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7년 헝가리 출신의 젊은 의사 이그나츠 제멜바이스는 그해 빈 종합병원에 산부인과 부과장으로 승진했다. 제멜바이스는 매우 여린 감수성이 예민한 성격으로 특히나 다른 사람의 고통에 민감한 사람이다. 그는 병원에 오기 전에 건강한 산모들이 출산 후 10명 중 1명꼴로 분만 후에 생겨난 상처에 감염되어 고름이 생기고 고열로 죽는 산욕열이 그해는 산모 6명 중 1명이 죽어가는 것에 심각성을 느껴 좌절하며 이 죽음을 멈추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골똘히 매진했다.
당시에 의사들이 산욕열의 원인으로 추측하던 몇 가지 요소들을 살펴보면
-임신 초기 몸을 꽉 죄는 코르셋이나 속옷을 입어 자궁을 압박하여 내장에 배설물이 배설되지 못해 불순물 중 일부가 혈관으로 새어 나가게 하는 산모의 잘못-
-방안에 공기, 공기 중에 떠도는 독기, 또는 모유를 통한 전이-
-분만실로 유입된 더러운 공기-
-남성 의사의 존재 자체, 남성의사가 산모의 정결을 다치게 해 병리학적 변화를 여기 하는 것-
-감기에 걸리거나 잘못된 음식을 섭취하거나 출산 직후 병동으로 돌아가기 위해 분만실에서 빨리 일어나는 행동-
등 의사들은 사망원인이 대부분 산모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제멜바이스는 경악할만한 산모들의 사망률에 의사들은 정작 원인을 잘 모른다고 단정 지었다. 되려 병원에서 출산을 하는 것 보다 집에서 산파의 도움을 받아 출산을 하는 것이 병원에서 출산을 하는 것 보다 산욕열로 사망할 확률이 60배나 낮은 것에 대해 그는 이 수수께끼를 풀고자 자료수집에 매달렸다.
자신이 일하는 병원의 산모 사망률을 분석한 결과 기묘한 패턴을 발견했다. 산부인과는 두 개의 병동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남성 의사와 제자들이 운영하는 산모들의 사망률에 비해 산파들과 그 제자들이 운영하는 병동의 사망률이 두 배 이상 낮은 것이다. 왜 의사 병동이 사망률이 두 배 이상 높은 것인가에 해서 여러 가지 의심을 해보았다. 의사 병동에 입원한 환자가 몸이 더 약한 것인가? 하지만 산모들은 하루 주기로 번갈아 병동에 배정되기에 환자들의 건강 상태는 비슷했다.
그러면 정말 남성 의사의 문제인가 생각해 봤다. 신생아 사망률에 있어 산파 병동 보다 높았지만 남아와 여아의 사망률에 차이는 없었다. 따라서 남성의 존재가 높은 사망률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은 신빙성이 낮았다. 의사 병동에 수용된 환자들은 지나치게 겁을 먹어 병에 걸린다는 이론도 있었지만 다른 곳에서 겁먹어서 산욕열에 걸린 일은 없었다.
따라서 제멜바이스는 의사 병동에 뭔가 산욕열을 일으키는 특정한 원인이 있을 거라고 추론했다. 그 와중에 그는 몇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 지저분한 거리에서 아이를 낳은 후 병원을 찾은 여성들조차 도 열병에 걸리지 않았다.-
-24시간 이상 진통을 겪은 여성들은 거의 예외 없이 병을 앓았다.-
- 의사들은 산모나 신생아들로부터 병이 옮지 않았다.- 따라서 이 병은 전염병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혼란스럽고 의문 투성이인 산욕열의 발병 원인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고 단 한 가지 사실은 여전히 엄청나게 많은 산모가 목숨을 잃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어느 날 제멜바이스는 어느 비극적인 사건을 경험하고 그 원인을 찾았다.
빈 종합병원 해부실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날도 의학 교수는 제자들에게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를 가르치기 위해 시체를 부검하고 장기를 만져보고 혈관과 소변, 담즙을 조사했다. 이제 제자에게 나이프를 넘겨주는 찰나 제자가 놓친 나이프는 교수의 손가락을 스쳤다. 그날부터 교수는 수많은 산모들이 사망한 것 처럼 늑막염, 심낭염, 복막염, 뇌막염 등의 병으로 사망했다.
교수에 죽음은 제멜바이스에게 한가지 결론을 내려줬다. 교수에게 스친 나이프에 묻은 시신의 성분이 혈관에 침투하여 병을 일으켜 사망케 했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동안 의사와 학생들은 해부대에서 실습을 마치고 엉성하게 손을 씻은 후에 곧장 산과 병동으로 가서 출산을 돕고 치료를 했다. 그렇다. 산욕열을 일으키는 원인은 바로 `의사` 그들이었다. 시신의 병균을 산모들에게 옮기고 있었다.
그는 의사들과 제자들에게 산과 병동으로 가기 전에 반듯이 염소 용액으로 소독하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그러자 18%로 였던 산모 사망률이 1~2%대로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예방법은 주류 의료계에서 철저히 배척됬다. 권위적이며 오만했던 다른 의사들에게 식민지 출신에 헝가리인 제멜바이스의 주장은 무시당했고 본인들에게 산욕열의 원인이 있다는 것에 대해 외면했다.
결국, 그는 1849년 일자리를 잃고 헝가리로 돌아간 후 국제 산부인과학회에 여러 차례 자신의 주장을 담은 논문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 뿐이였다. 이에 비관하고 약해진 그는 1865년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패혈증에 걸려 사망했다. 결국, 그의 주장은 30년이 지난 후 1880년 세균 감염에 관한 연구를 한 파스퇴르에 의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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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200여년전만 해도 넣어도 모자랄 피를 뽑고, 수은을 몸에 때려박는 게 정통 의료적 치료법이던 시기입니다(1799년 조지 워싱턴 죽음 당시의 치료 기록).
워싱턴보다 몇십년 더 위로 가면 루이 14세의 주치의는 건강에 좋지 않다며 이빨을 몽땅 뽑아버립니다(...) 몸을 절대 씻지 말라고 권유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