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6/05/25 13:46:39
Name 해먹이필요해
Subject [일반] 낯선 곳의 허름한 식당
몇 달 동안 지속된 야근과 주말 근무에 지쳐 도망치듯 5일 짜리 교육을 왔다.
배짱좋게 월~금 업무시간을 통째로 잡아먹는 그런 교육이다.
평소같으면 궁시렁궁시렁 댔을 부장님도 요즘 고생한걸 뻔히 아니까 말없이 용인해주었다.
오랜만에 반바지에 쪼리, 백팩을 메고 어슬렁거리니 너무 편하고 마음만은 대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강의 품질과 내용은 매우 만족스러웠고 기분 좋게도 6천원짜리 식권 5장을 받았다.
교육도 회사돈으로 공짜로 받고 밥도 공짜니 얼마나 좋은가? 하긴 그동안 내가 못받은 초과근무수당이 얼만데 이정도 사치는 부려야지.

첫번째날 점심시간이 되고 족히 30~40곳은 될법한 지하의 제휴 식당들을 어슬렁 거리다가
그냥 제일 가깝고 혼자서도 편하게 한 끼 때울 수 있는 김밥집에 가서 라면과 참치김밥을 먹었다.
둘째날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어 화려한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비빔밥과 콩나물국밥을 주메뉴로 하는 식당을 갔다.
지하로 내려오자마자 보이는 환상적인 입지와 군계일학처럼 빛나는 인테리어에 홀리듯 수많은 교육생들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식당은 넓었지만 사람은 그보다 더 많았으며 종업원들의 고함에 가까운 외침이 쉴새없이 내 귀를 따갑게했다.
사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혼자 오는 교육생들을 매우 능숙하게 테트리스 하듯 4인 테이블에 꽉꽉 밀어넣고 있다.
일면식 없이 혼자 밥먹으러 온 성인들이 한 테이블에서 밥 먹는 경험은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현대 사회의 쓸쓸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듯 각자 말없이 이어폰을 꼽고 남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그들의 스마트폰만 쳐다보며 식사를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넣고 있다.

세번째날, 오늘, 난 여유를 가지고 외곽의 제휴 식당을 둘러볼 생각으로 다시 어슬렁거렸다.
허름하고 좁은 식당들이 오밀조밀 몰려있는 그 식당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곳이 한 곳 있었다.
가장 허름하고 혼자 식사하러 오는 사람만 받겠다고 선언하듯 1인 자리만 8개 정도 좁게 붙여놓은 식당이었다.
주 메뉴는 "수제 등심" 돈가스+우동 세트에 라면/떡볶이 따위의 분식도 잡다하게 많이 취급한다.
한 눈에 보기에도 자리는 좁고 불편해보였고 당연히 청결 상태도 불량했으며 무엇보다 낡디 낡은 종이에
때가 많이 낀, 손으로 쓴 메뉴판이 압권이었다.

서울 한복판 큰 건물을 통째로 교육장으로 쓸 만큼 교육생들도 많고 근처 직장인들도 많이 찾는 이 지하식당에,
웬만한 곳들은 다 빈 자리를 찾기 어려울만큼 붐비는 이 곳에, 그 식당만은 한 명의 손님도 없었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메뉴판을 쳐다보고 있는데 족히 일흔은 넘었을법한 할아버지가 혼자 "식사하세요" 란 말을 작게 나에게 한다.
나도 모르게 "네" 하고 대답을 하고 앉아서 다시 메뉴판을 보는데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다.
돈가스 + 우동 세트가 7천원이라니? 물론 비싼 가격은 아니지만 여기는 30~40곳의 식당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지하식당가다.
근처엔 더 싸고, 더 맛있어보이는 식당들이 정말 많아보였고 무엇보다 공짜 식권은 1일 6천원이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가장 처음에 적힌 대표 메뉴를 믿어보자는 생각에 돈가스+우동+밥 세트를 주문했다.
할아버지가 느릿느릿한 손짓으로 돈가스를 튀기고 우동 국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이윽고 10여분이 지난 후 내 앞에 단촐한 돈가스, 우동, 밥, 김치, 단무지 구성의 세트 메뉴가 나왔다.
배가 꽤 고팠던 나는 먼저 우동 국물을 급하게 한 숟가락 떠먹었다.
아뿔사, 이건 도대체 무슨 맛이지?
뭔가 시큼하고 상한 냄새 같은 것이 단숨에 훅 올라왔다. 한 숟갈 떠먹었을 뿐인데 더이상 도저히 국물을 먹을 자신이 없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우동면을 후루룩 먹어봤다.
이럴수가, 이 맛은.. 냉장고에서 갓 꺼낸 우동면을 그대로 국물에 넣었는지 면이 매우 퍼석퍼석했고 미지근했다.
결국 그 집에서 가장 맛있는 반찬이라 확신한 김치와 단무지를 주로 먹으며 한 끼를 간신히 끝냈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할아버지에게 "잘먹었습니다" 라고 외치며 빈 그릇들을 건네주었다.

근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내일도 이 곳에 와서 식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Neanderthal
16/05/25 14:02
수정 아이콘
맛은끝내줬다는 의외의 반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켈로그김
16/05/25 14:02
수정 아이콘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 혹은 동병상련 같은게 느껴지네요;;
남 같지가 않아..;;
신동엽
16/05/25 14:35
수정 아이콘
아.. 어렵다
Tchaikovsky
16/05/25 14:44
수정 아이콘
생산성본부에서 교육 받으셨나요? 맛난식당 있으면 추천좀 부탁 드려요.~
해먹이필요해
16/05/25 15:40
수정 아이콘
네 맞습니다. 맛난 식당은.. 못 찾았습니다.
내일과 모레 저곳을 다시 간다면 맛집을 찾을 가능성은 제로겠네요.
본문의 돈가스집 궁금하면 한 번 가보세요(...)
맥주귀신
16/05/25 14:45
수정 아이콘
반전이네요
내일 왜 다시 그곳에 가게 될 거 같은지가 궁금합니다.
써니는순규순규해
16/05/25 15:09
수정 아이콘
서빙, 또는 계산대에 예쁜 여종업원이 있었다면?
해먹이필요해
16/05/25 15:33
수정 아이콘
주방(?)은 두 사람이 있기 힘들 정도로 좁아요. 할아버지 혼자 계십니다.
티이거
16/05/25 15:08
수정 아이콘
손녀가 이뻤나봐요
돌고래씨
16/05/25 15:19
수정 아이콘
도대체 왜 글쓴이는 맛도 없고 비싼 허름한 가게에 또 가겠다고 했을까?
그 이유를 3줄 이내로 서술하시오(4점)
해먹이필요해
16/05/25 15:38
수정 아이콘
시장경제 속 소비자는 감성적인 존재 아닙니까 크..
프랜차이즈 빵집이 더 품질좋고 저렴해도 일부러 동네빵집에서 사기도하고 그런거죠!!
16/05/25 15:42
수정 아이콘
의문의 가게인데 저도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묘한 글이네요 크크
그런데말입니다
16/05/25 15:44
수정 아이콘
본문의 글이 모든 정보를 담고있는거라면.. 글쓴이는 변태임에 틀림없습니다!
프랑지파니
16/05/25 17:00
수정 아이콘
생산성본부 같으다 하고 글을 읽었더니 맞군요 크크
저도 회사 교육으로 년에 한번은 가는 곳입니다
갈때마다 느끼지만 식당 메뉴들의 맛은 늘 그저 그렇더군요 (제 개인 입맛 기준입니다)
이쥴레이
16/05/25 17:44
수정 아이콘
감성이죠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5635 [일반] [축구] 2016 시즌 MLS 지정선수 연봉.TXT [8] 비타에듀5407 16/06/08 5407 0
65634 [일반] 최근 남초사이트 걸그룹 인기투표 [72] 달라이라마14297 16/06/08 14297 2
65633 [일반] YG 새 걸그룹과 7과의 관계 [37] 삭제됨7164 16/06/08 7164 3
65632 [일반] 지난 5년간 걸그룹 가온 연간 앨범차트 TOP 5 [18] pioren6025 16/06/08 6025 0
65631 [일반] [펌]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치즈코 초청 특별 강연 [110] 죽엽11410 16/06/08 11410 2
65630 [일반] 메피아, 박 시장의 대처와 2013년의 경고 [68] 쇼미더머니9151 16/06/08 9151 4
65628 [일반] 한화의 연승, 그리고 불펜진의 과부하 [145] 제르12038 16/06/08 12038 4
65627 [일반] 워크래프트 (2016) - IMAX 3D 시사회 후기 [43] 리니시아9796 16/06/08 9796 10
65626 [일반] 초록색, 빨간색, 그리고 파란색... [37] Neanderthal5790 16/06/08 5790 9
65625 [일반] [프로듀스101] 이해인, 이수현양 소식입니다. [58] LiXiangfei8725 16/06/08 8725 5
65624 [일반] 30대 여성이 노인을 마구 폭행했네요. [120] 릴리스13484 16/06/08 13484 4
65623 [일반] 연애는 어렵다.. 여자는 어렵다... [7] BlueSKY--9753 16/06/08 9753 25
65622 [일반] 독일 분데스리가 50+1규정과 예외 클럽에 관하여.. [9] 비타에듀9478 16/06/07 9478 2
65621 [일반] 현충일 특집 방송 속 하늘바라기 [4] 좋아요3928 16/06/07 3928 9
65612 [일반] [노스포] 우리들 보고 왔습니다. [1] 王天君3627 16/06/07 3627 1
65611 [일반] [프로야구] 올스타전 투표가 시작되었습니다. [28] 비익조5264 16/06/07 5264 1
65610 [일반] [I.O.I] 오늘의 아이오아이 소식 [64] pioren8344 16/06/07 8344 2
65609 [일반] 고종석 “전라도에도 강간 사건 잦다...다만 경상도 보다 드물뿐” [164] D.TASADAR17777 16/06/07 17777 13
65608 [일반] 젤리피쉬 측 "이달 첫 걸그룹 발표..김세정·강미나 합류" [252] ZZeta15846 16/06/07 15846 1
65607 댓글잠금 [일반] 여론 참여 심사 게시판에서 표결을 시작합니다 (6/7 ~6/8) [2] OrBef5312 16/06/06 5312 1
65606 [일반] 서울 메트로의 점수 평가 기준 [22] Leeka7855 16/06/06 7855 3
65605 [일반] 기본소득제의 활발한 논의를 위하여 [58] santacroce11774 16/06/06 11774 26
65604 [일반] (펌) 2016년 고등학교 투수들 볼스피드 자료 [35] B와D사이의C11982 16/06/06 11982 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