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보면 20대에는 오로지 남의 노동자였던 기억이다.
피자집에서, 웨딩홀에서, 마트에서, 학원에서, 노래방에서, 피시방에서, 커피샵에서, 아파트 경비실에서, 학교에서, 독서실에서..
혹은 어디 거리에서라도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 일을하고 돈을 쥐어다 어딘가에 쓰곤 했다.
매 계절 옷은 사입어야 하고, 매 달 핸드폰 요금은 내야하고, 친구들은 주기적으로 밥을 먹어야 하고, 가끔은 술도 먹어야하고.
어떤때는 조금 피곤한대신 조금 여유있게, 어떤때는 조금 덜 피곤한대신 조금 빠듯하게.
그래도 20대에 벌어서 사는게 당연하다는 생각에 그냥 그러고 살았다.
몇 시간 전의 일이다.
삼일 전부터 독서실 사장은 프로그램을 업데이트 해야한다며 내게 업체에 전화를 걸어 진행하라고 하였다. 업체는 15분이면 된다는 프로그램 업데이트에만 3일이 걸렸다. 중간중간 생기는 기능적 트러블에 대해 자신들도 알 수 없다고 했다. 3일만에 발견한 해법은 놀라운 것이었다. 윈도우 xp는 관리자 모드로 들어가야 한다나. 그 사이에 사장과 실장으로부터 지속적인 갈굼을 당한건 보너스 같은 셈이다. 때려칠때 미지급 최저임금 다 때려박고 소방법 세금 개인정보관리같은 위반사항 죄다 민원넣어버릴테다. 하는 마음으로 억지로 책 몇 자를 읽는데, 어떤 학부형이 찾아왔다.
이를테면 그런것이다. 며칠 전 한 학생은 여기서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했는데, 청소중에도 나오지 않았고 분실물이 따로 접수된 것도 없었다. 그래서 없는 것 같다고 하고 돌려보냈다. 이 학부형은 그걸 내가 훔쳤다고 믿는 듯 했다. 좋게 말할때 내놓으라던 그의 손가락질과 흥분한 어조. 나는 다시금 그 학생이 앉았던 열람실로 안내해 일일히 사물함을 열어보며 지갑이 없는걸 확인해 줬고, CCTV를 네 배속으로 돌려 학생이 지갑을 손에 들고 나가는 것 까지 확인시켜줬다. 그 시간동안 뒤에서는 날카롭게 벼려진 목소리가 귓가를 푹푹 찔렀다. 어디 할게 없어서 도둑질을 하는지. 내가 경찰 안부르고 온 걸 다행으로 알아라. 알바야? 알바래도 일은 똑바로해야지. 당신이 가져가놓고 지금 발뺌하는거 아냐. 한시간 반이 넘는 설전은 CCTV로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그 학부형은 바득바득, 약이 바짝 오른듯이 마지막까지 분노를 쏟아낸다. 돈 없고 공부 못해서 알바나 하는 것들이.. 의심받을만하니까 받는거지. 처음부터 없다고 정확하게 얘길 하든가. 왜 시간을 버리게 만들어? 내가 거기서 살인범이 되지 않은게 이 사회의 사회화가 갖는 위대한 기능일 것이다. 물론 수 시간내에 살인범이 될것같이 손이 떨리지만, 아직까지는 간신히 진정중이다. 뭔가 부술게 필요하다. 이왕이면 저 나불대는 주둥이가 달린 대가리라든가.
둘러봐도 내 것이라곤 핸드폰과 책 정도. 어느것 하나 부숴봐야 빡침이 덜하긴 커녕 다시 구할 돈도 없다. 내 거라곤 너무 빈약한 것들 뿐. 폭풍처럼 몰아친 진상을 견뎌내고 나서 다시 책을 펼쳤다. 글자가 눈에 안들어와서 이걸 어디다 하소연이라고 할 생각에 SNS를 뒤져본다.
어떤 이들은 잘 살고 있는 듯 했다. 어떤 이들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참 인생이 충만하다고 느껴지게끔 SNS를 활용하는 듯 했다. 진짜든 가짜든 문득 나는 회한이 들었다. 남의 노동자로 성실히 살아온 10년에 가까운 시간. 그러고보니 처음 웨딩홀 알바에서 주방 이모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못 배운게 돈 없어서 저나이부터 알바나 하는거지. 10년이 지나도 똑같은 얘기를 듣는다. 나도 부모 등골좀 부수고, 어학연수좀 다니고, 돈 좀 덜 벌었으면 뭐라도 떠올릴 것들이 있었을 텐데, 돌아보고 나니 온통 남의 소일거리 뒤치닥꺼리 했던 기억뿐이다. 괜한짓이라는 생각에 폰을 끄고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린다. 문득, 마음 어딘가에 울화가 치밀어오른다. 이 책도 결국 남의 소일거리 하며 월급좀 타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짓인데.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하는거지? 부모 등골은 이미 IMF와 구조조정과 노후대책같은게 가루로 만들어버렸는데, 난 뭐 골수라도 빨았어야하나. 뭐 하나 분지르지도 못한 손이 파들거린다. 이를 빠드득 가는데 이가 시리다.
요즘은 소비하지 못하면 인간대접을 받지 못한다. 소비는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을 벌려면 노동을 해야한다. 난 자본가 계급이 아니니까. 이젠 이런게 다 지긋지긋하다. 지긋지긋하면 안되는 일들이 지긋지긋하다. 남 탓을 하기에는 내가 덜 성실했던 탓이 많아 세상을 탓하기도 어렵다. 양심적으로 내가 그렇게 꼭 더 나아졌을만큼 필사적으로 살았냐 하면 그건 아니니까. 벌어서 필요한데 잘 쓰고 잘 살았다. 무너지지 않고 생활을 버틴게 어디냐. 다들 더 나빠지지 않으려고 산다는데. 어제까진 괜찮았다. 어제까지는. 근데 이제 오늘은 안괜찮다. 예전같았으면 씨바 똥밟았네 할 법한 말들이 머리속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다.
어디서 얼핏 본 것 같다. 절망이 자신을 죽이다보면, 그 사람들이 언젠가는 자신이 아니라 남을 죽일거라고.
최근들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짜증이나 화가 자꾸 치솟는다. 해야할 일들이 잘 되지 않고, 하고싶은 일들은 점점 사라져간다.
나는 잘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희미해진다. 남을 죽이면 안된다. 차라리 내가 죽어야지. 이제는 다짐에 가깝다.
다들 이러고 산다. 다들 이러고 잘 살아간다는게 신기하고 존경스럽다. 무슨 에너지로, 어떤 기억으로 자신을 다독이며 힘 있게 나아가는지 궁금하다.
나의 이십대에는 그런게 별로 없는 것 같다. 내가 뿌리삼아야 할 기억들은 죄다 최저시급으로 바뀌어 어딘가로 나가고 들어왔던 것 같다.
어지럽다. 빨리 집에가서 잠을 좀 자고 싶다. 그러고 나면 어느정도는 까먹고, 어느정도는 멍해져서. 그러면 또 책이나 강의로 눈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직은 남도 죽이지 않았고, 나도 죽지 않았으니
무너지지는 않은셈이다.
그런 셈이다.
아, 담배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