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삼국 시대 시기 구분(펌)
제 1기( 891~900 ): 신라의 통치붕괴와 군웅할거 시대
남국 신라의 말기적 증상이 도를 더해가고 중앙과 지방, 지배층과 피지배층과의 모순이 극도로 높아지자, 마침내 891년( 진성왕 3년 ) 일어난 원종( 元宗 )과 애노( 哀奴 )의 반란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벌떼처럼 군웅들이 할거하기 시작한다. 도적들과 호족들, 그리고 농민군들이 신라 중앙정부, 혹은 서로끼리 패권을 다퉈간다. 이때는 엄밀히 말해 후삼국의 준비기간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시기는 백제( 후백제 )와 고려( 후고구려 )가 각각 건국됨으로써 끝난다.
제 2기( 900~918 ): 백제와 태봉의 제 1차 후삼국 정립 시대
각지에서 일어난 군웅들은 격렬한 경쟁을 해가며 세력을 확대한다. 군웅들 가운데 도태가 진행된 가운데, 가장 거대한 세력으로 자라난 진훤( 甄萱 )과 궁예( 弓裔 )가 백제와 고려를 세우니 이때부터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들은 서로간 패권을 다퉈가며 신라의 강역을 잠식해 들어간다. 신라 중앙정부는 더이상의 토벌을 진행치 못한채 방어만을 고수하고 마침내 통일 이전의 강역으로 후퇴하게 된다. 게다가 왕통은 박씨로 교체되면서 더더욱 쇠약해진다. 신라가 무력해지자 백제와 태봉은 라주, 사화진, 덕진포 등에서 서로간의 통일 전쟁을 전개하게 된다. 이 시기는 궁예가 고구려 유민들을 무시하고 신정 전제정치를 하게되자 왕건이 태봉을 전복하고 고려를 세우면서 끝나게 된다.
제 3기( 918~927 ): 백제와 고려의 제 2차 후삼국 정립 시대( 상기 )
고려를 세운 왕건은 내부안정화로, 백제의 진훤은 외부강역을 잠식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로간의 화평을 도모하게 된다. 920년, 백제가 신라의 대야성 방어선을 붕괴시키고 신라가 방어능력을 상실하자, 고려는 간접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드디어 전운이 짙어진다. 924년, 고려와 백제는 조물성에서 무력 충돌을 감행하나 다시 휴전에 들어간다. 그러나 휴전은 얼마가지 않고 다시 고려와 백제는 무력으로 대결하며 통일 전쟁을 시작한다. 고려와 백제가 새롭게 일어나는 군웅( 왕봉규, 박언창 ) 등을 제거해가면서 외정과 내치를 하며 통일 전쟁을 가속화하는 가운데 쇠약해진 박씨 왕통의 신라는 고려에 접근하게 되고 이에 진훤이 금성으로 쳐들어가 김씨 계통으로 신라왕를 갈아치움에 따라 이 시기는 끝나게 된다.
제 4기( 927~935 ): 백제의 고려의 제 2차 후삼국 정립시대( 하기 )
백제의 진훤은 금성으로 쳐들어가 신라를 괴뢰화시키고, 이어 공산, 강주, 무곡성, 의성부성에서 고려를 패배시키면서 당분간 백제의 성세가 된다. 930년, 고창에서 고려가 백제를 대패시킴에 따라 전세는 다시 뒤집혀 신라는 다시 고려의 괴뢰가 되고 만다. 이때 신라는 이미 모든 능력을 상실한채 통일 이전의 땅에서조차 고려와 백제가 벌이는 쟁탈전에 속수무책으로 있었다. 계속된 통일 전쟁에서 서서히 고려의 우위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시기는 백제의 왕위계승 문제로 진훤이 장자 진신검( 甄神劒 )에게 보위를 찬탈당하고 고려로 귀부하면서 끝난다.
제 5기( 935~938 ): 후삼국 정립의 종말과 중세 시대로의 이행
진훤의 고려 귀부로 승패는 결정적이 되고 이에 따라 신라는 마침내 935년, 고려에게 흡수됨으로써 1천 년 제국은 멸망한다. 고려는 내부분쟁으로 쇠약해진 백제를 936년, 일리천에서 대파시키고 완산주를 점령함으로써 백제 또한 45년 만에 멸망하고 후삼국 시대는 종말을 맞는다. 신라와 백제 잔당들을 진정시키는 가운데 938년, 탐라국이 복속함과 함께 삼한은 완전 통일된다. 허나 대립되는 정권들이 소멸한 것에 불과하며 호족들은 존재하여 고려 초기의 지배층을 구성하게 되며 고려 초의 왕위분쟁에 간여하게 된다.
* 후삼국 시대 주요 전투(펌)
후삼국시대는 신라의 사회구조가 급격히 파괴되고 새로운 변화를 맞는 개혁의 시기였다. 그 시기 속에 후삼국은 서로 투쟁하며 많은 전쟁을 겪는다. 혼란의 시기이자 투쟁의 시기였던 만큼 전쟁은 국가의 존망을 좌지우지했으며 전쟁에 따라 후삼국시대의 판도도 변화해갔다. 후삼국시대의 판도를 바꾸었던 주요전투에 대해 살펴보자.
*비뇌성 전투(899.7)
양길의 원조를 받아 군대를 얻은 궁예는 명주(강릉)지역을 장악하는 것을 기점으로 강원도 일대와 패서지역의 호족을 장악함으로써 큰 세력으로 급부상한다. 그러자 양길은 너무나 커진 궁예의 세력에 위기를 느끼고 지방 성주들의 군대를 모아 북진한다. 궁예 또한 양길의 군대에 맞서 남진, 비뇌성을 기점으로 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양길은 대패하고 역사에서 이름이 사라졌으며 궁예는 양길의 세력까지 흡수, 국토의 2/3를 차지하는 쾌거를 이룬다.
*나주전투(909)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로 굳혀진 판도는 후삼국시대로 정립된다. 후고구려와 후백제는 패권을 다투며 국지전을 펼친다. 이 와중에 왕건은 나주를 재차 공격하면서 허를 찌른다. 진도와 고이도를 공략한 왕건은 더 깊숙이 내습하며 견훤의 배후를 뒤흔든다. 그러자 견훤은 수군을 이끌고 왕건을 압박, 수적으로 불리했던 왕건군은 한때 수축되지만 왕건의 지휘 아래 움직인 수군은 화공을 펼쳐 후백제의 수군을 격파시킴으로서 백제의 배후를 계속 교란할 수 있게 되었다.
*조물성전투(925.10)
궁예를 쓰러뜨리고 고려를 창건한 왕건은 내부의 혼란을 잠식하고 안정을 꾀하였다. 이 때 견훤은 금강(수미강)과 양검을 보내어 조물성에서 격전을 벌였다. 고려장수 애선을 죽이는 전과가 있었지만 조물성을 함락시키진 못하였다. 그러자 견훤은 직접 정예기병 3천을 이끌고 조물성을 공격, 왕건과의 육지에서 첫 일전을 벌인다. 그 결과, 팽팽한 균형 속 승부가 나지않자 견훤과 왕건은 휴전을 맺고 돌아간다. 조물성전투는 이후 견훤과 왕건의 전투의 서막을 알리는 뜻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다.
*공산전투(927.9)
견훤은 신라 급습하여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죽이는 쾌거를 이룬다. 그러자 왕건은 신라의 구원 소식을 받고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급히 출동한다. 그리고 왕건은 견훤이 돌아가는 길목을 지키다가 견훤을 기습하는 전략을 세운다. 공산 동수를 지키고 있던 왕건은 견훤의 군대를 만나자 기습하였으나 오히려 견훤의 군대에게 전멸당했으며 장군 신숭겸은 왕건을 구하고 전사, 이외 김락 등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대승을 한 견훤은 이후 고창전투 이전까지 고려를 압도하게 된다.
*고창전투(930.1)
견훤에게 번번히 패하며 밀리고 있던 왕건은 고려의 고창성이 견훤에게 포위되자 다시한번 견훤과 일전을 맞는다. 한 달을 넘기며 계속된 전투는 왕건에게 점점 불리해졌다. 그때 고창의 호족 김선평, 권행 등이 고려를 지원하면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된다. 이로써 견훤의 군대는 참패하고 이 격전으로 8천명이 전사, 참모 김악 등이 잡히고 말았다. 이 전투 이후 다시 전세는 역전되어 왕건이 후삼국의 패권을 잡게된다.
*운주성전투(934.9)
전세가 점점 왕건쪽으로 기울면서 왕건의 공세는 더 거세진다. 왕건이 운주성을 공격하자 진훤은 갑사 5천을 이끌고 운주성에서 맞섰다. 견훤은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위해 휴전을 제의했으나 왕건은 거부, 오히려 유금필에게 기병을 보내 견훤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그 결과 휴전을 노렸던 견훤의 군대는 격파당했고 3천명이 전사, 견훤의 참모 종훈, 의사 훈겸, 용장 최필, 상달이 생포되었다. 이로써 왕건은 패권주도를 더욱 굳혀나갔고 더불어 통일의 승기를 잡게되었다.
*일리천전투(936.9)
견훤을 쫓아내어 왕위를 얻은 신검은 후백제의 다수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노린 왕건은 항복한 견훤을 위시하고 국가의 총력을 다해 일리천에서 국운을 건 일전을 벌인다. 왕건의 군대가 8만명이 넘었을만큼 후삼국역사상 가장 많은 대군을 동원한 통일전투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전투는 견훤을 내쫓은 신검에게 불만을 품은 장병들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신검의 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고 결국 신검이 항복하면서 전란은 끝이 났다.
코에이 삼국지 게임식으로 나눠보면
1. 신라의 몰락과 농민반란 (891년)
- 천년을 이끌어온 신라가 진성여왕의 실정으로 무너져내리고 각지에서 민중들이 반란을 일으켜 전국은
혼란상태에 빠지게 된다.
선택 : 신라(진성여왕), 발해, 원종, 애노, 아자개 등...
2. 군웅할거 시대의 성립 (892년)
- 신라의 장수였던 견훤은 백제의 옛 땅으로 가 후백제의 건국을 공표하고 경문대왕의 아들인 궁예는 기훤
밑에서 기회를 엿본다.
선택 : 후백제(견훤), 신라, 발해, 아자개, 기훤, 양길, 김순식, 수달, 왕륭 등...
3. 궁예의 독립과 비뇌성 전투 (899년)
-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는 독립하게 되고 양길과 북쪽의 패권을 놓고 벌이는 비뇌성전투에 모든걸 걸게 되고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궁예에게 항복한다.
선택 : 후백제(견훤), 신라, 발해, 궁예, 양길, 아자개등...
4. 후고구려의 건국과 후삼국의 정립(902년)
- 궁예는 비뇌성전투에서 양길을 무찌르고 후고구려를 세우며 견훤의 후백제와 신라와 함께 후삼국이 성립된다.
선택 : 후고구려(궁예), 후백제(견훤), 신라, 발해, 아자개등...
5. 고려 건국(918년)
- 만년에 실정을 거듭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다. 이제 왕건의 고려와 견훤의 후백제가 삼한통일을
걸고 한판 대결에 돌입한다.
선택 : 고려(왕건), 후백제(견훤), 신라, 발해...
6. 견훤의 신라침공과 공산 전투(927년)
- 견훤은 신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운다. 이에 놀란 왕건은 견훤을 징벌하러 공산으로 출진한다.
선택 : 고려(왕건), 후백제(견훤), 신라, 발해...
7. 천하통일(936년)
- 견훤의 아들 신검은 견훤을 몰아내고 후백제의 왕위에 오르며 견훤은 왕건에게 귀부한다. 신라의 경순왕은 왕건에게
나라를 내주고 천년역사의 신라는 종말을 고한다. 왕건은 신검을 무찌르고 삼한 통일을 위해 일리천 전투에 임한다.
선택 : 고려(왕건), 후백제(신검)
출처 : 한국의 유일한 전국시대, 후삼국시대카페
http://cafe.naver.com/hus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