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徒勞無功
장자(莊子) 외편 제14 천운(天運)에서 유래.
무리들이 노력하나 공이 없다.
헛되이 수고만 하고 공들인 보람이 없음.
소련군은 충분히 12월 전반기의 승리에 자부심을 가질 만했습니다. 우선 전장의 상황이 크게 바뀌었죠. 그간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줄곧 뒤로 밀려나기만 했던 소련군에게 있어 이번 승리는 처음으로 주도권을 자기가 잡게 되는 중요한 승리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무적이라는 독일군의 신화에는 금이 가는 정도가 아니라 숫제 먹칠을 하고 있었고, (소련군이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것은 이제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으며, 수도에서 불과 수십 km 떨어진 곳에서 아웅다웅하고 있던 적을 상당히 뒤로 밀어냈기 때문에 더 이상 수도의 안위에 급급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제 소련군의 턴이 온 것이죠. 주코프는 이 여세를 몰아 중부 집단군을 태풍 작전 이전의 뱌지마 선까지 밀어붙일 심산이었죠.
말이 뱌지마 선이지 이게 사실 독일군이 위치하고 있던 최전방인 모자이스크(Mozhaisk)에서 뱌지마까지만 해도 130 km 가량(대략 서울에서 청주까지의 거리)이거든요. 보통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탁상 위에서 펜대만 굴리는 장군과는 달리 주코프는 레닌그라드에도 파견되어 보고 할힌골 전투도 경험해 보고 사령부에도 있고 등등 하여간 그 당시 소련군 장성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여러 분야의 경험이 많았던 역전의 용사였고, 그런 만큼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침 상황이 나아진 모스크바의 수비 병력까지 동원해서 공격할 심산이었습니다. 더 아싱 모스크바에 대부대를 박아두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죠.
수도방위군의 일부를 공격에 동원하는 판단 자체는 합리적이었습니다. 마침 지독한 강추위(기록이 영하 42도였다는군요...!)로 인해서 독일군이 자랑하는 루프트바페가 거진 마비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죠. 이는 적의 병력과 주요 시설을 분쇄하기 위해 항공 지원에 어느 정도 기댔던 -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를 보면 아시겠지만 독일군이 공격할 때 적 전차를 상당수 때려잡은 게 루프트바페였습니다 - 독일군이 공격을 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여겼던 근접항공지원이 없다는 의미였고, 따라서 독일군의 공격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하긴 뭐, 꼭 루프트바페가 아니더라도 독일군의 공세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기도 했구요.
그 결과 이런 대부대가 준비됩니다.
보시다시피 무려 14개 야전군에 제1근위기병군단(아래에 1 Γв. KK라고 되어 있는 것인데, 제2기병군단이 개칭된 겁니다)까지 포함된 대부대였죠. 이에 맞서는 독일군은 단 4개 야전군. 물론 그 중 2개의 야전군이 제3기갑집단과 제4기갑집단, 다시 말해 독일군의 주력부대기는 했는데, 엄청난 강추위와 지속적인 전투로 인해서 독일군의 힘이 많이 약화된 건 사실이었습니다. 주코프는 이 공세로 적의 주력부대를 포위 섬멸 박살낼 심산이었고, 공세를 개시하면서 필승을 다짐했겠죠(안 그럴 장군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한편으로 독일군은 겉으로 보기에 병력이 서로 밀집해 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안정되었으리라고 추정할 뿐이었습니다. 전쟁 기간 내내 독일군의 아킬레스건으로 통한 것은 바로 독일군의 첩보 능력이었죠. 이미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최전방에 있는 사단 수까지는 제대로 예측해냈으나 후방 동원 능력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던 독일군으로서는, 이런 정보의 부재는 눈에 띄지는 않지만 심각한 한 문제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당시 첩보부대였던 아브베어(Abwehr)의 수장인 빌헬름 카나리스(Wilhelm Canaris) 제독이 반나치 인사였기 때문에 독일군의 첩보능력이 떨어진 게 아닐까 싶긴 합니다. 뭐, 결과적으로 인류를 위해서는 다행인 일이겠습니다만... 여담으로 카나리스 제독은 1944년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여되지는 않았으나, 사건의 당사자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반나치 단체인 "검은 오케스트라"를 이끌던 일종의 정신적 지주였던 터라 결국 히틀러의 손에 걸려들어서 1945년 4월에 처형됩니다.
여기에 앞선 글에서 밝혔듯이 히틀러는 자꾸만 군부대에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 가는 상황이었습니다. 히틀러가 예전의 한스 폰 젝트나 힌덴부르크처럼 고위 장성이고 역전의 장군이라 전쟁을 이끌 만한 능력이 되는 사람이었으면 또 모르겠으되, 보헤미아의 상병 따위가 어딜..
그나마 북쪽은 그런대로 촘촘하게 병력이 배치되어, 제법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남쪽이었죠. 이런 상태에서 소련군의 진군을 그대로 들이받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래서 독일군은 히틀러의 지시를 뭉개 가면서 조금씩 뒤로 한발짝 한발짝 물러납니다. 공세가 진행 중이었음에도 소련군은 이러한 독일군의 후퇴에 상대적으로 둔감했고, 독일군이 후퇴한 걸 알아차리고 급하게 쫓아갔을 때는 이미 때가 늦은 경우가 왕왕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독일군의 전선은 완전 붕괴라는 치명적인 결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요소는 당연히 대공세를 퍼붓던 소련군의 발목을 붙잡았고, 주코프로서는 짜증나는 상황일 수밖에요.
어쨌든 포위 섬멸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씩 밀어낸 결과, 열흘 후에는 상황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사실 시원치않은 전과였죠. 무려 14개 군을 동원하여 공세를 퍼부은 것치고는 전과라고 할 만한 게 빈약한 수준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는데요, 북쪽에서 공격해 갔던 이반 코네프의 칼리닌 전선군이 독일군의 숲지대를 이용한 방어에 가로막힌 것이 컸습니다. 독일군이 자주 써먹었던 것처럼 소련군 역시 제9군, 제4기갑집단, 제4군을 남북 양익으로 포위하여 섬멸하고자 시도했는데, 쉽게 말해서 북쪽에서부터 들어오던 칼날의 이빨이 나가버린 셈입니다. 당시 제9군을 맡고 있던 장군은 아돌프 슈트라우스(Adolf Strauss)였는데, 아무리 울창한 삼림지대라서 방어하기 좋다지만 이걸 어떻게 막냐고 투덜대기도 했다는군요. 어쨌든 북쪽의 공세가 실패로 돌아간 덕에 독일군은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모스크바 남서쪽에서의 공세인데요, 날짜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뭐 결과적으로 나중에 밀려나는 지역이긴 한데, 거의 일 주일 정도 공세를 지속했는데도 딱히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북쪽이야 워낙 대부대가 몰아붙인 터라 조금씩 뒤로 무르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위쪽이 밀려난건 그렇다쳐도, 모스크바 남서쪽에서 개시된 이 공세는 정말로 이렇다할 결과를 전혀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헛심 썼죠. 다만 이 시기쯤에 페도르 폰 보크가 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데, 이 중부 집단군 전체를 지휘하는 사령관에 제4군을 맡고 있던 귄터 폰 클루게가 영전하면서 새로 제4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산악대장 루트비히 퀴블러가 히틀러와 대판 싸웁니다. 소련군 제33군과 제44군의 공격으로 인한 공세를 막을 만한 여력이 되지 않는다고 말이죠. 가뜩이나 약화된 병력으로 뭘 어떻게 막느냐는 건데, 여기에 더해 지독한 날씨와 소진된 병력으로 인해 반격할 만한 여력조차 없었다는 것이 문제의 심각성을 더했습니다. 그래서 모스크바 측선이 한 차례 간신히 잘 유지된 것이 "운의 영역이었다"고 로버트 커추벨 미 육군 예비역 중령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평으로는, 주코프가 약간 성급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도 듭니다. 병력을 동원함에 있어서 그 적절함은 확실히 명장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기본적인 작전에 헛점이 있었다고나 할까요? 저건 말하자면 적의 방어선에 아군의 병력을 들이붓겠다는 의미인데, 약한 곳과 약한 곳을 찔러서 후방으로 밀고들어가 허를 찌르는 것이 아니라 강한 곳에다가, 심하게 과장해서 말하면 "꼬라박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뱌지마는커녕 모자이스크조차 탈환하지 못하고, 조금씩 뒤로 밀어낸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죠. 주코프가 기획했던 이 대규모 공세는 그렇게 큰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고 일단 한 차례 멈추고 맙니다.
독일군 입장에서, 오히려 문제는 남쪽에서 터졌습니다. 그래도 주코프는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 자신이 무엇을 얻어가야 할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주요 철도 결절점인 칼루가를 지독한 전투 끝에 탈환해낸 것입니다. 이건 지도를 직접 봐 가면서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군요.
Openstreetmap에서 가져온 2018년 현재의 모스크바 인근 철도망입니다. 역시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1941년도의 지도와 큰 차이가 없어서 그냥 쓰구요. 거기에 점선으로 대강 선을 그어놓은 것이 독일군과 소련군의 경계선입니다. 칼루가의 북쪽으로 하여 제4군의 주력부대가 위치해 있었고, 그 위쪽에 제4기갑집단, 더 북쪽으로는 제3기갑집단이 있었습니다. 이 제4군의 주력부대에 보급을 하는 독일군의 보급기지는 남서쪽의 도시인 브랸스크(Bryansk). 오늘날에도 40만 명이 거주하는, 꽤 규모가 있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 점선으로 표시해놓은 부분을 제1근위기병군단과 제10군이 점령하면서, 브랸스크와 칼루가를 잇는 보급망을 끊어버렸습니다. 이거 되게 큽니다. 우선 제4군은 소련군의 주력부대를 받아내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보급선이 끊어지면서 제4군에 보급물자를 전달할 보급로는 브랸스크에서 일단 북쪽으로 뱌지마까지 올라간 다음 남동쪽으로 방향을 홱 틀어서 수송하는 길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쯤되면 차라리 제4군보다 더 북쪽에 있는 기갑집단에게 보급하는 게 더 쉬운 지경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었죠. 더 큰 문제는 포위 섬멸당하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남쪽의 방어선에 엄청난 구멍이 뚫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뜩이나 14개 군단이 배치된 북쪽에 비해서 거의 비슷한 길이의 전선에 고작 6개 군단만 배치된 남쪽의 방어선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는데, 중부 집단군의 후방으로 통하는 길이 열려버린 셈이었으니 만일 북쪽에서의 공격이 성공했다면 그야말로 4개 군이 포위 섬멸당할 판이었죠. 그 중 2개의 독일군 최정예 최중요 군인 기갑군이니만큼 독일군으로서는 대 위기인 상황이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만일 코네프의 공격이 성공했다면. 그나마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주코프도 남쪽의 공격에는 4개 야전군만 동원한 터라(북쪽에는 10개 군) 전선이 한 방에 도미노처럼 우루루루 무너지는 사태는 면했습니다.
이 시기의 전장 지도를 보면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습니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가 전선인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독일군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소련군인지 감조차 잡기 어려울 지경이죠. 일단 이 때는 남쪽에서 소련군이 꽤 큰 구멍을 만들어냈다, 이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남쪽의 구데리안으로서는 꽤나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애초에 후퇴를 할 때는 최대한 빨리 후퇴하여 적의 공격을 뿌리치고 병력을 재정비한 다음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그러나 구데리안은 툴라에서 후퇴하면서 적을 뿌리칠 만큼 충분한 갭을 만들 수가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방어선을 구축할 병력이 부족하고 한 군단이 담당해야 할 전투구역이 지나치게 넓어지자 소련군의 공격으로 인해 방어선이 뚫리는 결과를 불러온 것이죠.
아까 위 지도를 자세히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그 결과가 바로 이겁니다.
이 돌출부를 보니 실감이 가시는지요. 마치 딱따구리가 나무에 부리를 들이대는 것처럼 크게 구멍을 내는데 성공했고, 이런 상황에서 툴라 인근을 지킬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상황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툴라 쪽은 이렇게 죽죽 밀려납니다. 그나마 독일 공군들이 적의 공세를 최대한 늦추고 전차들을 박살내준 덕분에 중부 집단군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최악의 상황은 면했습니다. 지독한 추위에서 거의 마비되다시피한 독일군의 항공기도 어떻게든 상황이 되기만 하면 지체없이 바로 발진했고, 그게 중부 집단군의 전멸을 막아내는데 큰 도움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한창 병력을 쏟아부은 소련군의 진격도 영 지지부진하고 이렇다할 전과가 없었습니다만(남쪽 제외), 밀려났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경기를 일으키는 보헤미아의 상병인지 하사인지 하여간 그 못난이는 길길이 날뛰며 희생양을 찾았습니다. 사실 방어할 상황 자체가 아니었는데, 앞서 지적했다시피 독일군이 담당한 전투구역이 너무 넓어서 아군간의 간격이 심하게 멀었고, 그 틈새를 소련군이 잘 찌르고 들어와서 칼루가가 박살나고 이 측선대로 소련군이 밀어붙이면 뱌지마는 물론이고 심지어 스몰렌스크의 안위조차 장담할 수 없었거든요. 그런 상황을 히틀러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구데리안이 해임됩니다. 이 시기에 히틀러는 브라우히치와 할더의 사표도 수리하고 자기가 육군을 지휘하기 시작하죠. 제2기갑집단의 지휘권은 제2기갑집단 남쪽에서 싸우던 제2군의 기갑대장 루돌프 슈미트(Rudolf Schmidt)가 겸임하게 되어, 한동인 이 제2기갑집단과 제2군은 슈미트 군집단(야전군의 상위, 집단군의 하위)으로 개편됩니다. 1월 15일에 가서야 제2군을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가 이임받게 되죠.
양군은 이런 상황에서 신년을 맞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