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인류가 만들어놓은 정치 체계 중, 가장 고도로 발전한 체계는 정당 민주주의입니다. 어떤 한 사람에게 권력이 쏠리지 않고, 이념공동체 또는 이익공동체인 하나의 정당이 권력을 가지게 되죠.
반면,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은 나라일수록, 권력은 한 사람의 영웅적 인물에게 쏠리게 되죠. 멀리 갈 게 없이,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짧은 역사였지만 3명의 독재자를 배출했고, 이중 2명은 장기집권에 성공하기까지 했죠. 심지어 장기집권에 성공한 두명은 "민선"으로 시작했습니다. 이는 유권자들의 정치적 의식이 발달하지 못해 강한 "지도자"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이념, 어떠한 정책이 아니라, 한 명의 백마탄 초인을 바라는거죠. 이 백마탄 초인이 이끄는 대로 하면 무엇이든 될 것이다! 하는 그런 마음가짐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선거때마다 나오는 "대통령감"이라는 단어가 좋은 예시가 될 겁니다.
사실 민주주의가 정착한 직후 초기의 정당이라는 것은 이념공동체라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소수의 영웅적 인물들이 힘을 모아 만드는, 오히려 운명공동체라고 보는 편이 나은 그런 "조직"이 민주주의 초기의 정당에 가깝죠. 다만 같은 이념을 가진 사람들끼리는 보통 같은 운명과 같은 이익을 공유하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어떠한 이념을 공동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조직에서 자연스럽게 리더가 등장하게 됩니다. 보통은 매우 뛰어나고 영웅적인 사람이겠죠. 초기의 영웅적 인물들 중에서도 리더가 되는 인물이니, 일반적으로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본인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고, "내가 이 세상을 만들어주겠다"고 공약을 하게 되죠.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한 것, 바로 보스정치가 여기서 나오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영웅주의적 정치라고 이 글에서 부르겠습니다. 이 영웅주의적 정치 하에서는, 보스가 정당을 규정합니다. 정당이라는 것은 이 보스의 뜻을 이루기 위한 집단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 이제 시간이 흐르게 됩니다. 이러한 보스가 어떠한 이유든 정계를 떠나고 나면, 남는 것은 조직 뿐이죠. 마치 엔진을 뺀 자동차처럼 되어버리는 겁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조직에서 새로운 리더를 선출하겠죠. 자, 여기서 갈림길이 생깁니다.
먼저, 이 조직의 리더가 이전의 리더와 같은 카리스마적 인물일 경우, 이 경우엔 이 조직은, 다시 말해 정당은 문제없이 돌아가게 됩니다. 물론 이 조직은 이전의 조직과 같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리더가 함량미달이라면? 이 경우에는 조직은 와해되겠죠.
전자의 경우를 우리는 생각보다 많이 봐 왔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나면, 대표를 바꾸고 재창당하는 수많은 케이스들 말이죠. 말하자면 예전의 "보스"가 가졌던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보스, 새로운 정체성을 갖고 조직이 다시 돌아가는 겁니다. 이게 우리가 봐왔던 재창당입니다.
후자의 경우 역시 많이 봐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정당들 중, 리더의 몰락과 함께 와해된 정당들이 있죠. 이러한 정당들은 리더 자체가 곧 정당이기 때문에 리더가 없는 정당은 존재 가치가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좀 더 시간이 흘러, 유권자들의 정치적 의식이 자리잡고 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 "조직"이, 한명의 보스가 아닌 무형의 "이념"에 기반하기 때문이죠. 유권자들이 바라는 세상, 다시 말해 유권자들이 본인의 강한 이념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권자들은 보스적 정치리더에게 피로감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보스적 리더들은 앞으로 "끌고가는"사람들이기 때문에, 원치 않지만 질질 끌려가는 느낌을 받게 되니까요.
이런 경향이 대세가 되면, 더이상 이 정당의 리더들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표출하기보단 본인의 "이념적 대표성"을 피력하게 됩니다. 내가 "너희가 바라는 정치"를 해줄테니 나를 뽑아달라고 말이죠. 이제 이러한 정당의 리더는 대표성을 가질 뿐이지, 더이상 정당 그 자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정당은 이념공동체이고, 그 이념 안에서 안정적인 지지율을 갖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웃라이어보다는 현명하고 조율적이고, 엘리트적인 사람들이 더욱 주목을 받게 되죠.
이 글에서, 현상을 저는 "시스템화"라고 이름붙이겠습니다. 이제 정당은 적확하게 하나의 이념공동체가 되어갑니다. 리더가 바뀐다고 해서 조직이 격변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시스템주의" 후보가 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스템주의가 발달한 형태라고 해도,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시스템주의 하에서 유권자들은 행동할 것을 요구받기 때문이죠. 마치 잘 맞춰주는데 자기 의견은 없는 애인마냥, 시스템주의 하에서는 유권자들은 지나치게 많은 정치적 행동을 강요받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굉장히 애먼 사람이 등장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피로감과, 안정된 체계의 모순이 쌓이게 되면 사람들은 다시금 이 상황을 깨부숴줄, 또한 유권자들을 "캐리"해줄 개혁적인 영웅을 바라게 됩니다. 또 한번 영웅주의가 부상하게 되는거죠.
이렇게 영웅주의와 시스템주의는 순환적이고 상보적으로 나타납니다. 어느 선거는 영웅주의가 대세로, 또 어느 선거는 시스템주의가 대세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죠. 특히 이것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건 바로 "대선"입니다. 그 정당의 리더가 곧바로 등장하는 선거이기 때문이죠.
영웅주의적 후보들은 일반적으로 입지전적적이고, 현명하기 보다 똑똑하며, 당보다 본인의 브랜드 가치가 높으며, 이념이 명백하지 않고, 언론 노출이 매우 잦고, 뚜렷한 리더십으로 정국을 주도하며, 팬과 안티가 극단적으로 나뉘게 되며, 당 내 반대파에 유념치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스템주의적 후보들은 엘리트적이며, 똑똑하기보다 현명하고, 당의 이름을 대표하며, 이념이 매우 명쾌하고, 필요한 만큼 언론에 노출되며, 정국을 주도하기 보다 조율하며, 팬과 안티를 가르기 어렵습니다. 또한 당내 여론에 민감하죠.
이 두가지는 민주주의가 어느정도 성숙한 나라에서는 무엇이 뛰어나다, 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그때 그때, 국민이 필요로 하는 것이 달라질 뿐이죠.
=============================================
이러한 관점에서 비추어 봤을 때, 지난 2012년 대선은 상당히 재미있는 분석을 할 수 있습니다. 민주당에서 내세운 문재인 후보의 경우, 현재는 몰라도 그 당시는 시스템주의적 후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입지전적적이지도 않으며, 순둥순둥한 이미지, 본인 계파에 본인 이름도 안 들어갈 정도로 패권과 거리가 멀었고, 이념적으로 명쾌했고, 언론 노출도 적었죠. 굉장히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인 시스템주의 후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대통령인 박근혜 후보의 경우, 보여주는 많은 모습들은 시스템주의적이라 할 수 있었죠. 쉽게 말해, 본인 자체의 브랜드가 아닌 "새누리당의 대표"라는 당 이념적인 성향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었거든요. 언론 노출도 심하지 않았구요. 아마 새누리당이 원한 모습은 이 쪽이 아니었을까요? 새누리당은 그 당시만 해도 확고한 지지를 바탕으로 이념적 시스템화가 잘 되어있는 정당이었습니다. 박근혜 전 대표가 거기에 공이 없진 않느니 만큼, 그러한 모습을 기대했다고 볼 수 있겠죠.
쉽게 말해 2012년의 대선은 시스템주의간의 싸움에 가까웠다고 저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런 선거는 재미가 좀 적지요. 어그로가 잘 안 쏠리니까요. 물론 굉장히 팽팽한 선거였습니다만, 소위 말해 "개싸움"이 일어나진 않으니까요. 보통 이런 경우엔 드라마가 잘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지가 않은 것이, 박근혜 후보는 반면 영웅주의적 성향도 굉장히 강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후보 자체의 성향보다는 후보에게 투영된 성향이 영웅주의적이라고 해야겠네요. 일단 박근혜 후보를 뽑은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은, 이러한 시스템주의적 성향이 아닌 "박정희"라는 영웅주의의 극단을 달리는 모습에 가까웠거든요. 그리고 매우 안타깝게도, 본인은 이러한 모습을 바란 모양입니다.
이러한 괴리는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 고스란히 실제 정치에 작용했습니다. 당을 대표하여 내보낸 사람이, 당을 자기 맘대로 주무르려고 했거든요. 하지만 이는 당청간의 강렬한 투쟁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가 바로 여러분이 보시는 지난 총선입니다.
이러한 시스템주의적 후보로 제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꼽는 사람은 1997년의 이회창 후보입니다. 당장에 이회창 후보는 영입인사였죠. 하지만 당을 장악한 이회창 후보는 2002년에는 영웅주의적 후보로서 대선에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당연히, 당시 노무현 후보는 대한민국에서 역대급으로 영웅주의적인 후보였습니다. 2002년은 영웅주의와 영웅주의간의 불꽃 튀는 대선이었죠. 그리고 역대급의 드라마틱한 선거 끝에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게 됩니다.
자 과연 다음 대선은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은 어떠한 후보를 원하시나요? 유권자의 뜻을 잘 반영해주는 사람, 그리고 유권자들을 잘 이끌어줄 사람 중 어느 쪽일까요?
==============================================
이제 이 글의 부제, "도널드 트럼프"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장문의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제가 봤을때 이성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이 "도널드 트럼프"라는 후보의 등장에 대해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최초로 대통령을 뽑았고, 세계에서 최초로 현대적 민주주의를 시행한 나라입니다. 민주주의는 성숙할 만큼 성숙했죠. 그런 성숙한 민주주의의 종주국에서 이런 미친 놈이, 무려 공화당의 후보? 라는 어이없는 상황이 생긴거죠.
위에서 시스템주의와 영웅주의의 순환에 대해 말했습니다. 미국에서도 이러한 시스템주의와 영웅주의는 계속적으로 순환하며 나타나고 있습니다. 최근의 사례를 들자면, 영웅주의적이었던 대통령으로 빌 클린턴 대통령을, 시스템주의적 대통령으로 조지 부시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들 수 있겠네요.
부시가?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부시 대통령은 공화당의 지도부의 입김대로 뽑혀나온 후보입니다. 그리고 부시 대통령은 임기 내내 대통령으로서 강렬한 권한을 발휘하지 못한 편입니다. 오히려 딕 체니 부통령이 실세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죠. 다시 말해, 본인의 당이 아닌 당이 내놓은 대통령에 가깝습니다. 부시에 대한 지지는, 사실 공화당에 대한 지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 본인 역시 카리스마적이고 훌륭하지만, 심지어 흑인이기까지 하지만, 이 분의 힘은 민주당을 넘지 못합니다. 굉장히 조율적인 정치를 하고 있죠. 민주당이 원하는, 민주당에 의한 대통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명의 시스템주의적 대통령의 임기를 합치면 20년입니다.
저는 이런 가정을 세웠습니다. 미국의 국민들은, 이제 이러한 시스템주의에 지친 게 아닐까?
미국의 국민들은 본인이 어떠한 것을 원할 때, 정당 활동을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본인이 소속된 정당에 요구를 하고, 경선에 참여하고, 후원금을 내죠. 이런 점이 물론 성숙한 민주시민의 자세이지만, 이러한 성숙한 민주시민이 되기에 이제 지친 게 아닐까 하는 점이죠. 정의의 사자 노릇도 지쳤다, 나 벌어먹기도 힘든데 하고요.
트럼프 후보는 굉장히 명쾌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하고싶은 이야기, 심지어 보통은 말도 못하는 얘기를 끌어내서 자기 입으로 마음껏 떠들어댑니다. 선거 슬로건도,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라고 만들었죠. 내가 너희를 좋은 세상으로 이끌어주마, 너희는 가만히 있어도 원하는 것을 해주마, 이렇게 말하고 있는겁니다.
트럼프 후보는 그야말로 영웅주의의 극을 달리는 후보입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데는 어떤 미사여구나 고민이 필요 없죠. 그냥 너 존나 짱이야! 라고 하고 뽑아버리면 그만입니다. 테드 크루즈와 루비오, 젭 부시 "따위"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공화당의 과거 이념에 맞는 사람이 우리 후보라고 강변하는 동안 법규나 먹어라! 라고 하면 그만인거죠.
이런 정치인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입지전적적이고, 현명하기를 거부하며, 당보다 본인의 브랜드 가치가 높으며, 이념이 명백하지 않고, 언론 노출이 매우 잦고, 뚜렷한 리더십으로 정국을 주도하며, 팬과 안티가 극단적으로 나뉘게 되며, 당 내 반대파에 유념치 않는 경향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누구보다 강합니다. 티파티가 뭐라고 씨부렁대든 나는 알바 아니다! 라고 하죠. 공화당의 전통적인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 아닌, 좌파적인 경제정책을 우수수 쏟아놓고 있습니다. 제가 써놓고도 이정도였나 싶을 정도네요.
이제 미국인들이 지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 20년간 공화-민주라는 양당 체계에 갖혀 있는 게 말이죠. 미국인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건 리버테리안이냐, 리버럴이냐의 두 가지 갈래밖에 없었거든요. 그동안 미국인들은 그 둘이 아닌 다른 선택을 갈망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소위 말해 가려운 등을 긁어주는 후보인거죠.
이는 반대로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 후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 역시 민주당이 걷던 길이 아닌 제3의 길을 제시한, 영웅주의적 후보에 가깝습니다. 일단 민주당식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도 아니거든요. 말하자면, 양 당에 영웅주의적 바람이 한번씩 불었고, 심지어 공화당은 그러한 바람에 날아가 버린겁니다.
물론 개인적인 전망으로 그렇게 지친 미국인들이 과반을 넘진 않겠죠. 이번에 트럼프가 당선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국의 정치인들이 이러한 바람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언제 또 트럼프와 같은 괴물이 등장해서 이번엔 정말로 대통령이 되버리는 일이 생길 지 모릅니다. 이 나라를 캐리해주세요! 라는 유권자들의 바람이 지속된다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