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강연에서 누군가가 과거를 회상합니다. 젊은 시절, 청년들은 바닷가를 뛰고 있습니다. 이들은 올림픽을 준비하는 영국 대표 선수들입니다. 그 중 한명인 해롤드 에이브라함은 패기만만한 유대인 청년입니다. 그는 캠브릿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700년동안 아무도 못해낸 일을 해냅니다. 종이 12번 울릴 동안 교내를 완주한다는 목표를 완수해낸거죠. 또 한명, 에릭 리델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선교사가 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재능과 달릴 때의 기쁨 때문에 종교적 삶에 귀의하는 걸 망설이고 있습니다. 이 두 명의 청년, 다른 전도유망한 청년들이 모여 1924년 파리 올림픽의 레일을 뛰기로 되어 있습니다.
오래된 영화니 올곧은 내용일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바른 생활 영화일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되려 신선했어요. 두 주인공 해롤드와 에릭은 정말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순수한 승부욕밖에는 없습니다. 이들은 뛰는 데 재능이 있고 그 재능을 최대한 살려 경쟁에서 이기려 합니다. 왜냐하면 잘 하는 걸 최고로 잘 하고 싶으니까요. 돈이나 명예를 위한 수단도 아니고, 이들의 라이벌 의식도 전혀 엇나가는 구석이 없습니다. 달리기라는 스포츠를 향하는 이들의 태도는 너무 경건해서 거룩해보일 정도죠. 심지어 해롤드의 절망에서도 영화는 상대에 대한 원망을 빼버리고 꿈의 좌절만을 이야기합니다.
따지고 보면 에릭에 비해 해롤드가 조금 더 현실주의자이고 욕망도 확연합니다. 해롤드는 성격이 살짝 모가 났고 고집도 셉니다.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인종에 대한 피해의식도 강하게 깔려있지요. 그에게 현실은 극복의 장이고 달리기는 그 수단에 가깝습니다. 인종의 장벽을 뛰어넘고, 자신이 최고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무기죠. 해롤드에게는 이 무기가 절실합니다. 그에 반해 에릭은 보다 밝은 이상주의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목적으로 뛰지요. 해롤드가 질 수 없다는 데서 원동력을 찾는다면 에릭은 이길 수 있다는 믿음으로 뜁니다. 그는 환경이나 성격도 그렇고 재능이나 경험면에서도 완성된 엘리트에 가깝습니다. 그런고로 이 두 캐릭터 중 해롤드에게 더 마음이 쏠릴 겁니다. 보다 인간적이고 결점도 많이 보이니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너무 완벽하게 구축된 에릭 리들이라는 캐릭터의 인간다움이 오히려 더 재미있긴 했습니다. 어차피 둘 다 재능과 노력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고 상류 계급에 속해있으니 이를 나누는 건 별로 의미가 없을 겁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최고라고 자부하던 이들이 서로를 의식하고 두 라이벌은 만나게 됩니다. 영화는 이 둘의 대결을 이야기의 분기점으로 삼는 듯 하다가도 다시 개인적인 성장에 그 초점을 맞춥니다. 정확히는 해롤드가 에릭의 경주를 보고 충격에 빠져서 그를 목표로 삼고 도전장을 던진거죠. 여태 진 적이 없던 해롤드는 굉장한 충격에 빠집니다. 대등할 것 같던 둘의 경주가 에릭의 완승으로 끝나는 것도 의외의 굴곡을 만들어내지요. 이쯤되면 이야기는 타도대상인 에릭보다 타도의 임무를 띈 해롤드에게 더 무게를 둘 것 같은데도 이야기는 계속 둘의 균형을 맞춥니다. 해롤드는 에릭에게 당한 패배를 계기로 사설 코치를 고용하고 더 열심히 훈련합니다. 설욕전이 목표이기도 하겠지만 더 근본적인 건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는 거죠. 에릭에게는 타인과의 승부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우수함으로 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게 유일무이한 가치입니다. 영화는 앞서 말했던 이들의 원초적인 목적을 계속 부각시킵니다. 질 수 없는 이가 패배 후 어떻게 뛰는지, 지지 않은 이가 어떻게 계속 이기려하는지를 이야기하죠. 잘 뛰는 두 인간은 무엇을 생각하며 각각 뛰었는가. 이를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다시 두 주인공을 병렬시켜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이 둘이 올림픽 출전 전에 맞닥뜨리는 장애물은 그렇게 거대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시점에서는 좀 갸우뚱할 수도 있는 문제들이죠. 사설 코치를 고용한 게 무슨 말썽이며, 오빠가 올림픽에 출전한다는 걸 신실한 동생은 왜 그리 못마땅해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에릭의 경우 안식일에 예선을 진행한다는 게 엄청난 걸림돌이 되지만 이 갈등 자체도 그렇고 해결되는 것도 살짝 맥이 빠지죠. 원래대로라면 같은 종목에서 다시 조우했어야 할 해롤드와 에릭이 서로 엇갈립니다. 영화는 클라이맥스에서 여러모로 예상되는 지점들을 비켜갑니다. 여기서 두 인물의 내면을 대결에 맞춰 진행했다면 더 재미있을수도 있었을텐데 영화는 모범생처럼 이들의 도전과 성취를 계속 이야기할 뿐입니다. 금메달이 걸린 경주 장면도 모든 극적 효과를 제거하고 살짝 심심하게 그려지지요.
그건 이 영화의 주인공이 두 인물도, 시대나 보편적 휴머니즘도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뛰는 순간의 역동성과 속도감입니다. 인간이 뛸 때 어떤 식으로 표정을 짓고, 근육은 어떻게 움직이며, 결정적 순간에는 어떤 움직임을 취하는지 관찰하는 데에서 가장 큰 재미를 주고 있습니다. 영화가 잡아내는 이들의 달리기는 질주라는 단어에 섞인 속도를 잘 구현합니다. 빠르고 위급해요. 슬로우모션으로 인물들을 잡을 때는 실제로 뛸 때 느낄 수 없는 현실 속의 힘과 탄성을 고스란히 화면에 담습니다. 팽팽하겨 당겨진 활시위가 손을 떠나면 그 누구든 화살이 어딘가에 꽂히길 기대하게 됩니다. 달린다는 행동을 잡은 카메라는 달리는 이들, 특히 해롤드와 에릭이 가장 먼저 결승점에 도달할 걸 응원하면서 보게 만들어요. 전 해롤드가 처음으로 보는 에릭의 경기가 가장 짜릿했습니다. 역전이 불가능한 상황과, 이를 극복하는 에릭의 달리기는 뭔가 초월적인 느낌마저 들더군요.
요즘 영화처럼 뭔가 불완전하거나 솔직한 욕망들이 뒤엉키는 영화는 아닙니다. 모범생들이 승리를 위해 달리고 또 달리는 영화죠. 그만큼 우직하고 정갈합니다. 유명한 ost도 실제로 들으면 느낌이 달라요. 달린다는 것이 얼마나 상쾌하고 시원한지, 그리고 그 단순한 움직임이 인간을 어디까지 성장시키는지 보는 것도 나름의 위엄이 있습니다. 올림픽을 소재로 한 영화지만 영화는 오히려 지극히 개인적인 신념을 고수하는 두 주인공을 통해 민족주의의 함정도 잘 비켜가고 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땀을 흘리며 기어이 해내고 만 그 순간의 고양감을 위해 열심히 달리는 이 필름에 공감할 여지가 많을 겁니다.
@ 에릭의 우스꽝스러운 달리기 폼이 묘한 리얼리티를 주더군요. 사람이 전력을 다해 뭔갈 하면 자연스레 탈력이 되지요.
@ 대한극장 A열은 앉아서 볼 좌석이 안됩니다. 목 부러지는 줄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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