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아이를 등교시킨 후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전날 저녁에 모든 짐을 꾸려 트렁크에 실어놓았기에 따로 준비할 건 없었다. 서울의 서북쪽 끄트머리에서 완도 여객선터미널까지는 다섯 시간 사십 분이 걸렸다. 꼬박 세 시간을 달린 후 휴게소에 들려 이십 분을 쉬고 다시 두 시간 이십 분을 달려 항구에 도착했다. 길고 피곤한 여정이었다.
비행기로 가면 금방일 거리인데도 굳이 이런 장대한 삽질을 감행한 것은 제주도에서도 익숙한 내 차를 몰고 다니고 싶다는 작은 욕심 때문이었다. 덕분에 완도에 도착할 즈음에 이르러 나는 푹 익은 물김치마냥 지쳐 있었다. 아마도 낼모레면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 탓인지도 모르겠다. 눈이 따갑고 어깨가 결리며 등이 욱신거리는 것도 모두 나이 탓이겠지. 적어도 평소에 운동이 부족했던 이유는 아니리라.
온가족이 하릴없이 길바닥에서 시간을 내다버릴 이유는 없었기에, 아내와 딸아이는 다음날 학교를 마친 후 저녁 비행기를 타고 내려올 계획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큰 배에다 차를 실은 후 터미널에서 서피스를 꺼내 연재글의 예고편을 썼다. 제주도 보름 살기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숙소에 컴퓨터가 없다는 점이었다. 다행히도 내게는 몇 년 전에 업무용이라는 핑계를 대어 가며 구입했던 서피스가 있었다. 몹시 유감스럽게도 게임을 즐길 만한 성능은 못 되지만 그래도 글을 쓰는 데는 무리가 없다.
배를 타고 가는데 다시 두 시간 반이 소요되었다. 고속 선박인 블루나래를 타면 한 시간 반도 안 걸린다는데, 내가 탄 배는 하필 완행인 실버클라우드였다. 대신에 배가 큰 덕택인지 흔들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여서 뱃멀미는 없었다. 바다 한복판에서는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체험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배는 항구에 도달했다. 마침내 제주도였다.
세차게 퍼부어지는 소독약의 세례를 뚫고 부두를 빠져나간 후 내비의 안내에 따라 숙소로 향했다. 제주도 북동쪽 비자림 인근에 위치한 숙소로 가는 길은 으슥한 삼나무로 둘러싸인 도로였다. 밝은 낮에 보았더라면 또 느낌이 달랐을지 모르지만, 해질녘에 지나가는 삼나무 길은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와 고개를 휘저을 것 마냥 을씨년스럽고 으스스했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목을 구부정하게 구부린 채 운전대를 잡았다
마침내 숙소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문 저녁 여덟시였다. 아침 여덟 시에 출발했으니 꼬박 열두 시간 걸려 도착한 셈이었다. 일단 현관문을 연 후에 자동차까지 너덧 번을 왕복해 가며 가방 다섯 개와 박스 둘, 그리고 대형 캐리어 하나를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나 혼자만의 여행이라면 모든 짐을 죄다 합쳐도 가방 하나에 충분히 들어가련만, 아내가 싼 짐은 마치 세간살이의 절반을 짊어지고 온 것만 같았다. 그러나 투덜거릴 수는 없었다. 투덜거리다가 날더러 짐을 싸라고 하면 큰일이니까. 아내가 스스로 맡아서 하는 일에는 간섭하는 대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지켜보는 게 정답이라는 진리를 나는 결혼하고도 오륙 년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깨달았다.
선내 편의점에서 미리 사둔 컵라면으로 저녁을 대신한 후 숙소 안을 둘러보았다. 1층은 거실과 부엌과 화장실. 2층에는 침실 셋과 화장실. 3층은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다락방. 삼인가족이 묵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큰 집이다.
하지만 이건 아내가 의도한 바였다. 처음 ‘제주도 보름 살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상상했던 고즈넉한 전원생활과는 달리, 아내는 친구와 직장동료와 가족들과 기타 등등 여러 사람들을 잔뜩 초대하여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고 노는 삶을 꿈꾸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도 묵을 수 있도록 방이 여럿 딸린 큰 집을 구했다고 했다. 오겠다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탓에 결국 그 시도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그래도 대략 사오일 가량은 다른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에 같이 있게 될 예정이다. 그 정도면 됐지 뭐. 나는 그렇게 납득하며 거실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밤 열시 반. 가만히 앉아 있으니 사방이 고즈넉한데 멀리서 풀벌레 소리만이 어렴풋이 들려온다. 집은 도로변에 인접해 있지만 늦은 시간에는 차가 한 대도 다니지 않는다. 서울에서는 불을 죄다 끄고 커튼을 쳐도 그 틈새로 어떻게 해서든 빛과 소음이 비집고 들어오는데, 제주도 비자림 인근에 위치한 이곳은 너무나도 고요하다. 제주도에서의 첫날밤이 이렇게 느지막이 저물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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