급하게 하여 이류군의 식량 문제를 해결해버린 것이죠.
촉 방면이 서로 손쓰기가 어려워서(한쪽은 군량 문제, 한쪽은 장창의 문제) 잠시 휴전기에 돌입하고 장창이 형주 일대를 휩쓰는데, 이 장창은 이특의 무리만큼 능력이 있지는 않았는지 곧 관군에게 대패하고 장창은 산적 두목이 되고 맙니다(p. 390). 그러나 이렇게 대패하기까지 휩쓴 곳이 한둘이 아닌데 일단 난이 일어났던 강하를 포함해서 무창발, 영릉, 예장, 장사, 서주 땅이었죠. 그러니까 형주, 강주, 서주, 양주, 예주(형주와 서주 사이에 양주가 있고, 예주는 서주와 무창발 접경지역이죠) 다섯 주를 휩쓸고 다닌 거죠. 얘들은 문자 그대로 머리가 없는 산적 두목인지라 금방 망한 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이들이 끼친 해악은 한둘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여간 장창이 산적 무리가 되자 귀신같이 또 내전이 벌어지고 이번에는 사마예가 살해당합니다. 그리고 장창의 잔당을 토멸하고 양주와 서주가 완전히 평정되자 여지없이 내전이 벌어져 사마월과 사마영이 치고 받고 싸우게 되죠. 그리고 이 때 이류가 병사하고(p. 395), 앞서 이류가 군권을 위임했던 이웅이 추대되어 대도독, 대장군, 익주목에 취임합니다. 서기 303년의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웅이 완전히 전면에 등장합니다.
이웅과 유연
이렇게 이웅이 전면에 등장하고, 이 때 사마영 휘하에 있던 흉노족의 수장 유연이 군사를 이끌고 오겠다고 뻥카를 치고 자기 고향에게 돌아가서 무리를 모아서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게 됩니다. 이 때 글 서두에 달았던 진언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참고로 호한야 선우의 부인 되는 사람이 그 유명한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인 왕소군입니다. 앞서 저족이 촉 땅을 완전 장악했다는 건 이야기했었죠. 이번에는 흉노족도 서서히 칼을 들이밀기 시작하게 된 겁니다. 이렇게 유연이 전면에 등장하고, 둘은 무슨 약속이나 한 듯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건국을 하게 됩니다.
먼저 이웅이 스스로 성도왕의 자리에 올라 대사면령을 내리고 건흥이라 기원을 정했습니다. 황족이 아닌 자가 왕위에 오른 것은, 다음 스텝이 분명함을 이야기했고, 그나마 선례라고 할 수 있는 조조의 위왕 즉위의 경우 조조의 나이가 많기라도 했지 이웅의 나이는 불과 서른하나였습니다(274년생, 이 사건이 벌어진 것은 304년). 진나라의 법률을 없애고 법조문을 7조목으로 줄였으니 더 이상 진의 법령이 통하지 않게 되었고, 진이 드디어 명목상이나마 전국을 지배하던 나라에서 지방에 할거한 나라 중 하나로 떨어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죠(이 해설은 권중달 교수님이 직접 단 주석에서 인용했습니다).
한편 유연은 자기가 유씨라서 그런지(물론 진짜 고조의 혈족이 아니라 흉노족에게 한황제가 내려준 일종의 사성(賜姓)이었겠습니다만) 고조의 예에 의거하여 한왕의 자리에 오르겠다 하여 한왕을 칭하고 대사면령을 내립니다. 한중에 있어서 한왕이 아니라 고조의 예에 의거한 한왕이어서 실제 강역은 산서성 일대의 조 땅이었고, 그래서 이 유연이 세운 나라를 가리켜서 조한(趙漢)이라 합니다. 혹은 전조(前趙)라고도 하죠.
재미있는 게, 이 유연이 한왕의 자리에 오르자 한 일이 안락공 유선(그 나라를 말아먹은 유비 아들 못난이 유선 맞습니다)을 효회황제라 추존하고, 전한의 고조 유방과 후한의 세조 광무제 유수 및 촉한의 소열제 유비를 포함한 여덟 황제의 신주를 만들어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죠. 자신은 한나라의 후예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나무위키가 영 사실이 아닌 부분이 많아서 신뢰하긴 어렵습니다만 나무위키 측의 서술이 맞다면) 삼국지평화의 결말부에서 유연이 유비의 친척으로 설정되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사실이라면 이런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죠. 삼국지평화는 삼국지연의보다 더한 야사일 뿐이니 사서로서의 가치는 영 글쎄올시다입니다만 그런 배경 설정에는 이런 뒷배경이 있는 것이죠.
팔왕의 난 당시의 유연의 활약은 아직까지는 촉 땅을 문자 그대로 완전히 휩쓸어 버린 저족의 반란과는 달리 약간 덜한 편이라서 기록이 그렇게까지 상세하지는 않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유연이 언제나 병주 땅의 동영공 사마등과 탁발씨가 연대한 세력을 격파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과정에서 유연이 패하는 일도 있었고 하니 결국 흉노족 내부의 교통정리, 또는 흉노족과 선비족의 싸움이 아직 안 끝났다는 거죠.
이웅과 유연 둘 다 속된 말로 난 놈들이라 이들은 완전히 진을 지방정권의 하나로 밀어넣어버렸고, 그래서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오호십육국 시대의 시작을 이 둘이 왕위에 오르는 304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웅은 306년에, 유연은 308년에 각각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비록 끝까지 가는 데 성공한 건 이 당시에 일어난 숱한 반란들 중에서는 이 둘뿐이기는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반란이 안 일어난 것은 아니라서, 그 반란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고 넘어가자면...
먼저 선비족의 약라발능이 양주를 침공했다가 크게 박살나고 목이 달아납니다. 이 양주가, 그 독발수기능의 난이 일어났던 바로 그 양주거든요. 진이 멀쩡하게 굴러가(는 듯이 보였)던 삼국 시대에도 독발수기능의 난 때문에 크게 골치를 썩혔는데 거기가 또다시 시끄러워진 겁니다. 뭐 이 때는 금방 박살났지만(p. 441, 서기 305년)...
그리고 이번에는 진민(진나라 백성이 아니라 사람 이름입니다)이 강동 땅에서 크게 난을 일으킵니다(p. 451, 서기 305년). 생각보다 스케일은 컸는데 2년 만에 망하기는 합니다마는 이게 팔왕의 난이 끝난 이후의 일이므로 상세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삼가하기로 하죠. 하여간 이 진민의 난으로 오 땅이 전화를 입게 됩니다. 재미있는 건 진민이 평소에 자신의 실력을 믿고 나댔다고 하는데 진민의 아버지는 진민을 보고 이 진민이 우리 집안을 망칠 것이라고 근심하다 화병으로 죽었다는 것이죠.
또 산동성의 현령 유백근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자 현공이라 자칭하다가 금방 토멸당합니다(p. 459, 서기 306년).
자세히 보시면, 촉 땅에 유민들이 있던 게 몇천 명의 스케일이었고 그것도 떠돌아다니던 사람들을 이특이 끌고 와서 사병화하기 시작한 게 발단인데, 그 이후로 장창의 난, 약라발능의 난, 진민의 난, 유백근의 난 등을 보시면 어느새 스케일이 수만 명은 우습게 찍는 것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 시대의 백성들이 정부를 불신하고 고통 속에 신음하면서 미운 중앙 관리들을 몰아내고 우리를 구원해 줄 자를 찾자고 외쳤던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서진의 문벌 귀족들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었고, 그 돈은 모두 백성들을 쥐어짜내면서 얻어낸 것이었습니다. 외부의 위협도 위협이지만 모름지기 국가와 지배층이 백성을 제대로 대접하고 살게 해 줘야 백성들이 국가에 직접적으로든 심적으로든 반기를 드는 일이 없다는 교훈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일련의 민란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때 드디어 성도왕 이웅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역사가들은 이 이웅이 세운 나라를 가리켜 5호 16국 시대를 열어제낀 두 나라 중 하나인 성한(成漢)이라 합니다(나머지 하나는 물론 조한). 처음에 이웅이 국명을 정할 때 대성(大成)이라고 했고, 후에(338년, 4대 소문황제 이수) 한으로 개칭하면서 성한이라 한 것이죠.
그리고 이 때 드디어 팔왕의 난이 막을 내렸습니다.
정리
앞서 팔왕의 난을 정리하면 한 놈이 나대면 다른 놈이 죽이고 그 놈이 나대면 또 다른 놈이 죽이는 식의 순환이었는데, 여기에 지방의 사건까지 끼우면 이렇게 됩니다.
정권 탈취 → 지방 반란 → 잠잠해짐(그것이 손을 아예 못 쓸 판이 되어서이건 진압되어서이건) → 지배층 내분 → 정권 탈취 → 반복
중국 역사 최악의 혼란기라 일컬어지는 5호 16국을 열어제낀 것은 누구보다도 사마씨 그 자신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내부의 권력 싸움에 여념이 없는 동안 지방에서는 토색질이 일상화되거나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치력이 약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유민들이 발생했으며 이들을 바탕으로 난을 일으키고 그 난을 진압하면 내부적으로 내실을 다져도 모자랄 판에 또 자기들끼리 내분을 일으켰으니,
5호 16국 시대의 대혼란이 벌어진 책임은 누구보다도 완벽히 사마씨에게 있습니다. 팔왕의 난이 당대 백성들은 물론이고 그 후대의 백성들에게까지 끼친 해악이 이토록 큰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란이 일어났고, 이 민란의 규모는 앞서도 언급했지만 처음에는 수천 명이었다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으니, 이는 권력 싸움과 토색질에만 몰두하고 백성들의 비참한 실상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사마씨 그 자신들이 불러온 화였습니다. 그로 인해 서진의 사마씨들은 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가들에게 의해 단죄받고 세간의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가히 이를 가리켜서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의 표본이라 할 만하군요. 아니, 가정맹어호가 아니라, 맹호어부지가정(猛虎於不至苛政 - 사나운 호랑이도 가혹한 정치에는 이르지 못한다)이 맞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국어사전에서 정의하는 '가혹하다'라는 말은, 몹시 모질고 혹독함을 의미합니다. 꼭 고문을 하고 살해하고 약탈하고 백성들을 못 살게 굴어야만 모질고 혹독한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정치로 사람들을 비탄과 좌절에 빠뜨리며 모든 사람들이 하늘에서 백마를 탄 기사가 나타나 백성들을 구원해 줄 사람을 간절하게 바라는 바로 그 상황이 사람들에게 가장 모질고 혹독한 것입니다. 팔왕의 난은 지배층의 내분이 열전으로 격화된 전란이지만, 그 성격에는 권력 투쟁이 담아 있고, 그 배경에는 피지배층의 피와 눈물이 분명하게 서려 있습니다. 바로 그랬기에 여러 곳에서 벌어지는 민란에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가담하였고 또 손쉽게 선동당했던 것이죠. 지배층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에 사람들은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어떻게든 남으려고 애를 쓰려고 하다가 결국 거기서부터 통치가 무너지고 새 나라가 들어서는 대사건이 생겼습니다. 또 지배층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에 사람들은 지배층이 자기들을 죽일 것이라 쉽게 믿고 많은 반란에 가담하였죠.
지배층이 피지배층의 힘들고 아픈 것을 도외시하며 자기들의 밥그릇 싸움에 여념이 없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고 어떤 평가를 받게 되는지, 또 지배층이 무능력할 때 그것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재난으로 다가오는지, 현 시점에서의 정치라는 게 당장 우리는 물론이고 우리 후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우리는 이 팔왕의 난과 그 여파를 통해서 일련의 교훈을 얻을 수 있고, 또 그를 반면교사로 삼아 더욱 스스로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긴 글 읽으시느라고 고생하셨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자료출처
《자치통감》, 사마광 지음, 권중달 옮김, 9권 진(晋)시대 1, 삼화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