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bbc.com/news/stories-47033704
꼰대부장은 애국자가 되어서 나라를 걱정하곤 했다.
그의 불타는 애국심은 젊은 세대들을 향한 비판으로 흘러갔는데,저출산 이야기는 그가 좋아하는 안주거리 중 하나였다.
외동으로 자란 요즘세대는 자신 밖에 모르는 존재라서.
도전 정신을 가지고 자녀를 낳을 생각을 안하고 놀기 바쁘다는 것이다.
피끊는 청춘이였다면 그 소리를 듣고 거품을 물며 득달같이 달라들었겠지만,분기탱천한 그 모습이 도리어 서글프게 느껴지는것은. 그가 소위 말하는 기러기 아빠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어쨌건 술자리 비용은 그가 전담해서 내주기 때문인기도 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말하지 않아도 자식을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을, 우리는 공유하고 있었다.
아직 나는 결혼을 안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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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부터 명절이 좋았다.
많고 많은 친척들이 왁자지껄하게 술판을 벌이고
용돈을 두둑하게 주는것이 그랬다. 부엌에서 고생하는 엄마를 제외한다면 참으로 화목한 풍경이었다.
외동인 나에게는, 그 순간이 유일하게 형과 누나를 친근하게 불러볼 기회이기도 했다.
나는 친척이 많았다. 우리 부모님들은 다들 형제가 많았다. 그때는 그랬다. 하나만 낳아 키우기엔 너무도 각박한 시절이라서,
집안의 대를 잇기위해서는 여러명을 낳아야 안심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가난했다지만 그때는 지금 관점에서는 이상적이라고 할정도로 대출산인 시절이었다.
가난이 죄랴,
누구는 학교에 보내고 못가고, 누구는 새옷을 입지만 누구는 몰려받을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이 없었다지만 분명히 이쁜 손가락 ㅡ 대게는 장남이었을 ㅡ 이 존재했었다. 그건 분명 집안에 한명이었고, 우리 부모님은 둘 다 이쁜 손가락이 아니었다.
사람은 자신이 누리지 못했던 것을 자식을 통해서 풀어내려고 하는게 아닐까. 부모님들은 형제 자매들 속에서 겪었던 차별과 아쉬움을 경험한채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외로움을 감수하고 부모님의 모든 사랑과 지원을 독점하며 내가 태어났다.
그러나 빈곤한 집안이 아니였음에도, 사랑의 부족함을 느낀적은 없었음에도 경제적인 많은 제약들이 나를 갑갑하게 했다. 일평생 외로움보다. 상대적인 빈곤함이 더 고통스러웠다. 딱히 내가 사치스러운 편은 아니였는데
주말 예능에 나오는 자상한 아버지가 되는건 엄두도 안낸다.
평범한 수준으로 발걸음을 맞추고 싶은데,. 평범한 집 한채나 자동차나 여행이나 외식 같은 것들이, tv속에선 당연하게 이야기하는 일상이 나에겐 불가능할 지경이라.
내가 과연 "서울 상경"이라는 부모님의 성과같은 기적을 이룰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니, 집은 살 수 있을까.
하아, 등록금이고 학원비고 나발이고 삼성 주식만 샀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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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은 견디기 힘들었다.
친구의 병문안을 다녀온 날 이후로 내내 그랬다.
다행히 친구는 멀쩡해 보였지만.
전문 재활병원이라는 그 병원의 복도 한켠에는 휠체어들이 빼곡히 나란히 서있었다. 휠체어 사이사이. 6인실 병동을 스쳐지나갈때마다 보이는 것은 모두가 노인들이었다.
누구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서 소리를 지르고 누구는 삐걱삐걱 거리며 걸어다녔고 누구는 그냥 멀쩡해 보였다. 약품냄세와 복도끝에 있는 전자레인지에서는 알수 없는 음식냄세가 뒤엉켜 병실내 tv 소리에 섞여들었다. 상대적으로 어린 친구의 병실에 간병인들은 모두가 조선족이라서, 중국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소리가 생소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치매인것인지 아닌지, 그저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는 옆자리 할아버지를 보면서, 내 부모가 보였고, 내 자신이 보였다.
"그래도 여기는 시설이 좋은 편이야"
라며 같이 병문안을 갔던 또다른 친구가 이야기 했다.
그때 건너편에서는 노인 한명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이 익숙한듯 조선족 간병인은 노인의 목에 뚫인 구멍에 호스를 넣고 가래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어떤 곳은 한 병실에 20명도 넘게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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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가 힘들고. 자녀를 키우기가 힘들다.
그것을 넘어서 내 존재 자체가 하나의 짐덩어리 처럼
자녀의 발목을 잡는 순간이 생길지도 모른다
나중에 내 자녀가 병든 나를 간병한다고 인생을 허비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그러나 아픔없이 죽는 방법은 허락되지 않았다.
몸을 이끌고 죽기 쉬운 직업을 선택해서 사고를 당하거나
커다란 질병에 걸려서 병원에서 죽는것이 아니라면
어느날 인생을 만족하면서 '그래도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며 즐거워하면서 잠이 들고 다음날 죽은채로 발견되는것은 소설 속에나 나올 일이다.
나는 노쇠해질것이고. 고집이 강해질 것이고, 허약해질것이다.
나아질리 없는 통증을 안고 고통에 못이겨 짜증과 성화를 부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치매에 걸린채 아무것도 모른채 이리저리 방황하는게 행복한 미래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좋은 요양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충분한 자금을 모아놓았다면 말이다.
일본에서는 노인들이 자발적으로 교도소를 가는 일이 벌어진다고 한다. 친구들도 죽어버리고 자녀들도 외면해버린 노인들에게 교도소는 오히려 밥도 주고 건강관리도 시켜주고 친구들도 있으니 그만한 공간이 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분명 운에 좋은 케이스에 속할 것이다.
고독한 죽음을 맞는 노인들에 대한 뉴스는 나오지도 않으니까.
교도소와 병원,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단칸방
그리고 우리집 침대
그렇다면 나의 마지막은 이 중에서 어느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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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만 있다면 자녀를 낳고 싶다.
키울 수만 있다면 자녀를 키우고 싶다. 행복하게.
가난과 고난이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지만은
내 자식은 그냥 풍족한 환경에서 말랑말랑하게 살다가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풍족한 환경을 줄 수 없다면, 하다못해 자녀를 키우기도 벅찬인생이라면, 노년의 내가 죽을 순간을 정할 수 있으면 좋겠다. 키우게된다면 열심히 노력하고 노력하겠지만, 언제까지 줄타기를 계속 하고 있을거 같진 않으니까.
물론 현실적으로 죽음의 자유를 준다는것은 불가능할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스스로 인지할 정도로 충분히 쇠약해지고, 죽음을 바라고 있노라면, 부디 내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외로움도, 가난도, 이별의 순간도 모두 감당하긴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노력할테니 , 하다못해 엔딩정도는 정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
쓰기 아깝다고 최종보스전까지 모아두고 모아둔 아이템
병원말고 부케한테 몰려주고 싶으니깐 말이다.
남아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