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한지 20년 쯤 된 샤프가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지게 된 샤프연필이였고, 다른 샤프를 안 써본건 아니지만, 이게 유독 내 손에 딱 맞았는지 신기하게도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한번은, 이사를 한 뒤 아무리 찾아도 그 샤프가 보이지 않았다. 이사를 하면서 흘렸겠거니 싶었고, 아쉽지만 결국 그 계기로 샤프보다는 볼펜을 더 많이 쓰게 되었다. 그리고 약 2년이 지나, 또 이사를 할 때 우연히 어느 오래된 가방 안에서 그 샤프를 찾았다. 신기하게도 난 그것을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다시 필통에 넣고 지금까지 쓰고 있다. 마치 한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는 듯이.
난 잃어버리는 것을 유독 싫어한다.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잠깐이든 오랜 시간이든. 그 누구와도 작별할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쉽게 허락하는 세상이 아니다. 사는 것은 원래가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며, 내 것이 맞았다면 결국 다시 만날 테고, 내 것이 더 이상 아니라면 보내줘야 하는 것이다. 다만 필통속 그 사프의 빈자리는 늘 그대로인채 채워지지 않았고, 그 사이에 내가 샤프를 새로 사는 일은 없었다. 어찌 보면 참 웃긴 이야기지만, 뭔가 그 샤프가 아니면 굳이 샤프를 쓰고 싶은 그런 마음이 없었다. 이젠 연필보다는 볼펜이 더 어울리는 나이가 됐기도 하고, 그 샤프가 아닌 다른 샤프는 나에게 익숙한 그 느낌이 아니여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볼펜을 썼다. 굳이 샤프여야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나이를 먹어갈수록, 이별에 점차 익숙해지는 것 같으면서도 그 씁쓸함은 배가 된다. 이별에서 무엇보다 가장 두려운 것은, 무언가가 떠나고 비워진 자리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이다. 과연 그 자리는 대체될 수 있을까? 만약 영영 대체될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뇌리를 스쳐가며 안그래도 부담되는 이별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만든다.
하지만 결국 그게 그만큼 중요한 것이였다면, 그 자리는 늘 비워져 있을 것이다.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그 자리는 늘 그곳에, 마음속에 존재할 것이다. 대학생 시절에 2년간 사라졌던 그 샤프는 어느새 내 필통 속으로 다시 돌아와 나의 직장 첫날을 함께하게 되었다. 회사 신입시절에 적은 노트도, 어느새 볼펜이 아닌 샤프로 기록되고 있었다. 나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함께했던 노트에도, 분명 이 녀석의 흔적이 가득했을 것이다. 만약 돌아오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런건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애초에 내가 샤프로써 쓸 필기도구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였기 때문이다. 사물에 너무 많은 감정이입을 한게 아닐까 모르겠지만, 어렸을적 가족이 같이 해외로 이주했을때 아버지가 나에게 사준 첫 선물이였던 이 샤프는, 그 뒤로 늘 부적처럼 나의 성장 과정과 함께했다. 그만큼 나에게 소중한 것이였다.
샤프는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아마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걸 너무나도 잘 알기에, 다른 무언가로 그 빈자리를 메워 볼 생각을 한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요새 들어서는, 그 빈자리가 굳이 채워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나에게 아버지와 같은 의미를 가질 사람은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였던 것이다. 모든 마음의 구멍이 메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채워진 것은 채워진 대로, 구멍난 것은 구멍난 대로 소중했고, 굳이 그 자리와 맞지 않는 것을 끼워넣을 필요가 없었다.
어제는 아버지의 기일이였다. 이젠 더이상 생각할때 괴롭다거나 그러지는 않지만, 이 날은 내가 결정적으로 이별이란 것을 싫어하게 만들어버린 날이기도 했었다. 앞으로도 많은 이들과의 이별이 예정되어 있고, 내가 짧게나마 모두를 떠나있어야 할 시간도 맞이해야만 한다. 그들이 내 자리를 남겨두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혹여나 나를 필요 이상으로 기다리지는 않았으면 하는 복잡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결국 나를 그만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라면 기다릴테고,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더 나은 행복을 찾아서 더 좋은 곳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 내가 할 일은 기다리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찾아가서 약속을 지키는 것과, 떠나간 이들에게는 새 삶을 축복해 주는게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딱히 이별이 두렵지는 않아졌다. 언젠간 다시 만날테고, 만나지 못해도 내 마음속에서는 그대로일 테니. 그저 이 마음을 이별 전에 더욱 많이 전해주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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