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슬기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이라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강론을 번역해서 옮겨 적고 주석달고 하시면서
페북에서 전하는 신부님입니다.
어떤 책이 나왔는데 그 책을 소개하면서 신부님 나름대로의 생각을 적으신 글귀들이 '종교, 신앙'을 떠나
서로 인간관계 상호관계 등에 대한 좋은 내용이 있는거 같아 전합니다.
-사실 반 정도만 이해하고 반의반 정도는 감을 잡고 나머지는 알쏭달쏭해서 댓글로 크크 이해완료하기 위한 펌글입니다.
가톨릭 신앙, 그리스도교..성당, 교회 이런거 관계없는 분들도 읽어보실만한 글 같기도 하고,
또 그분들의 철학적 가르침 한수 받기위해 좀 얍샵하지만 옮겨적습니다.
(넓은 도량으로 품어주시길요^^;)
사실 처음 제목을 정할 때에는
‘오늘처럼 하느님이 필요한 날은 없었다’ ‘오~ 하.필!’이 아니었습니다.
본래 생각했던 것은 ‘오늘처럼 그대가 필요한 날은 없었다’였죠;;;
- 근데 원래대로 했으면 ‘오 하필!’이 안되었을 테니 이 또한 출판사 팀의 캬~ 신의 한 수 ^.~ -
하여 여기서의 ‘그대’는 하느님도 되지만,
역으로 하느님께서 바로 ‘나를’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는 점도 중의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더랬습니다.
실상 교황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절반은
하느님께서는 ‘나와 우리를 통해서’ 활동하신다는 내용이니까요.
거창한 기적이나 신기한 이적으로써가 아니고 말입니다.
결국, 나만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도 나를 애타게 찾으시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이렇게 상호적이지 않은 관계란 도통 없을 듯합니다.
제 아무리 좋은 관계라도 일방적이기만 하다면 쉬이 끊어지고 말 일인 거죠.
쉽게 말해 마냥 주기만 하는 것도, 마냥 받는 것도 편하지는 않으니까요.
이에 한 걸음 더 들어가 봅니다.
‘관계’ 그것도 ‘상호적인 관계’란 무엇인가 하고…
그러면서 문득 우리는 “‘나’가 아닌 ‘너’”를 만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너’가 아닌 ‘나’”가 순서상 맞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남과 접촉, 아니 그것을 가능케 하는 ‘너’의 존재가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나’란 존재는
도무지 느낄 수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하여, 굳이 개념화해보자면, 존재론적으론 설령 ‘나’가 우선일 수 있어도,
관계론적이고 인식론적으로 볼 때에는 ‘내가 아닌 너’가 먼저인 셈입니다.
- 사실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언제나 내 눈앞에 있는 사과를 먼저 알아차리고
그 다음에서야 그 사과를 보고 있는 나를 알게 됩니다.
나는 먼저 어떤 음악을 듣고,
그 다음에야 그 음악을 듣고 있는 나에 대해 시선이 가죠
곧, 우리가 ‘나’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언제나 ‘내가 아닌 무언가와의 관계 속에서의 나’만을 알게 될 뿐입니다.
심지어 오로지 순수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고자 해도
그 때의 ‘나’ 역시 어떤 의미에서 이미 대상화되고 타자화된 ‘나’라는 점에서
이미 한 번 ‘너’로서 반추된 ‘나’인 거죠 –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데카르트는 너무도 실험실적으로 생각한 셈입니다;;
그는 ‘회의와 의심’ 그 자체가 가장 근본적인 시작점이라고 여겼지만
실은 그런 회의와 의심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회의와 의심이라는 점에서
보다 근원적인 것은 ‘내가 아닌 무엇인가가 있다’는 그 사실일 테니까요.
네, 회의와 의심이라는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라도 그 무언가가 있어야만 하는 거죠.
설령 그것이 허상이고 나의 착각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더불어 이런 점에서 모든 사유의 중심을 그런 회의의 주체인 ‘나’로 끌어온 것도
다시 생각 해 볼 일입니다.
곧, 모든 사유의 중심은 ‘나’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나’를 알게끔 하기 위해서라도
‘(나 아닌) 무언가 있다’는 사실에 방점을 두어야 하는 거죠.
그리고 이 점은 꽤 중요합니다.
사유의 시작을 내 머리속의 생각에서부터 잡을 것인지,
아니면 내가 아닌 존재의 인정에서부터 시작할 것인지 말입니다.
…갑자기 왠 철학타령인가 할 수도 있겠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문제들을 대체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가? 라는 물음 앞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는 분명 ‘관계성의 회복’이 될 수 있겠는데…
그 온전한 관계성을 위해서는 바로 저러한 ‘나’ 중심의 생각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이는 그저 당위로서가 아니라,
이치를 따져보아도 그것이 맞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거구요. ^^
네, ‘나’란 존재는 어디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내 주변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나 혹은 사건이든 간에 말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나요? 배려와 칭찬 응원을 받으며 꼴을 갖추는 것과
비난과 무시 속에서 자라는 것이 같을 수는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있는 것들은, 특히 사람은 그 자체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와의 관계 속에서 되어가는 것이죠.
물론 그렇다고 ‘나’가 일방적으로 주위의 영향만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그대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대는 꽃이 되었다’는 시구처럼^^
그렇게 ‘만들어지는 나’ 역시 또다시 의미를 지어주며 주변을 만들어 가니까요.
하여, 다시 ‘오늘처럼 그대가 필요한 날은 없었다’에 머물러 봅니다.
그러면서 ‘나’를 만들어가는 수 많은 주변의 것 가운데 하느님이 계시다는 건 정말 행운입니다.
왜냐하면 관계가 관계의 당사자들이 누구인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때,
그 한 쪽 주인공이 하느님 신이라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일테니까요^^
네, 그래서 오늘날처럼 하느님이 필요한 날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오늘날처럼 하느님께서 나를 우리를 그토록 필요로 하는 날도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는 걸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요한 15,16]
그러므로 하느님과의 관계는 결코 일방적일 수 없습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런 하느님은 우상일 뿐이죠.
마냥 무언가를 주기만 하는 램프의 요정 지니이거나
무조건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폭군으로서의 이방신 말입니다.
이에, 준비되셨나요?
적당히 밀당도 좀 하면서 알콩달콩 하느님과의 관계 속으로 빠질 준비^^
그런 하느님과의 사랑으로 내 옆의 사람들과 세상에도 애정 어린 눈길을 줄 준비 말입니다.
오~ 하필! 오늘처럼 하느님이 필요한 날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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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성당을 다니지만 성당 사람이 아니어도 충분히 생각해봄직한 글이네요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개x마이웨이, 내 행복이 우선, YOLO 등등..여러 유행어들이 함의하는 내용들은 내 삶에서 상대를 배척하고 성을 쌓는 행위들인데 전 그것이 상처 입지 않기 의한 방어기제가 아닐까 란 생각을 해요
관계를 통해 힘을 얻어야 하는데 서로 피곤함을 느끼고 그러다 보니 내가 행복할 길은 내 혼자 있는 것이다 라고 느끼는게 아닌가...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상호호혜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관계형성이 다시금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길 바랍니다만 요원해보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