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역사 시험을 2시간 남겨둔 대학생입니다. 시험치러 가기전 마지막으로 러시아의 역사 총 복습할 겸, 러시아의 역사에 대한 개괄적인 역사를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러시아 역사는 크게, 키예프공국, 타타르의 지배, 모스크바 공국, 로마노프왕조, 소비에트, 현 러시아 순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오늘은 시험범위인 키예프공국과 타타르의 지배, 모스크바 공국과 로마노프왕조의 개창까지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러시아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고 합니다.
기원 후 200년 부터 500년동안 지금의 체코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 인근에 슬라브 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잦은 외세의 침공으로인해 이곳의 슬라브인들은 서쪽, 동쪽, 남쪽 세곳으로 흩어지게 되는데, 이중 동쪽으로 간 슬라브민족이 러시아인이 됩니다. 이들은 드네프르강, 돈강, 볼호프강과 흑해 연안에 자리를 잡습니다.
하지만 9세기 중엽이 지나자, 이곳의 슬라브 주민들 사이에서는 분열이 생기게 되고, 노르만 족의 전사 루릭에게 왕이 되어 주기를 부탁합니다. 서기 862년, 이때 부터를 러시아 역사의 시작이라고 부르는게 학계의 정설....
한편 루릭의 친구인 올레그는 드네프르 강 연안의 키예프 지방의키예프에 자리를 잡고, 키예프 공국을 마련합니다. 인근의 노브고로드, 스몰렌스크, 수즈달 등 주변국으로부터 모피와 노예를 갈취하고, 아조프해로 흐르는 드네프르강을 이용해 비잔틴과 교역을 하며 성장합니다.
올레그가 키예프의 대공이었을때 그는 비잔티움과 교역도 했지만 싸움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비잔티움과 통상조약 및 관세 면제를 약속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올레그의 사후, 그의 아들 이골은 비잔틴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관세를 다시 물고 비잔틴 제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게됩니다.
하지만 이골의 손자인 블라디미르 대공 대에 이르러서 키예프는 황금기에 접어듭니다.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꿈꾸었던 블라디미르 대공은 비잔티움 제국의 황녀였던 안나와 결혼하고, 러시아에 동방 정교회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의 교회는는 아직 러시아 소속의 러시아 정교회는 아니었고, 비잔티움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에 영향으로 남슬라브족 출신 선교사 키릴과 메포지에 의해서 현재 러시아 문자인 키릴문자가 탄생하고, 이때의 말을 교회 슬라브어 라고 합니다.
블라디미르 대공은 패왕으로 키예프의 영토역시 최대로 확장하게 됩니다. 이로서 키예프는 봉건적 질서가 자리잡은 안정된 국가로 발전합니다.
블라디미르 사후 약 20년간 형제들의 왕위다툼이 있지만 최후에 '지혜로운자'라 불리는 야로슬라브 무드르이가 키예프의 대공 자리에 오릅니다. 그는 러시아 최초의 법전 '루스카야 프라우다'를 편찬하고, 키예프를 콘스탄티노플 식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내에 속해있던 교회를 비잔티움으로부터 분리시켜 키예프와 노브고로드의 주교를 자체적으로 선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1054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그의 손자인 블라지미르 모노마흐가 대공이 되지만, 이때 부터 키예프는 몰락의 길을 걷게되고, 모노마흐의 아들 유리 돌고루키는 지금의 모스크바 근처인 수즈달 공국으로 가 모스크바를 세웁니다.
한편, 동쪽에서는 몽골족, 타타르들이 세력을 키워나갑니다. 칭기즈칸을 필두로 한 타타르 족이 중국과 시베리아를 정복해 속국으로 만들고(이때 우리나라도 몽골의 속국이 됩니다.) 유럽으로 진격을 시작합니다.
1223년, 아조프해(흑해 바로위의 바다) 연안 칼가강에서 러시아군(키예프와 다른 여러 공국의 연합군)과 몽고군의 싸움에서 러시아군은 대패하고, 키예프를 비롯한 남 러시아의 여러 공국들을 싸그리 멸망시킵니다.
이후 북쪽으로 이동해 모스크바와 수즈달등 비교적 북쪽의 공국들로 까지 눈길을 돌립니다. 그리고 몽골은 이곳에 킵차크 한국을 건설합니다.
유리 돌고루키의 동생 이반 1세는 유리의 사후 모스크바의 왕이되어 몽골에게 많은 금품과 아부로 인해 몽골의 환심과 신임을 얻게 됩니다. 그로인해 돈주머니 라는 뜻의 칼리타 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타타르의 신임을 얻은 그는 전러시아의 대공칭호를 얻게되고 러시아에서 타타르로 가는 모든 공물들을 관리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책은 그의 아들 세몬 고르드이와, 그의 손자인 이반 2세가 승계합니다.
시간이 지나며 몽고는 내부 분열로 힘을 잃어갑니다. 다양한 한국들 끼리의 패권쟁탈로인해 킵차크 한국역시 러시아에 대한 지배력이 약해집니다.
이반 2세의 뒤를 잃은 드미트리 대공은 모스크바 만의 군대를 양성하고 돈강 근처에서 1380년에 몽골군과 대 전투를 벌입니다.
이 전투 이름은 쿨리코보 전투인데, 이 전투에서 대 승리를 거둔 드미트리는 돈강에서의 승리라는 뜻의 돈스코이 칭호를 얻게 됩니다.
이 승리로 인해 모스크바는 진정한 러시아의 패자가 됩니다. 하지만 이 승리에도 불구하고 아직 몽고의 지배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드미트리는 모스크바 주변의 공국들을 병합하며, 중앙아시아와 비잔티움, 서유럽과도 활발한 교역을 시작합니다.
드미트리 사후 왕위에 오른 바실리 1세와 2세는 이러한 정책을 지속해 몽골에 보냈던 공물 대신 자그마한 선물만 보냅니다.
그리고 바실리 2세 사후, 러시아 최초의 짜르 이반 3세가 왕위에 오릅니다.
우선 노브고로드 공국을 점령해 모피생산권을 독점하며 자금력을 향상시킵니다. 또 정복한 국가를 지배하기 위해 강력한 법 집행기관 역시 만듭니다.
몽고가 약해진 틈을 타 모스크바 내의 몽고 사신들을 추방한 그는 1480년 우그라강 전투에서 몽고군을 대파하며 몽고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몽고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 이반 3세는 새로운 법전인 '수제브니크'를 만드는데, 이는 농민의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하는 내용이 포함된 법전으로, 농노제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이반 3세 사후 그의 아들 바실리 3세가 남은 러시아의 공국들을 모두 병합하며 진정한 러시아의 통일을 이룩합니다.
바실리 3세의 아들 이반 4세는 17세에 짜르에 등극합니다. 러시아 최초로 대관식을 치른 이반은 타타르 족의 마지막 요새인 카잔을 함락시킴으로서 아시아와 시베리아로 향하는 교두보를 마련합니다. 하지만 이반은 어려서부터 권력암투속에서 자라왔기에 굉장히 포악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가 30세때 아내 아나스타샤 로마노프가 사망한 이후 그는 포악함 밖에 남지 않습니다.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모조리 숙청한 그는 1564년, 교회의 권한 축소와 왕의 특별영지를 요구하는서신을 남기고 돌연 자취를 감춥니다. 이는 받아들여지고, 이반 4세의 특별영지 오프리츠니나와 이반의 친위대 오프리츠니크가 조직됩니다. 이반 4세는 이 오프리츠니크를 이용해 끊임없는 피의 숙청을 이어갑니다.
한편 이반 4세는 실수로 황태자인 이반을(이반4세의 아들 역시 이반입니다.) 죽이게 되는데, 이로 인해 그의 사후에는 마땅한 후계자가 없어져 러시아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반 4세에게는 이반 외에도 피터와 드미트리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심신이 매우 허약했던 피터는 즉위 15년만에 사망했습니다. 피터의 처남인 보리스 고두노프가 실권을 갖게 되고, 어린 드미트리를 죽입니다. 그리고 보리스 고두노프는 짜르가 됩니다.
하지만 보리스 고두노프의 짜르 즉위 이후 드미트리를 참칭하는자가 나타납니다. 오트레피예프라는 자 인데,보리스 고두노프의 독재를 못마땅히 여긴 귀족과, 러시아를 노리던 폴란드의 음모로 인해 오트레피예프가 짜르가 됩니다. 하지만 그의 신하였던 바실리 슈이스키의 폭로로 오트레피예프는 사형당하고, 바실리 슈이스키가 왕위에 오릅니다. 키예프 북동쪽의 작은 도시 푸치풀리에서 노예출신 볼로트니코프가 농민봉기를 일으키고, 바실리슈이스키는 이를 진압하기위해 스웨덴 군을 러시아로 끌어들입니다. 이에 귀족들은 귀족회의를 열어 슈이스키를 퇴위시켜버립니다.
법치가 무너지고 역병이 창궐하자, 폴란드가 러시아를 향해 진격합니다.(이때 부기영화가 연재가 되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그래야 단행본으로 나오지) 그러자 마땅한 지휘자가 없는 상황에서 코지마 미닌과 드미트리 포자르스키가 국민군을 이끌고 폴란드와 전쟁을 벌여 승리합니다.
이후 1613년 미닌과 포자르스키는 새로운 지도자를 뽑기위해 모든 국민이 참여한 국민회의를 열고,
이곳에서 이반 4세의 아내였던 아나스타샤 로마노프 가문의 마지막 남은 혈통인 미하일 로마노프를 왕으로 추대합니다.
폴란드와의 전쟁 이후로도 스웨덴과 폴란드와의 국지전은 끊임이 없었고, 이에 스웨덴에게는 핀란드만 일대, 폴란드에게는 스몰렌스크와 노브고로드를 내어줍니다. 이때는 국민의회의 힘이 강했는데, 그럼에도 상류계급에게 치우친 혜택으로 인해 농민봉기가 빈번히 발생합니다.
미하일 로마노프 사후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가 즉위합니다.
하지만 알렉세이의 양육자인 모로조프가 실질적 권한을 행세하며 막대한 세금을 걷고 그의 주변인을 요직에 앉힙니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에 농민 스텐카라친이 돈강 유역에서 봉기를 일으킵니다. 봉기는 약 7년간 지속되었지만, 볼가강 유역일대와 심비르스크에서의 패배로 봉기는 실패하고 스텐카라친역시 처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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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왕이면 시험 잘 치도록 응원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