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동안 지속된 야근과 주말 근무에 지쳐 도망치듯 5일 짜리 교육을 왔다.
배짱좋게 월~금 업무시간을 통째로 잡아먹는 그런 교육이다.
평소같으면 궁시렁궁시렁 댔을 부장님도 요즘 고생한걸 뻔히 아니까 말없이 용인해주었다.
오랜만에 반바지에 쪼리, 백팩을 메고 어슬렁거리니 너무 편하고 마음만은 대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강의 품질과 내용은 매우 만족스러웠고 기분 좋게도 6천원짜리 식권 5장을 받았다.
교육도 회사돈으로 공짜로 받고 밥도 공짜니 얼마나 좋은가? 하긴 그동안 내가 못받은 초과근무수당이 얼만데 이정도 사치는 부려야지.
첫번째날 점심시간이 되고 족히 30~40곳은 될법한 지하의 제휴 식당들을 어슬렁 거리다가
그냥 제일 가깝고 혼자서도 편하게 한 끼 때울 수 있는 김밥집에 가서 라면과 참치김밥을 먹었다.
둘째날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어 화려한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비빔밥과 콩나물국밥을 주메뉴로 하는 식당을 갔다.
지하로 내려오자마자 보이는 환상적인 입지와 군계일학처럼 빛나는 인테리어에 홀리듯 수많은 교육생들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식당은 넓었지만 사람은 그보다 더 많았으며 종업원들의 고함에 가까운 외침이 쉴새없이 내 귀를 따갑게했다.
사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혼자 오는 교육생들을 매우 능숙하게 테트리스 하듯 4인 테이블에 꽉꽉 밀어넣고 있다.
일면식 없이 혼자 밥먹으러 온 성인들이 한 테이블에서 밥 먹는 경험은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현대 사회의 쓸쓸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듯 각자 말없이 이어폰을 꼽고 남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그들의 스마트폰만 쳐다보며 식사를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넣고 있다.
세번째날, 오늘, 난 여유를 가지고 외곽의 제휴 식당을 둘러볼 생각으로 다시 어슬렁거렸다.
허름하고 좁은 식당들이 오밀조밀 몰려있는 그 식당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곳이 한 곳 있었다.
가장 허름하고 혼자 식사하러 오는 사람만 받겠다고 선언하듯 1인 자리만 8개 정도 좁게 붙여놓은 식당이었다.
주 메뉴는 "수제 등심" 돈가스+우동 세트에 라면/떡볶이 따위의 분식도 잡다하게 많이 취급한다.
한 눈에 보기에도 자리는 좁고 불편해보였고 당연히 청결 상태도 불량했으며 무엇보다 낡디 낡은 종이에
때가 많이 낀, 손으로 쓴 메뉴판이 압권이었다.
서울 한복판 큰 건물을 통째로 교육장으로 쓸 만큼 교육생들도 많고 근처 직장인들도 많이 찾는 이 지하식당에,
웬만한 곳들은 다 빈 자리를 찾기 어려울만큼 붐비는 이 곳에, 그 식당만은 한 명의 손님도 없었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메뉴판을 쳐다보고 있는데 족히 일흔은 넘었을법한 할아버지가 혼자 "식사하세요" 란 말을 작게 나에게 한다.
나도 모르게 "네" 하고 대답을 하고 앉아서 다시 메뉴판을 보는데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다.
돈가스 + 우동 세트가 7천원이라니? 물론 비싼 가격은 아니지만 여기는 30~40곳의 식당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지하식당가다.
근처엔 더 싸고, 더 맛있어보이는 식당들이 정말 많아보였고 무엇보다 공짜 식권은 1일 6천원이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가장 처음에 적힌 대표 메뉴를 믿어보자는 생각에 돈가스+우동+밥 세트를 주문했다.
할아버지가 느릿느릿한 손짓으로 돈가스를 튀기고 우동 국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이윽고 10여분이 지난 후 내 앞에 단촐한 돈가스, 우동, 밥, 김치, 단무지 구성의 세트 메뉴가 나왔다.
배가 꽤 고팠던 나는 먼저 우동 국물을 급하게 한 숟가락 떠먹었다.
아뿔사, 이건 도대체 무슨 맛이지?
뭔가 시큼하고 상한 냄새 같은 것이 단숨에 훅 올라왔다. 한 숟갈 떠먹었을 뿐인데 더이상 도저히 국물을 먹을 자신이 없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우동면을 후루룩 먹어봤다.
이럴수가, 이 맛은.. 냉장고에서 갓 꺼낸 우동면을 그대로 국물에 넣었는지 면이 매우 퍼석퍼석했고 미지근했다.
결국 그 집에서 가장 맛있는 반찬이라 확신한 김치와 단무지를 주로 먹으며 한 끼를 간신히 끝냈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할아버지에게 "잘먹었습니다" 라고 외치며 빈 그릇들을 건네주었다.
근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내일도 이 곳에 와서 식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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