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하며: 저희 아버지는 대학시절에 큰 교회의 청년회장이자, 전국 장로교 청년연합의 간부셨고, 명문대학의 공대 재학중인, 엘리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장래가 촉망받는 젊은이셨습니다. 당시 서울에서 손가락 안에 들던 교회의 담임목사가 자기 딸과 결혼시키고 싶어할 정도였다고 하네요. 그러다가 유신이 일어나고, 장로교 청년연합에선 유신반대 성명을 내고, 아버지는 그날로 정치범이 되십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퇴학당하고, 교회에서도 배척당하고, 이후로 교회에도 발을 끊고, 취직도 되지 않아 장사를 하셨는데, 확실히 장사쪽엔 재능이 없으셨는지 계속 실패만 거듭하셔서 우리 가족은 계속 힘들게 살아야만 했습니다.
2. 민주화 유공자 보상법: 시행된지는 꽤 됐지만 요즈음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보상을 해 주고 명예회복도 시켜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도 말씀드려봤는데, 이미 알고 계시더군요.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좌파놈들이 주는 돈은 받지 않겠다" 였습니다.
3. 대화: 아들: 아니 좌파는 좌파고, 돈은 받으셔야죠. 그리고 문재인이 왜 좌파인가요? 하는 정책들을 보면 죄다 우파적이구만. 아버지: 지금 북한이랑 대화를 하고, 종전선언 얘기가 나오잖냐. 그거 북한이랑 남한이랑 분리해서 각자 나라로 살자는거 아니냐? 그게 좌파지 뭐가 좌파냐? 아들: 아니... 현실적으로 지금 북한하고 당장 전쟁을 할수도 없는 노릇이고, 종전선언하고나서 휴전선이 국경선이 되면 중국이나 러시아랑 육로로 연결도 할수 있고, 송유관이나 가스관 같은것도 연결하고, 철도도 깔면 경제효과도 엄청 클텐데 이 상황에서 통일 얘기를 하는건 너무 나이브한거 아닙니까? 아버지: 그 얘기는 지금 한국전쟁은 없었던걸로 하자는거지. 전쟁을 일으켰던 북한을 용서하자는거 아니냐? 한국전쟁의 책임을 아무도 지지 않겠다고? 지금 니네 젊은 친구들은 세월호에서 애들 죽은거 가지고도 박근혜를 죽이네 살리네 하고 있는데, 한국전쟁은 세월호보다 수천 수만배는 더 큰 피해를 일으켰잖아. 만약 종전선언하고 북한 정부를 인정해주면, 한국전쟁에서 부모형제를 잃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은 다 뭐가 되는거냐? 어떤 식으로든 북한 정권을 끌어내리고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그때 죽어간 사람들의 넋이라도 위로해 줄 수 있는거 아니냐? 나이브한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겠지. 아들: ...아니 그래도 돈은 받으셔야...
4. 사실 거기까지 들었을 때, 제 논리로는 더이상 아버지의 말씀에 반박하기 어려웠습니다. 설득을 당한건 아니지만 태극기 어르신들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더군요. 게다가 유신반대 투쟁을 하는 중에 믿고 있던 학교, 동료, 교회에서 모두 버림받은 트라우마는 아마 돌아가실 때까지 씻을 수 없으시겠죠. 그 때문에 지금은 오히려 우리 가정에서 가장 극우적인 성향을 가지고 계시고요. 저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상이라는 곳이 쉽게 선악으로 무 자르듯이 구분할 수는 없는 곳이고, 어느 쪽이든 자신들만의 논리와 신념이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게 되더군요. 이번 대화를 통해서 한 가지 더 깨닳은 느낌이 듭니다. 옳은 일을 하셨음에도 그 때문에 평생을 고생하면서 살아오신 아버지... 비록 정치적으로는 전혀 말이 안 통하지만, 그래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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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아버님 훌륭하신 분이시네요
독재시절에 가장 큰 피해자임에도 더 큰 역사의식이 존경스럽네요 어르신들은 그런 강직함과 자존심이 있으시죠
조금 답답하고 촌스러워도 그런 것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급식비 내던 시절에 교직에 있는 친구가 반에 어려운 아이 급식비 보조해주려고 전화했더니 학생아버지가 정중히 거절했다는 소리 듣고 왠지 감동받았던 생각이나네요
독재에 대한 투쟁처럼 고결한 일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보상금 나오는 일을 신념 문제로 아버지가 거부 하고 계셨는데
저랑 엄마 고생시킨 일과 평생 생활비 못 준 걸로 후벼팠더니 포기하시고 보상금 받아오시더라고요. 너무 잔인했지만 엄마 생각하면....
아드님이 착해요 저에 비하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