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영화를 한번 보고 다 알았다!!!라고 쓰는 건 우스운 짓입니다. 좀 캐쥬얼하게 이야기해야 떠드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다 덜 부담스러울 거에요.
귀찮아서 캡쳐는 안합니다. 이상윤 평론가의 GV도 그렇게 대단한 내용은 없어서 딱히 적을 게 없네요.
1. 영화는 살짝 밝은 시뻘건 색의 화면으로 시작합니다. 야하고 유치해요. 이런 색깔에서 자연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인공적인 색이니까요. 뒤이어 알렉스와 일당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전라의 여자 마네킹 위에 발을 올리고 우유를 먹으며 카메라를 노려봅니다. 우유를 먹는 걸 보니 알렉스는 아직 젖을 먹어야 하는 어떤 성장기에 있는 걸까요? 혹은 아기만큼 순진한 존재일지도요.
2. 불쾌한 색깔, 불쾌한 음악, 불쾌한 장식, 불쾌한 표정의 인간을 영화는 연속으로 보여줍니다. 이것은 관객을 향한 명백한 도발입니다. 카메라는 뒤로 물러나며 알렉스의 주위를 비춥니다. 영화 속 세계는 알렉스로 첫 운을 뗍니다. 알렉스에서부터 영화 속 세계가 시작됩니다. 영화는 알렉스의 나레이션을 따라 흘러갑니다.
3. 울트라 바이올런스!! 이들은 몰려다니며 노숙자를 패고 다른 패거리를 팹니다. Home이라 적힌 곳을 들어가 집주인을 힘으로 제압하고 집주인의 아내를 희롱하고 강간합니다. 형식주의 영화라 이들의 폭력이 상징적으로 다가올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인공미가 가득한 공간에서 오로지 폭력만이 통제를 당하지 않고 펄펄 날뜁니다. 현대 미술관 안에 고릴라 네 마리를 풀어놓은 걸 보는 기분이죠. 통제와 통제불능의 상태가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알렉스 일당의 만행이 더욱 도드라집니다. 거기에는 오로지 폭력을 행하는 자의 쾌락과, 폭력에 당하는 자의 고통만 있습니다. 인간적인 모든 요소를 제거하고 가해자와 피해자만을 늘어놓는거죠.
4. 이 통제불능의 무리 안에도 알렉스가 질서를 대신하고 나머지 동료를 “통제”합니다. 어디에서건 통제가 뒤따르는거죠. 규칙과 통제는 문명의 발견 같은 게 아닙니다. 짐승시절부터 가지고 있는 습성이죠.
5. 강자인 알렉스 무리는 약자인 노숙자에게 폭력을 행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냥 짜증나니까 패는 거에요. 이들은 빌리보이 일행과 싸움을 벌입니다. 거기에는 벌겨벗겨진 채로 농락당하는 여자가 있지만 이들은 여자에는 신경도 안씁니다. 이들의 싸움에는 선악이 전혀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역 다툼을 벌이는 짐승처럼 싸워요. 알렉스의 폭력에는 너무나 말초적인 욕망밖에 없어서 보는 사람이 더 불쾌해집니다. 폭력의 변명거리를 찾을 수가 없거든요. 정의, 저항, 복수 이런 명분 자체가 없는 거에요. 그리고 작가의 집에서는 지성과 선의, 그리고 최소한의 조심성마저 완벽하게 박살납니다. 안전장치를 다 부숴버리는 것 같아서 정말 기분이 안좋아져요.
6. 그렇다고 이들에게 과연 어떤 응보가 다가올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스페이스 오뒷세이와 비슷한 구성입니다.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대를 감안한다면, 원시인 시절부터 아무 것도 나아진 게 없는 알렉스 패거리의 폭력이 훨씬 더 암울하고 불편하지만요.
7. 정말 최악인건, 이 불쾌감 가득한 폭력씬들을 일부러 뮤지컬씬처럼 의도했다는 겁니다. 쥐어팰 때마다 프레임은 역동적으로 떨리고 음악은 흥겨워요. 작가의 집에 침입했을 때는 외부에서 나오는 음악도 없습니다. 알렉스의 입에서 Singing in the rain이 흘러나와요. 감독이 직접 판을 깔아주면서 사운드트랙으로 폭력씬들을 즐겁게 만들었다면, 이제 그 사운드마저 폭력씬에 완벽하게 하나가 된 장면을 관객들이 즐기게 놔두는 겁니다. 음악과 폭력이 영화 속에서 하나가 되고, 폭력의 일부가 된 순간에 관객들이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신나는 느낌이 들게끔 유도하는거죠. “왜? 내가 음악 깔아줄 때는 그래도 신난다고 알렉스 일행의 패싸움을 봐댔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 현장을 더 생생히 느껴보라고? 감독인 나는 빠져있을게~”
8. 큐브릭 감독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저는 <사랑은 비를 타고>를 즐겁게 볼 수가 없겠네요. 이 감독은 언젠가 볼려고 했던 영화와 즐겁게 들을 수 있는 노래를 완벽하게 망쳐놓았습니다.ㅠ <샤이닝>에 나오는 Midnight with the stars and you는 잔인한 장면이 아니라서 지금도 흥얼거리지만…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기분 좋은 영화는 아닐 겁니다. 제가 원곡의 주인이라면 큐브릭 감독을 어떻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건 곡을 어울리지 않게 쓴 정도가 아니잖아요. (재미있는 일화들이 있군요, 댓글러들이 달아주실 거에요 ^^)
9. 알렉스가 이렇게 된 이유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부잣집 아들내미에요. 부모님들도 선량하고 온화한 분들입니다. 그렇다고 대단한 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불가해의 짜증이 더 커집니다. “미친 놈”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아요. 알렉스에게는 분명한 지성이 있고 사리분별이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눈치도 보고 거짓말도 하고 자신의 생활에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적당히 맞춰주는거죠. 뭔가가 알렉스를 이렇게 바꿨을까요? 그보다는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놈”이라는 답이 더 어울리겠죠.
10. 하이 하이 하이 미스터 델토이드~ 몇번 사고를 쳤는지 교화 선생 비스무레한 사람이 집에 찾아옵니다. 팬티바람의 알렉스에게 능글맞게 굴면서 으름장을 늘어놓고 갑니다. 그런데 이 인간도 멀쩡한 인간은 아닙니다. 자기가 욕먹기 싫으니까 고장난 기계 손보듯 알렉스를 혼내는거죠. 이 사람은 설득을 하지 않습니다. 협박하죠. 그러면서 알렉스의 성기를 내려칩니다. 인간의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 이성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욕망의 근원을 통제하려는거죠. 그것도 매우 무식하게, 너 이렇게 하면 고통을 당할거다 라면서 가장 약한 부분에 자극을 주는 방식으로요. 앞으로 나올 루드비코 치료법의 복선이라고 볼 수 있겠죠.
11. 알렉스가 우주대깽판을 쳤던 그 집의 주인들은 죽거나 반병신이 되었다고 신문에 나옵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요. 영화는 알렉스의 방을 자세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제를 던지죠. 예술? 그게 뭐? 까고 있네, 라면서 예술을 예술로 까내리고 있습니다. 폭행 강간을 제외한 알렉스의 취미가 뭐냐면, 바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듣는 겁니다. 인간성 조각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 취미는 더럽게 고상하죠. 이 영화….뭐가 좀 와리가리합니다.
12. 여기서 좀 웃기는 시점의 전환이 생깁니다. 알렉스가 베토벤 (미니) 테이프를 재생합니다. 카메라는 베토벤의 초상화로 줌업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어떤 여자의 그림을 “위에서 아래로” 찬~찬~히 흝어내립니다. 마치 베토벤 본인이 여자 나체를 훔쳐보는 것처럼 의도하고 있어요. 그리고 여자의 성기 부분에서 탐스러운 뱀이 머리를 들이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내려가면 여자의 엉덩이 부분 바로 아래 예수님 조각상이 네개가 있습니다. 하나면 충분하고, 보통 하나밖에 없는 예수의 조각을 무려 네개를 연달아 붙여놓으니까 성스러운 느낌이 아예 없어집니다. 원래라면 십자가에 달려있어야 할텐데요. 그래서 발가벗은 예수상이 괜히 민망하게 보입니다. 예수 네 명이 발레하는 것 같이 보이죠. 그리고 영화는 대놓고 예수상들을 “리듬에 맞춰서” 보여줍니다.
13. 이미 첫 장면부터 관객들은 헉, 저 남사스러운 것은 뭐시여….라며 반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네킹 여자 나체, 울부짖는 여자 나체, 그림 속 여자 나체, 아주 나체들이 끝도 없이 나와요. 그런데 영화는 음악으로 계속 고상을 떱니다. 그리고 인간막장군단의 슈퍼 리더 알렉스는 예술적 인간이란 말이죠. 작가 집을 풍비박산낸 후 술집에 들러서도 유일하게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던 여자 가수의 노래를 즐기고 가치를 알아채는 인물이잖아요. (뚱땡이 띨띨이를 지팡이로 후려치는 게 너무 신속정확해서 좀 웃기더군요)그냥 막장인가? 싶으며 예술이 나오고 예술인가? 싶으면 외설과 막장이 나오고.
14. 영화는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미적 가치의 서열을 아주 배배 꼬아 놀리는 겁니다. 아 예, 예술. 그거 참 고상하죠. 교양인의 증거 아닙니까? 여기 알렉스 똘마니 덩치는 마약 탄 우유나 처마시고 부우우 하며 야유나 하죠. 아, 그런데 막장 오브 막장인 알렉스가 그 고상한 예술을 이렇게 즐길 줄 아는군요. 저 인간 쓰레기도 즐기는 예술 참 고상도 하네요? 알렉스 방안에 걸려있는 나체 그림이랑 베토벤 초상화랑 뭔 차이가 있을려나요? 예술에서 인간성의 증거를 찾고, 이성적 존재로서의 바운더리를 긋던 사람들은 벙찔 겁니다. 인간은 원숭이랑 달라!! 예술을 만들고 이렇게 즐길 수 있잖아! 라고 떠들었는데 방금 강간하고 돌아온 원숭이 같은 인간이 이렇게 알아봐주는 게 예술인 거니까요.
15. 그런데…..알렉스 이 자식 말투가 참 짜증납니다. 꼭 같은 말을 반복해서 사람 신경을 긁습니다. 말컴 맥도웰 이 배우의 목소리 톤 자체가 듣기에 썩 유쾌하진 않네요. 하이 하이 하이~
16. 설교 들을 거 다 듣고, 알렉스는 쫙 빼입은 후 여자들을 꼬시러 나갑니다. 알렉스는 천연덕스럽게 여자들에게 접근한 후 헌팅에 성공합니다. 이 때 알렉스가 이들을 꼬시는 미끼는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자기 집의 설비죠. 보다 상위의 예술은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집에 와서 정말 섹스 밖에 안합니다. 빠르게 돌아가는 화면 속에서 섹스 섹스 섹스 섹스….. 옷을 입으면 다시 벗기고 섹스, 둘이서 섹스, 셋이서 섹스. 이들이 섹스를 하는 공간의 중심에는 베토벤의 얼굴이 있습니다.
17. 알렉스의 부하들이 아파트를 찾아옵니다. 이들의 말투는 이전과 달리 반항적입니다. 한탕 계획을 들으며 화를 누그린듯이 걷던 알렉스는 강가에서 건방 떨던 녀석들을 조집니다. 여기서 알렉스의 폭력이 발현되는 과정은 순수하고, 모욕적입니다. 알렉스는 정치의 수단으로 폭력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열 받아있는 상태에서, 하필 어떤 차가 지나갈 때 자기가 좋아하는 베토벤의 교향곡이 나오자 개기던 녀석들을 패기 시작하죠. 알렉스는 이것을 “영감”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영감은 “예술”에 의해 자극받고 행동으로 이어지죠. “폭력”과 “예술” 그리고 “신성”은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원숭이 무리랑 하는 짓이 똑같은데도 말이죠.
18. 본 때를 보여주고 나자 알렉스는 다시 지도자가 어쩌니 하며 자신의 조직을 챙깁니다. 폭력은 분노에 의해 나타나지만 폭력을 다스리는 과정은 이성적인 필요악처럼 그려지죠. 그리고 이들은 강도질의 계획을 세웁니다.
19. 범죄 대상이라고 나타나는 할머니의 등장도 별로 멀쩡하진 않습니다. 요가를 하면서 화면 중앙에 국부를 떡하니 드러내는 할머니를 관객은 봐야하죠. 집안에는 수십마리의 고양이가 돌아다니고 집에는 여성의 나신을 쌕스럽게 그린 작품들이 벽에 걸려있습니다. 이전번에 했던 방식으로 알렉스는 집에 들어가려 하지만 이 할머니는 의외로 조심스럽습니다. 문을 열어주지 않자 벽을 타고 알렉스는 방에 침입합니다.
20. 늙은 여자가 역정을 내보지만 알렉스는 콧방귀도 안뀝니다. 그리고 이 할머니를 놀려대기 시작하죠. 할머니가 소중한 예술품이니 건들지 말라고 하는 “Jaji조형” (이렇게 써야 영화의 느낌이 좀 납니다. “성기”라는 표현은 너무 점잖아요) 을 까딱까딱 누르다가 결투를 시작하죠. 할머니는 예술가의 토르소를 들고, 알렉스는 “Jaji 조형”을 들고 술래잡기를 하듯 서로의 흉기를 휘둘러댑니다. 한방 먹이는 데 성공했지만 할머니가 젊고 무례한 알렉스를 어떻게 이기겠어요.할머니는 ”Jaji 조형”에 맞아 죽습니다. 저질과 우아함의 대결에서 저질이 압승을 거뒀군요.
21. 타이밍 좋게 경찰차가 들이닥치고, 도망가려던 알렉스는 동료들에게 배신당합니다. 이 때 하필 처맞는 도구가 “우윳병”입니다. 이들이 늘 즐기던 음료니 미래적인 술병으로 읽을 수 있을테고, 이들의 유아적인 사회 생활이 그렇게 파탄났다는 걸 보여주기도 하는 거겠죠.
22. 경찰서에서 알렉스는 취조를 당합니다. 그리고 경찰들한테 개기다가 꽤나 험한 꼴을 당하죠. 여태 폭력을 휘두르던 알렉스가 폭력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공권력 앞에서 철저한 약자가 되는 거죠.
23. 국가의 공권력이 한 개인을 얼마나 압살하는가, 이런 이야기는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도 다 어디선가 들어봤고 떠들어대는 이야기니 굳이 저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24. 교도관의 통제는 알렉스의 지배보다 훨씬 더 야만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나긋나긋 속삭이고, 고상한 어투로 말하는 알렉스보다 그저 명령형으로 내내 소리만 지르잖아요. 여기서 큐브릭은 관객을 놀리는 듯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일단 다른 영화들이 그러는 것처럼 옷을 다 벗은 알렉스의 성기를 앞에 놓인 상자로 절묘하게 가려놓죠. 그 다음에는 상자 뚜껑을 치우고 알렉스의 “Jaji”를 떡하니 꺼내놓습니다. “내가 가려줄 줄 알았어?” 하고 비웃는 것 같더군요.
25. 교도소에서 성직자의 교육 장면이 나옵니다. 가장 성스럽고 오래된 정신 교육의 교재, 바로 종교가 나오죠. 이 목사는 이해나 공감의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위에 선 자로서 내내 협박조의 말만 하죠. 사기꾼이랑 별로 다를 것도 없습니다. 이 신성치 못한 설교 도중 알렉스는 내내 동성애자들의 끈적한 신호를 받습니다. 이들의 제복이나 십자가 문양은 나치를 떠올리게 합니다.
26. 알렉스는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나 교화에 의한 개심 같은 건 씨알도 안먹히는 소리죠. 이 신성한 책에서 알렉스가 관심을 보이는 건 폭력과 성적인 장면들 뿐입니다. 알렉스는 정말 답이 없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인간의 역사 기원부터, 가장 영적인 기록에서도 인간의 폭력은 늘 함께 했던 거죠.
27. 목사는 이런 알렉스의 본성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알렉스를 655321이라는 죄수 번호로 호칭합니다. 신을 대표하는 자가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인간으로 대하지도 않는 거죠.
28. 목사는 자유의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선택으로 “선해져야” 한다고 말이죠. 여기서 어떤 의문이 떠오릅니다. 선택을 할 수 있으니 “자유의지”가 맞기는 하겠죠. 그런데 결국 “선해져야” 한다고 방향이 미리 정해져있으니 이건 일종의 답정너가 아닐까요?
29. 알렉스는 교도소를 방문한 장관에게 자기 홍보를 하고, 이게 먹혀서 루드비코 치료법의 실험자로 채택됩니다. 나가기 전, 교도소장은 자기 입으로 교도소란 시스템이 교화가 아니라 단순한 복수라고 이야기합니다. 알렉스를 안내하는 교도소 간부는 아주 못마땅해서 죽을려고 하지요. 인간의 교화에 회의적인 인간들에 비해 병원의 사람들은 훨씬 더 지적이고 선량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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