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갑니다~
30.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됩니다. 눈꺼풀을 열어젖힌채 알렉스는 폭력적인 장면들을 계속 시청하는 “루드비코 치료법”을 겪습니다. 첫 실험에서 알렉스는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화면 속 폭력은 아름답다, 어떤 장면들은 화면을 통해서 볼 때 더 진짜같이 보인다, 라고 말이죠. 음, 이건 지금 <시계태엽 오렌지>를 보는 관객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 아닐까요?
31. 알렉스는 구토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실험이 끝날 때쯤에는 몸서리를 칩니다. 그 다음날에도 이어질 실험에 대해 설명을 들으며 고통을 하소연하지만 의사선생님은 단호하게 말하죠. 폭력은 끔찍한 거야! 그러니 너를 치료하기 위해선 폭력의 끔찍함을 겪게 해야해! 진보한 기술 역시도 폭력의 연장선상에 블라블라는 따분하니 넘어가죠.
32. 제가 흥미롭다 생각했던 것은 “영상기술”에 대한 이 영화의 관점입니다. 영상은 현실을 더 현실적으로 체험시킬 수 있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폭력적인 무언가를 아름답게 보이게 만들죠. 동시에 현실을 그대로 체험하게 하는 폭력의 도구이기도 합니다. 영상을 통한 간접체험으로 우리는 고통을 전달받으니까요.
33. 30의 질문을 이어가보죠. 우리는 <시계태엽 오렌지>의 폭력을 기꺼이 영상예술로 소비하고 그 아름다움을 만끽합니다. 이것은 알렉스가 루드비코 치료를 당하며 느끼는 첫번째 감각이에요. 의사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메스꺼움을 느끼면서도 이 영상을 예술로 소비하는 우리는 비정상이 되는 걸까요? 고백하자면 저는 알렉스의 Singing in the rain 퍼포먼스 장면을 몇십번이나 봤는데 말이죠. 그 장면은 볼 때마다 최악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요상한 중독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명장면이라 칭송한단 말이죠. 우리는 루드비코 치료법도 듣지 않는 꼴통들인걸까요? 눈꺼풀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어서 그럴까요? 보면 볼 수록 이 영화 자체가 루드비코 치료법이란 의심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34. 다시 시작된 루드비코 실험에서 알렉스는 고통스러워합니다. 눈깔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절규하는 알렉스를 보면 도무지 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재미있는 건, 영상 자체보다 영상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베토벤 교향곡에 알렉스가 더 크게 반응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저 예술을 이런 개떡같은 실험에…. 자기가 좋아하고 위대하다 느끼는 예술의 훼손에 미칠려고 하는 거죠. 뭔가 모순되지 않나요? 마약탄 우유 처먹으면서는 베토벤 교향곡을 잘만 음미하더니. 그 경쾌한 노래를 강간하면서 부른 주제에 무슨 소리일까요? 영화는 이중적입니다. 베토벤과 음부를 붙여놓을 때는 언제고 알렉스를 통해서는 예술이 폭력과 결합되는 게 고통이라며 부르짖으니 말이에요.
35. 동시에 이런 생각도 가능합니다. 예술 지상주의자들에게 가장 큰 모욕과 고통은, 예술을 훼손하고 도구로 써먹는 거죠. 그 꼬장꼬장한 알렉스가 곧바로 잘못했다면서 징징대잖아요. 잠깐…..큐브릭이 Singing in the rain을 어떻게 써먹었더라?
36. 이제 실험 효과를 확인할 차례입니다. 무대 위에서 폭력적인 인간과, 헐벗은 여자를 알렉스 앞에 데려다놓지만 알렉스는 아무것도 못해요. 실험은 분명히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건 “선한 인간” 이 아니라 거세된 “무력한 인간”이죠. 공권력은 인간성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사회 안에서 모난 인간들에게 정을 꽂아넣고 후려칠 뿐입니다. 루드비코 실험만 없을 뿐이죠. (비슷한 짓을 동성애자들에게 했다고 들었는데….)
37. 집에 돌아온 알렉스는 떨떠름한 부모의 대응에 화가 납니다. 그리고 하숙생이란 녀석이 모욕을 하자 화가 나서 한대 치고 싶지만…..속이 안좋아져서 트림만 하고 말아요. 알렉스의 본성은 바뀐 게 없어요. 그냥 신체적으로 사람을 때리지 못하게 된 것일 뿐. 재미있게도, 큐브릭은 “가정”에 대해 아무 신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엄마 아빠란 작자가 친아들에게는 무력하고, 혈육의 정 같은 것도 거의 없어 보여요. 부모자식의 유대감은 월세 같은 걸로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걸까요. (<샤이닝>에서도 아버지란 작자가 그렇게 아작을 내고 다니는 걸 보면….)
38. 집에서 쫓겨난 알렉스는 험한 꼴을 다 당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웃기게도 알렉스를 “피해자”로 묘사합니다. 보라!!! 이렇게 나약해져서 두들겨 맞는 이 어린 양을!! 노숙자에게 처맞고, 예전 동료였던 이들에게 처맞고…. 여기서 섬뜩한 건 그렇게 돌아이짓을 하고 다닌 알렉스의 동료들이 공권력의 수호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격 따위는 중요치 않습니다. 법과 질서를 논하는 이들 역시도 인간이고, 그건 언제든지 폭력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알렉스가 맞을 때마다 뿅뿅!!!
39. 정말 희한하게도 알렉스는 예전에 난동을 피웠던 작가의 집으로 향하게 됩니다. 거기서 자기가 누군지 들통날까봐 쫄지만 가면을 하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며 안심하죠. 작가의 집에 사는 저 보디빌더는 대체 어떤 관계인걸까요? 중요한 건 알렉스에게 베푸는 작가의 선의가 순수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루드비코 치료법의 실패증거로서, 현 체재를 부정하기 위한 하나의 재료로서 중요한 거죠.
40. 이 멍청이는 목욕하면서 Singing in the rain을 흥얼거립니다. 작가는 알렉스가 그 때 그 사람인 걸 깨닫고 부들부들 떨죠. 목욕을 마치고 뻔뻔하게 식사를 마치던 알렉스 옆에 두 사람이 포위하듯 자리합니다. 한 쪽에는 신체적으로 연약한 인간이, 반대편에는 실체적으로 강건한 인간이 알렉스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어요. 어차피 알렉스는 이제 힘으로 뭔가를 어찌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지만요.
41. 한 때 사랑하던 예술이 이제는 듣기만 해도 괴로운 것이 되는 기분은 어떤 걸까요. 이쯤되면 큐브릭의 의도가 의심스럽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술을 가벼이 아는 사람들에게, 별 거 아니지만 그냥저냥 좋던 예술을 일단 망쳐놓는 것으로 그 가치를 역설하는 게 아닌가 의심도 되네요. 너네 이제 Singing in the rain 이전처럼 못듣겠지? 베토벤 교향곡 9번 들을 때마다 찜찜하지? 그러니까 나처럼 망쳐놓는 돌아이가 나타나기 전에 열심히 듣고 예술을 좀 더 사랑하는 게 낫지 않겠어? 예술의 가치를 두고 인질극을 벌이는 거라고 할까요. 물론 예술에 대한 가치를 진지하게 논하려는 것보다는,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지켜줘야 한다”는 특유의 계급적 애착을 박살내려는 의도가 더 클 것 같습니다.
42. 작가네 패거리도 알렉스를 수단으로 여기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술을 통해 고문하는 건 실험하던 박사와 다를 것도 없어요. 베토벤 교향곡을 듣다가 알렉스는 창밖으로 뛰어내립니다. 이걸 보니까, 예술이란 인간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힘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해요. 위대한만큼 위험한 거죠.
43. 알렉스는 죽지 않습니다. 온 몸에 깁스를 해야 하지만 어쨌건 목숨은 건졌습니다. 부모님들과도 화해 비슷한 걸 하고, 일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파랑머리의 의사가 하는 심리 검사에서 알렉스는 정상인의 사고와는 한참 동떨어진 엉뚱하고 폭력적인 경향의 응답을 합니다. 네. 슬슬 돌아오고 있는 거죠.
44. 장관이 찾아오고, 밥을 먹던 알렉스에게 과격한 치료에 대해 사과하며 언론플레이를 펼칩니다. 알렉스는 너무 자연스레 뻔뻔하고 탐욕스럽게 장관이 썰어주는 음식을 받아먹습니다. 그리고 장관은 전체주의에 반대하던 작가 무리가 사회에서 배제되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건 이것대로 암울하죠. 결국 전체주의에 반대하던 지성은 공권력에 패배한 셈이니까요.
45. 알렉스는 장관의 선물, 커다란 스테레오 스피커를 받고 좋아하며 언론사들의 카메라 플래쉬에 휩쌓입니다. 멋도 모르고 좋아하던 중 갑자기 루드비코 치료를 받던 얼굴을 만듭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은 알렉스가 눈이 깔린 곳에서 수많은 사람의 박수를 받으며 “섹스”를 하는 광경입니다. “나는 치료됐어!!” 그에게 욕망이, 폭력이, 루드비코 치료법 이전의 자신이 돌아왔습니다.
46. 예술을 되찾고, 폭력도 되찾았네요. 알렉스에게 축하를!!! 이 불쌍한 청년은 정부와 반정부 인사들에게 계속해서 휘둘릴 수 밖에 없겠지만. 그런데, 알렉스가 구제불능인 게 과연 좋은 걸까요. 또 강간하고, 사람을 때리고 다닐 텐데요.
47. 재미있는 건 이 영화속에서 보여주는 폭력이 점점 더 교묘하고 알아차리기 힘들어진다는 점이죠.누가 봐도 선명하고 극악한 알렉스의 폭력은 알렉스의 선생이 휘두르는 협박, 알렉스를 붙잡은 경찰의 폭력, 알렉스를 가둬놓는 교도소 내의 폭력, 루드비코 치료법, 반정부 인사의 고문, 그리고 정부의 사과와 회유로 이어집니다. 알렉스의 폭력은 나쁘고 끔찍하다는 걸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지만, 영화는 의도적으로 알렉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래도 되는 명분과 이유를 주고, 그 수법 또한 폭력이 아니게끔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살인범을 교도소에 가두고, 소리 빽빽 지르지만 규칙을 가르치는 게 뭐 폭력인가요? 목사님이 설교하는 것도 폭력입니까? 정신과에서 치료받는 것도 폭력이에요? 다친 사람 입원시켜주고 음식 떠먹여주면서 선물까지 주는데 이것도 폭력입니까?
48. 엔딩 크레딧과 함께 나오는 Singing in the rain을 들으면, 우리는 다시 한번 가장 아름다운 것과 끔찍한 것이 결코 구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됩니다. 큐브릭 감독님께서는 사람들이 그걸 행여나 잊을까봐 이 좋은 노래를 영화 말미에 배치시켜 놓고 계시네요. 알렉스가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으며 다시 폭력성을 각성한 것처럼요.
49. 예술은 사람을 죽입니다. 예술은 인격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예술은 폭력성을 다시 일깨웁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교육용으로 예술을 써먹지 말라는 감독의 경고인걸까요.
50. 미친 또라이 영화입니다. 인간의 본성, 선악에 대한 질문은 제쳐놓고서라도 미의식에 관한 질문이 대단히 매력적인 작품이네요. 하지만....아직 전 모르겠어요. 원작부터 미학에 관한 이야기까지, 이 영화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http://dvdprime.donga.com/g5/bbs/board.php?bo_table=review_soft&wr_id=15117
그렇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