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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1/22 02:04:34
Name 9년째도피중
Subject [일반] 생존을 위한 이기적인 몸부림. 나와 역사공부 (수정됨)
우선 부끄러운 전제를 깔아보겠습니다. 실은 역사공부 별로 많이 안했습니다. 어느 정도냐하면 딱 주변사람이 뭘 물어보면 썰을 풀며 아는척 하는 수준입니다.  내용은 주로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것들이 많으며 전공자가 나오면 입을 다뭅니다. (크크) 하지만 아주 약간의 유니크함이
제게 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검색을 하며 다시 그것을 바탕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찾고 다시 그것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는 걸까요? 아. 지금은 별로 유니크하지도 않군요.

어쨌든 제가 역사를 공부하는 순간은 항상 매우 이기적인 이유들이 전제로 깔렸습니다. 하지만 이 중 어떤 순간을 기점으로 실은 역사공부란 사실 매우 이기적인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합니다.

* 자전적인 내용이 상당히 있으므로 그 부분이 불편하실 수 있음을 먼저 주의드립니다.
* 꽤 장문입니다. 나름 요약문 있습니다.





# 1.

군대를 다녀와서 복학때까지 할 일이 없던 저는 두 달 넘게 감귤밭에서 농사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아끼던 새턴 게임기는 동생이 대학에 입학하면서 처분했고 게임이고 뭐고 이젠 정리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충실한 삶을 살겠다고, 그 때는 진심으로 맹세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동생은 그 때의 저를 평하기를 "평생 본 모습 중에 제일 꼴보기 싫은 모습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때 어찌어찌하다 제게 학원 알바자리가 들어왔고 저는 딸리는 실력으로 한달 50만원을 받으며 알바를 시작합니다. 과목은 역사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과목이었는지는 창피해서 말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저는 딱 한 두 달 하다 그만 둘 알바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에 딱히 신경쓰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밭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와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강의를 나갈 정도였으니까요. 주의도 받았지만 저는 시큰둥했습니다. 네. 동생이 말한 "꼴보기 싫은 모습"이었죠.

  그대로 그렇게 남은 기간을 밭에서 계속 구르다 복학을 했으면 저는 '역사'라는 대상과 딱히 학창시절 교과 이상의 연없이 그냥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해, 올해는 다르리라던 아버지의 호언장담과는 다르게 감귤 값이 폭락하고 맙니다. 결국 빚만 늘었고 대학생만 셋인 집에서
돈이 없어 복학을 못할 것 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때 학원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학부모들의 요구에 따라 과학과 사회를 추가했어요. 학원은 별도의 선생을 구하는 대신, 저처럼 안나오는 날이 좀 있는 이가 일주일에 한 두 타임만 들어가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20만원의 옵션을 더 받으며 사회 과목'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사회를 선택하게 된 것은 그나마 사회가 과학보다는 가르치기 수월해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문과였던 탓도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그만큼 일이 만만해 보였던거죠. 크크..... 어쨌든 복학하고 무사히 졸업하려면 돈이 필요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수업을 받았던 학생들에게는 미안할 따름입니다. 저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거든요. 정말 주먹구구였습니다.

있지도 않은 지식팔이를 하려니 환장할 노릇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줄과 줄사이의 설명을 요구했고 질문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당황했고 얼굴이 시뻘개졌습니다. 무능한 이로 찍히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짤리고 싶지 않았기에, 저는 정답지와 해설을 흘끔흘끔 보며 대충 그럴듯한 '구라'를 치기 시작합니다. 1반에서 2반으로 넘어가는 동안 '구라'는 좀 더 다듬어졌고 보다 문제를 풀기에 알맞은 형태로 정리되어갔습니다. 가끔씩 도서관에 가서 관련 서적을 읽는 시간이 늘어갔습니다. 읽은 건 바로 써먹었습니다. 역사적인 의미, 진실의 전달.  그런건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 목표는 오로지 교재의 내용을 어떻게하면 재미있게 이해시킬 것인가에만 있었습니다.

제 본강의는 점점 더 무성의해져 갔습니다. 그에 비해, '사회과' 강의는 그 '구라'들에 힘입어 활기가 생겼고, 저 역시 아이들과 비로소 교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아이들에게 '사회 선생님'으로 불리게 됩니다.





# 2.

역사와 인문학 개념(?)을 가르치는 쾌감을 알아버린 저는, 학교에 복학하고 나서도 학원알바를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파트타임이었던 사회만 가르치게 되었지요.
복학을 했지만 부모님의 의지에 의해 간 전공과목은 여전히 저와 맞지 않았습니다.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에 너무도 스트레스를 받았던 저는 스스로를 구원하고 자존감을 얻기위해 '사회, 역사'를 전공으로 전과를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지방대라고 해도 그 안에서는 나름 점수가 높은 과를 들어갔다는...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닌 문제로 내적갈등을 겪다가 결국 복수전공으로 '공통사회'를 채택해버리는 '짓'을 저지르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냉탕과 온탕을 오고가는 경험이었습니다. 전공에서는 교수의 질문에 더듬더듬하는 학생이었지만 공통사회로만 가면 틀리더라도 "아 틀릴 수도 있지"하는 자신감이 넘치는 패기넘치는 학생으로 변했습니다. 막상 새로 배운 과목내에서 성적이 꼭 좋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수업에 능동적으로 참가했고 질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학점을 포기하고서라도 학기중간에 맘에 안드는 교수의 과목은 안나가고 다른 교수의 과목을 청강하는(...) 참으로 정신나간 만행까지 저질렀지요. 사실 그건 '공통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지만 말이죠.

참으로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낮에는 학교에서 새로운 것들을 얇고(...) 다양하게 공부하고, 저녁에는 그것을 아이들에게 써먹었습니다. 주말에는 동아리 친구들에게 괜히 정치구조와 민주주의에 대한 어설픈 역설을 하곤 했습니다. 당시에는 위키도 없었고 상식의 허들도 낮던 시절이라 지금은 누구나 알만한 이야기들을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듯 떠들곤 하였지요. 그리고 앞으로의 지식은 모든 인문학적 지식이 통합된 어떤 하나로 귀결될 것이라 떠들었습니다. 지식의 연결과 통합은 반드시 다가올 미래라 주장했더랬죠.

그 당시 저를 홀린 과목은 '문화인류학'이었습니다. 그래서 학원에 가면 괜히 틈마다 '야노마모 족'이나 '사라 바트만'이야기 등을 해댔습니다. 한 달 30만원, 나중에 올라서 60만원을 받는 신세였지만 그럼에도... 뭐랄까 마음만은 엄청난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때였습니다. 지식의 연결과 통합에 있어, 문화인류학은 그 중심에 있는 학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이 책 저 책 읽던 것은 아니라 그냥 맘만 그랬습니다. 학원을 다니며 쌓은 내공(?)에 전공 서적에 있는 것만 떠들어도 남들이 "우와"해주니까 대책없이 콧대가 높아졌던 때였지요.
  
물론 전공의 학점과 졸업사정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말입니다.





# 3.

결국은 전공에서 학점이 터졌습니다. 사실 당시 주말에는 동아리 생활까지 했던 관계로 제 시간은 전공과목을 위해 거의 쓰여지지 않았던 탓에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남는 시간에는 중고로 사들인 플스나 했고 말이지요...) 심지어 그 와중에 연애까지 했습니다.

아슬아슬했던 생활은 무너졌습니다. 졸업은 늦춰졌고 저는 정이 안가는 전공공부를 한다고 도서관을 나갔지만 되려 도피하듯 역사책만 읽고 오게됩니다. 그래도 어떻게 하다보면 되지 않을까 할 때.... '공통사회'에서도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네. 공통사회 선생님을 뽑지 않기로 한 것이지요.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할만한 일이었습니다. 애써 모른체 했을 뿐이지.

저는 현실을 부정했습니다. 가식된 세계에 살았고, 그 얼마 안되는 알량한 지식으로 쌓은 자만심과 자부심을 어떻게하지를 못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더 매달렸습니다. 여전히 알바였기 때문에 봉급은 늘지않았고 대신 그 인맥으로 과외를 늘렸습니다. 친구의 도움으로 어딘가의 회사에 잠시 들어가기도 했지만 그 잘난체를 주체하지 못하고 친구에게 폐만 끼친 상태로 나와야 했습니다. 어차피 몇 달짜리 계약직이긴 했지만요. 나오면서 건진게 있다면 그래픽 프로그램을 다루는 법을 조금 배운 것, 그리고 타블렛을 구매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다시 부모님과 밭에 나가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계속 공부를 하겠다고 말해봐야 딱히 성과를 보장할 수 없으니 도리가 없었습니다. 농사는 계속 망해갔고 부모님은 지쳐갔고 저도 썩어 곯아들어 갔습니다. 부모님의 스트레스는 그대로 저에게 전이되었고 저는 조금씩 예전의 그 상태로 돌아가는듯 했습니다. 학원 수업은 매너리즘에 젖어들었고 이제 서른이 된 주제에 50대 이상 선생들도 잘 안할 고리타분한 내용의 무성의한 수업이나 했습니다. 아니, 사실은 인생 자체에 성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봄 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의자와 쓰레기통을 집어던졌고, 학생에게 면전에서 쌍욕을 듣고, 학교에서 기출예상문제를 내주고 거기서 모든 문제가 다 나온.... 그 다음 학기에.  학원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날 저녁. 집에 있던 플스와 게이머즈를 전부 여러 박스에 담아 어느 카페의 분들에게 나눠주고 손을 털었습니다.

그리고 밭에 나가는 틈틈이 과외를 하는 생활을 합니다. 물론 얼마안가 그 과외도 곧 끊기게 됩니다. 딱히 실력있는 과외선생도 아니었던 탓이지요. 저는 여전히 미졸업상태였고, 이후 전공과로부터 제적처리를 당합니다. 과에서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제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지만 저는 그대로 처리해달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 해 겨울에는 "더 이상 밭에 나가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아서 아버지를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냥 밭에 나가기 싫어서. 아버지랑 같이 일하기 싫어서. 그냥 버텼습니다. 책상에다 이미 제적처리된 전공학과의 책을 펼쳤습니다. 공부하는 척만 했습니다. 나가기 싫어서. 아니 사실 처음에는 진짜로 했습니다. 몰라요. 그냥 하고 싶었습니다.




# 4.

그것도 하루 이틀. 결국 본성을 못버리고 루리웹 게시판을 기웃거리는 상태가 됐습니다.
게임은 못하고 게임정보는 보고싶고... 그런 심리에서 기웃거렸던건데, 막상 활동은 뉴스게시판과 창작만화 게시판에서 하는 상황이 됩니다. 안에서 잠자던 어설픈 선생기질이 발동되었던 게지요. 지금 이 글에서도 느껴지시듯이 당시도 글빨이 별로였어요. 하지만 남는게 시간이었고 어설픈 지식을 무기삼아 휘둘렀습니다. 넷에서 약간 상식이 부족해 보인다 싶으면 가만 넘기질 않았던거 같습니다. 자기 기준 내에서의 상식말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만화 게시판에서 두 개의 만화를 보게 됩니다.

첫 번째는 쿠바 역사 만화였습니다. 작가분은 정확하게 기억이 안납니다.... 너무 오래되기도 했지요. 여하튼 내용도 생각보다 알찼고, 무엇보다..... "나도 저 정도는 그릴 수 있지 않을까"하는 '착각'을 하게 됐습니다. 네. 그게 컸어요.
잠자던 타블렛을 꺼내 수줍게 낙서에 가까운 그림들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댓글이 하나 둘 달리는 수준이었지만... 누군가에게 관심받는 일이 매우 고팠기 때문에 밤중에 부모님에 안들키게 몰래 그리기 시작했지요.

두 번째는 이름을 말하기 난감한 닉네임을 가진 모 유저의 만화였습니다. 볼펜으로 그린게 특징이었는데 솔직히 내용은 오덕들 비웃는 내용이었습니다. 닉도 제목도 어그로 덩어리였고 댓글에서 자신에 대한 비판을 가만보지 않는 유저였죠. 저 역시 오지랖넓게 참전했는데 그 유저가 그랬습니다. "일단 나를 까려면 우선 너희들 조회수랑 비교해보고 말해라."

묘하게 그 글이 자존심에 불을 지릅니다. 내가 같잖지만 너같은 놈한테까지 무시당하고 싶지않아.... 같은 마음이 솟아올랐고, 학원에서 수업도중에 생각했던 것들을 대충 휘갈기던 것에서 벗어나, 도서관과 인터넷에서 해당 내용의 자료를 찾고, 예전 공통사회과에서 과제하던 기분으로 만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림은 여전히 개판이었지만 그걸 계속 수정하면서 컬러링이란 것도 해보았습니다. 어차피 시간은 많았으니까.

솔직히 이제와 냉정히 보면 조악하기 이를데 없는 만화였지만, 정성을 들인만큼 사람들의 관심도 조금은 생겼습니다. 어쨌든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는 됐다 생각했어요. 저는 게시물 조회수를 확인했고 그 유저에게 자랑하고 싶어 그의 닉네임을 검색해 그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 자의 만화를 보니..... 엄.......내가 굳이 이럴 필요가 없지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관뒀지요. 사실 아무래도 좋았어요.

여하튼 저는 관심받는 맛을 다시 알아버렸습니다. 마치 한창 1,2년차 수업할 때, 공통사회 강의를 받던 그 때 같았지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정리해서 마치 내 지식인양 포장하고 그걸 만화로 그렸습니다.
부모님과 마주할 때는 죽은 듯이 있다가 집에 안계시거나, 밤이 되면 책을 읽고 만화를 그렸어요. 그림을 못그리니까 만화 내용을 신경써야 했고.... 그래서 도서관에서 뭔가 있어보이는 책들을 이것저것 집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걸 노트에 정리해서 옮겨적은 다음 그냥 슥삭슥삭 그렸습니다.

그렇게 '작품'을 완성하고 피드백을 받는 일은 너무도 즐거웠습니다. 저는 다시 지식을 파는 사람이 되었고 우쭐해져서 다른 글에 한 두 마디 아는척 다는 일을 더 많이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겠지만 자존감을 채우는 일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입니다.





#4.

좀 더 실제적인 사례로 들어가보죠.

제가 돈도 벌지 못하는 주제에 책읽고 만화그리느라 밭에도 안가고, 아버지의 몸이 좋지 않아 밭에 갈 수 없게되면서 결국 농사를 접게 되었습니다. 대신 평생 밭일과 주부만 해온 어머니가 60이 다되어 취업전선에 뛰어드셨습니다. 동시에 이 때 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에 성공한 동생의 도움도 받아 어찌어찌 생계를 유지하게 되지요.

이제 집에는 아버지와 나, 둘이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많은 아들들이 그랬듯, 내게 아버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생각하면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시는 걸까 하는 일이 많았지요. 혹자는 결혼하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고 말하지만 그것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게해서 아버지의 많은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됐다면 그건 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 탓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입장은 그래요.

아버지와 나는 계속 부딪혔습니다. 언성을 높이는 일도 많았고, 사소한 것 하나로도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잦았지요. 그렇게 감정의 골이 깊어갈 즈음, 저는 한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너무도 내 중심으로 아버지를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버지에 대해 '공부'해보면 어떨까?
아니,  마치 역사인물을 탐구하듯이. 가능한한 철저히 객관화해서 아버지라는 '사람'에 대해 공부해보면 어떨까?

기존에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들은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자의적으로 당신 하고 싶을 때 한 말들이었지요. 저는 아버지를 인터뷰하기 시작했습니다. 의도를 굳이 말하지는 않았어요. 두 백수 남자에게 시간은 많았고 늘 이야기가 삼천포로 향하고 앞뒤가 안맞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시간과 장소를 물어보고 확인합니다. 듣고 나서 노트에 필기하고 정리했습니다.

어머니의 휴일에 이런저런 것을 묻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아버지가 없을 때 말이죠. 아버지가 자의적으로 해석했을 여지가 있는 일들에 대해 어머니의 입장, 혹은 어머니가 들은 다른 이야기들을 통해 검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삼촌과 고모가 제사에 오셨을 때 옛날 일을 얘기하기 시작하자 다시 이것저것 물어봤습니다. 아버지의 어린시절을 재구성하기 위해 꽤 좋은 시도였습니다. 두 분이 열성을 다해 아버지의 비리(?)를 말하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설명과는 다른게 많았지요.

구글지도를 펼쳐 아버지의 고향에 대해 분석합니다. 아버지가 뛰놀았던 논밭과 아버지가 평생의 한으로 여기는 어떤 사건들이 일어난 장소들을 확인합니다. 시간 순으로 사건을 나열하고 지도를 그려 그 위에 표시합니다. 여기서 사건은 시간과 공간으로 구체화되고 몇 가지 사건에 대한 모순점과 의문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이걸 다시 꼬치꼬치 따져묻기는 그렇습니다. 일단 공란으로 킵해두고 단서가 나오는대로 채우기로 합니다.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에 대한 것을 여쭈기로 합니다. 아버지의 설명에 힘이 붙습니다. 아버지가 생각하는 아버지상에 대한 것은 여기서 나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할머니에 대한 것을 여쭤봅니다. 아버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어머니 혹은 아내의 모습이 어린 시절 봐온 할머니에대한 기억에서 온 것은 아닌가 확인합니다. 돌아가신 두 분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나옵니다. 홀연히 집을 나가버린 부친과 그 사이 몸져누운 모친, 거기서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땅문서와 집문서를 움켜쥔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열 세 살 어린 아이가 보입니다.  
아버지의 과거에서 몇 가지 분기들을 확인하고 특히 이후 영향을 미칠 트라우마의 지점들을 확인하여 정리합니다.  

문헌이 의외로 도움이 됩니다. 해당지역의 산업, 인구 변동, 기후, 풍습, 유물, 유적. 과거 사진자료들.
전부가 과거를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줍니다.

분석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얻는 것들은 상당합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는 틀로 묶어두지 않고 한 '사람'으로서 받아들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해하게 되면 미워하기도 어렵게 됩니다. 최소한 오해할 일은 줄어듭니다.  




# 5

당시로부터 9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아버지와의 대화는 갑갑한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대화와 행동이 무엇에 기반한 것인지 알기에 잠시 짜증은 날지언정 밉지는 않습니다. 시간 개념 희박한 것도 이해하고, 배운 사람들과 교회, 무당에 대한 기본적인 적의와 경계심도 이해합니다. 쌀과 잡곡에 대한 집착도 이해하고, 갑갑할 정도로 반복하는 선물 주고받기(누가 먼저 끝내나 싶은)의 이유도 이해합니다. 툭하면 고시공부 운운하던 것도 이해합니다. 효에 대한 관념과 기준이 엄청난 것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한 모순되는 스트레스도 이해합니다. 그 외에 참으로 많은 일들을 이제 이해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도 싸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만해도 밥상머리에서 반찬가지고 투닥투닥 했으니까요. 의사들을 기본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건 이해하지만, 대체의학으로 얻은 지식으로 의학적 지식을 깔아뭉개는게 옳냐면 그건 아닌지라. 특히 병원문 나선지 얼마나 됐다고 저러시나 싶어서. 허허헛.

저는 역사공부를 저 자신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함과 동시에 저 자신의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그 접근법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항상 이런 식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제 인생의 가장 큰 화두였던 아버지와의 심적갈등을 상당히 해소한 것 같아 뿌듯합니다.

어떻게보면 이건 정상적인 루트의 반대방향입니다.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공부를 끌어들이는 식이니까. 아래 게시물에 신불해 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정반대가 되겠죠. 사실 이건 좋은 건 아닙니다만.... 적어도 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는 보다 직접적이라 좋기는 합니다.

타인의 사례들도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대에 따라 대립과 갈등의 형태가 다른 듯 보여도 그 갈등의 근본적인 지점은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결국 역사란 것은 인간이 하는 일이니 말이지요. 그 갈등의 지점을 확인하다보면 내가 마주한 문제들, 그리고 나와 관련있는 사회의 문제들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마무리

두 시간 쯤 타이핑을 하고 중간에 전화를 장시간하다 다시 이었더니 무슨 이야기를 한건가, 결국 내 만화들 처럼 의식의 흐름대로 마구 갈기게 된건가 싶습니다만  요약 및 결론은 이렇습니다.


- 돌이켜보면 내 역사공부는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내 생계를 위한 것이기도 했고, 내 지적 욕망을 채우며 자존감을 채우는 목표이기도 했고, 내 개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누구처럼 사람들을 감동시킬만한 무언가를 확실히 만들어내지는 못했고 지식도 불안정하지만 스스로의 역사공부에 만족하는 이유는 결국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방식대로 대상에 접근한다면 나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그랬다.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개선에 있어서. -

졸필이라 한계네요. 이상입니닷.





P.S.

처음에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쳤는데 머리가 아프군요. 아이고야.... 비전공에다가 주제넘은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주절거려 봤습니다. #4,5에 해당되는 부분은 공감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실 분도 꽤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주제만 따로 파내서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공부한 사례를 갖고 게시물을 만드는 것이 나았겠다는 생각이 이제와 들고 있습니다. 어흑.
2011년 이후로 사실 새롭게 확 들어간 역사공부란 없었고 기껏해봐야 노예제도사를 중점으로 조금 파본게 다인데, 아래 신불해 님 글보고 좌절감 들었습니다. 아 짜증나. 난 뭐했지. (뭐하긴 뭐했나. 책임으로부터 도피만 했지.)

아. 그리고 지금은 히키+백수아닙니다. 입에 풀칠할 돈은 벌고 다니면서 살아요.^^ 많이는 못벌지만.


중언부언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이 되면 중간중간 수정할 듯. 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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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원
18/01/22 02:51
수정 아이콘
(수정됨) 글 잘 읽었습니다. '구라'라는건 로마인 이야기 등에 나오는 그런 종류의 것을 말하시는건가요?
9년째도피중
18/01/22 04:26
수정 아이콘
에... 그러니까 예를 들면.... '대한'자가 붙으면 민족주의 진영이고 '조선'자가 붙으면 사회주의 진영 단체다? ..같은 류의 잘모르면서 일단 외어지면 그걸로 밀어붙이는 걸 말하는 거였습니다.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은 잘 안나는데, 사실 확인을 잘 안했고 MSG를 상당히 많이 친 제멋대로의 내용을 엮었던거 같습니다.
18/01/22 04:26
수정 아이콘
잘 봤습니다. 참 재밌네요.

자기 삶을 위해 큰 결단을 내릴 줄 아는 용기와 실천하는 행동력은 보고 배울만한 점 인 것 같습니다.

고로 저도 오늘 날이 밝으면 미뤄왔던 라식 검안받으러 다닐렵니다. 크크
9년째도피중
18/01/22 11:45
수정 아이콘
긴 글 읽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딱히 큰 결단을 내린 일은 없는 것 같아요. 환경에 휩쓸려 내가 아는 몇 안되는 재주만으로 즉흥적으로 살다보니 여기까지 떠밀려 왔네요.
같은 저학력자들 사이에서는 그럭저럭 튀는데 그걸로 대박을 치기에는 모자란.... 딱 그 정도의 재주입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저야말로 신불해 님 게시글보고 자극받아서 행동력이 조금 올라간거 같습니다. 지난 날의 나는 저 자신감으로 아무곳에나 들이박았는데, 지금의 나는 왜 지난 9년간 전진하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말이죠. 큿.

감사합니다. 라식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윌모어
18/01/22 08:41
수정 아이콘
잘봤습니다. 뭔가 한편의 단편소설을 본 기분입니다.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주신 회고에서 낭만과 용기를 봤네요. 응원합니다.
9년째도피중
18/01/22 11:51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꽤 여러분의 응원을 받았으나 부끄럽게도 환경을 핑계로 도피중입니다. 그 간 다시 무언가를 해보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떨어진 자존감과 의지의 부족으로 늘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시 해봐야겠죠? ^^
metaljet
18/01/22 09:16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글 잘쓰시는 편이니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역사 관련 글 가끔씩은 소소하게 올려주세요.
9년째도피중
18/01/22 11:53
수정 아이콘
아닙니다. 지금 다시 읽어봤는데 딱히 앞부분이 멀쩡하다는 건 아니지만 뒷부분은 진짜 제가 읽어도 이해가 안되게 적어놨네요.
역사관련 글은 깊이가 부족하니 여기 올리기는 무섭고, 올린다면 다른 걸로 하겠습니다. 일단 손부터 풀어야 겠어요. 흐흐
뿜차네 집사
18/01/23 01:1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담백하지만 끌림이 있게 재밌는 글을 쓰시네요. 님께서 그리신 만화도, 아마도 그래서 좋은 반응이었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피지알에도 자주 글 올려주세요.^^

ps. 만화는 완전히 놓으신 건가요..?
괜찮으시면 혹시 이전 만화라도 볼 수 있을 경로가 있을까요?
9년째도피중
18/01/23 21:02
수정 아이콘
(수정됨) 과찬이십나다. 음... 좋은 반응이었다... 라는건 자기만의 생각일 수도 있고, 여하튼 그리는 동안은 좋았습니다.

만화는 계속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게 속도가 느렸고 또 그린 만화들 일부를 사정이 있어 공개를 하지 못할뿐이죠... 그게 몇 년째네요.

http://bbs.ruliweb.com/family/212/board/1010/list?search_type=name&search_key=%EB%A0%88%EB%93%9C%EC%B9%BC%EB%A6%AC%ED%94%84&page=6
여기로 가시면 제 첫 만화부터 2012년 만화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아유 흑역사가 아주..... 크크크
아. 보니까 그 뒤로 조금 그리기는 했네요. 일 년에 하나 둘이지만... 2015년의 대량업뎃은 2011~12년에 그려둔 것을 허락을 받아 공개한 것입니다. 한번에 보기엔 너무 많으니 적당히 취사선택해 보시길 바랍니다. 또 역사관이 안맞으면 읽는 것이 고역인 만화일 수 있음을 미리 양해드립니다. (일관되게 비난하는 대상이 있기때문에...)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뿜차네 집사
18/01/24 09:41
수정 아이콘
답글 감사합니다.
아, 역시! 글을 보며 상상했던 이미지 그대로인 작품이네요. 우왕..
즐겁게 잘 읽겠습니다.
작품하실 때 고생하셨을 작가님께는 조금 죄송하지만,
10년치 분량의 페이지를 보며, 뒤늦은 독자는 오늘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하하..
좋은 작품, 유익하고 재밌는 이야기 앞으로도 계속 부탁드릴게요.

말씀하신 미공개 작품들은 꼭 프로 무대(?)에서 뵈었으면 하네요. ^^b
혹 출간된다면 소장할 가치가 충분하고도 넘쳐 보여요.
멋지십니다. 진심으로!!

건승, 건필하세요!

(저 그리고.. 쪽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 )
9년째도피중
18/01/24 17:02
수정 아이콘
확인했습니다. 기대를 저버려 죄송합니다. 허헛.

그리고 초창기 만화들에 나온 내용들은 지금의 제 입장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가장 오래된 것이 10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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