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 가을.
루시아 엘리자베스 발콤Lucia Elizabeth Balcombe, 동네에서는 보통 ‘벳시Betsy’ 발콤으로 통하던 영국인 소녀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 때 그녀의 나이에 대해서는 누군가는 13살이었다고 하고 누군가는 14살이었다고도 하는데, 아무튼 한창 사춘기에 들뜰 때였음은 분명하다. 그 무렵에는 설령 훗날의 대통령, 교황, 혹은 여왕이라 해도 혈기에 휩쓸려 기상천외한 짓을 저지르곤 하는 법이다. 만일 벳시 발콤이 그 때 좀 더 철이 들 만한 나이였다면 그녀는 보다 신중하게 행동했을 것이고 이 기묘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역사에 남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비록 섬나라 영국, 그 중에서도 식민 아프리카의 외진 곳에 자리한 섬에 틀어박힌 몸이긴 했어도 그녀는 나름대로 유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동인도 회사의 지부장이었고 어머니는 교양 있고 따스한 사람이었다. 벳시는 언니 제인과 영국 본토에서 기숙학교를 다니며 프랑스어를 배운 적도 있었다. 다만 그 시대의 많은 여자들이 그러했듯 몇 년간의 기숙학교 생활이 끝나자 부모는 그녀를 다시 외진 섬으로 불러들였다. 고적한 섬에 자리한 그들 가족의 보금자리, ‘들장미 저택’에서 벳시 발콤이 찾을 수 있었던 여흥거리는 섬을 오가는 잘 생긴 해군 장교들과의 로맨스를 꿈꾸는 정도였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세인트헬레나, 제임스 타운.
그 운명의 날, 섬의 몇 안 되는 항구인 ‘제임스 타운’은 흥분한 수백 명의 군중들로 술렁거렸다. 어두운 밤바다 위를 수십 개의 횃불들이 수놓았다. 그 고적한 섬에 일찍이 한 번도 모인 적 없는 숫자의 병사들이 몰려들어 총칼을 쳐들고 제자리에 섰다.
그 모든 불꽃과, 총과, 칼 사이로 전함 노섬벌랜드는 서서히 항구로 저어 들어왔다. 이윽고 검은 바다에 일렁이던 파문이 완전히 잦아들었을 때 벳시 발콤은 그 모든 것이 단지 한 명의 프랑스인을 데려오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발콤 가문의 터전이었던 그 고적한 섬의 이름은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였다. 1815년 10월. 영국 정부는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 이래 가장 강대한 두려움을 유럽에 몰고 왔던 그들의 숙적을 벳시 발콤의 세인트헬레나에 가두기로 결정했다.
그 땅딸막한 프랑스인의 이름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세였다.
1.
“말 위에서 도시를 살피는 황제를, 그 절대정신Absoluter Geist을, 나는 보았노라.”
- 게오르그 헤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고, 그 45년의 세월 속에 그는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영광과 가장 비참한 몰락을 모두 맛보았다.
그가 혁명의 잔해에서 비상하여 프랑스 황제의 자리를 거머쥐었을 때, 유럽의 모든 군주들이 그의 광폭한 행보를 경계하여 힘을 모았었다. 그리고 황제는 그들 모두에게 마땅한 패배를 선사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그는 이집트에서. 그는 오스트리아를, 그는 프로이센을, 러시아를, 스웨덴을 박살냈다. 열사熱砂의 이집트부터 동토凍土의 러시아까지 그는 모든 유럽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며 싸웠고 승리하였다.
허나 그는 결국 도버 해협 너머의 영국을 정복하지 못했고 그 불씨는 스페인과 러시아로 번져 그의 제국을 불살랐다. 또다시 힘을 모은 유럽의 왕들은 기어이 황제를 좁디좁은 엘바 섬Elba, Isola d’에 몰아넣는데 성공했다. 그 가운데 황제는 다시 한 번 부활하여 그의 군대를 손에 넣었으나 이번에는 워털루의 웰링턴이 그를 무너뜨렸다.
위대한 기회는 두 번 주어지지 않는다. 황제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엘바 때와는 달리 스러져 흩날린 야망과 함께 세인트헬레나에 들어섰다. 한 때 모든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여 발밑에 무릎 꿇린 남자에게 이제 남은 것은 낡은 접시마냥 금이 가 위태로운 자존심뿐이었다.
아직 그의 거처가 될 롱우드 하우스Longwood House가 정비되지 않았기에 황제의 임시 거처는 세인트헬레나의 건물들 중 그나마 그의 품위에 걸맞은 곳으로 결정되어야 했다.
사람들은 그런 곳은 들장미 저택 밖에 없다고 말했다. 황제는 자신의 사람들을 이끌고 들장미 저택으로 들어왔다.
13살, 혹은 14살의 섬 소녀 벳시 발콤과 몰락한 황제의 기묘한 동거는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
“정말 고요하군.”
황제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내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대로 방을 나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결국 용기를 내어 대꾸를 하기로 했다.
“시골이거든요, 무슈.”
황제는 창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의 등을 보며 대화를 나눈 데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문을 향해 걸어갔다.
“프랑스어를 잘 하더군.”
황제가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가족들 중에 제일 잘 하던데.”
이번에도 황제의 말이 나를 잡아끌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무래도 자신이 칭찬을 해준 데 대해 내가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주길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불과 며칠 전 학교를 마치고 돌아왔거든요.”
나는 예의상 이렇게 대꾸했다.
“학교라…….”
황제가 생각에 잠긴 듯이 말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무서운 속도로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무슨 집중 포격이라도 쏟아 붓는 듯 했다. 나 역시 뒤처지지 않으려고 고투를 벌였다.
“프랑스의 수도는 어디지?”
황제가 물었다.
“파리.”
“이탈리아의 수도는?”
“로마.”
“러시아는?”
“지금은 상트페테부르크.”
나는 숨을 헐떡이며 덧붙였다.
“이전에는 모스크바였죠.”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제는 내게로 홱 고개를 돌렸다. 손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꽉 쥔 두 주먹……. 가늘게 뜬 두 눈이 두 개의 잿빛 못처럼 나를 그 자리에 박아 놓았다. 마치 온 몸에 전류가 흐른 듯 그는 몹시 동요하고 있었다. 아니, 거의 미친 것 같았다. 근육이 씰룩거리는 왼쪽 허벅다리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키 라 브륄레(그걸 불태운 사람이 누구지)?”
황제가 다그치듯이 물었다.
너무나 강력한 그의 어조 때문에 나는 말문이 막힌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걸 불태운 사람이 누구냐고!”
보나파르트는 고함을 지르며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그 충격 때문에 모형 함정을 덮고 있는 유리 덮개들이 덜컹거렸다.
“모, 모르겠습니다, 무슈.”
내가 말했다.
“모른다고!”
황제가 웃으면서 말했다.
“넌 아주 잘 알고 있다. 그걸 불태운 사람이 바로 나란 걸 말이야!”
그렇다. 모스크바를 불태운 사람은 바로 그였다. 보나파르트 황제는 전투와 정복으로 수많은 지역들을 황폐하게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모스크바도 불태워버렸다. 그래, 그래서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할까. 대단히 멋진 쇼였다고?
황제는 자신의 능력에 도취된 듯, 기세 좋게 킬킬거리며 웃어댔다. 분노와 동요의 기색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는 기분이 한결 나아져서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함께 웃고 있지 않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 스테이턴 래빈, 『벳시와 황제 : 세인트헬레나의 나폴레옹과 한 영국 소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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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벳시 발콤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두 사람이 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벳시 발콤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보니’라는 애칭으로 불렀고 ― 황제의 수행원들은 그들의 황제가 그를 기꺼이 허락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를 질투하곤 했다 ― 유럽의 몇몇 언론들은 그 사실을 스캔들로 만들기 위해 애쓰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풋사랑에 가슴 졸일 사춘기 소녀와, 세상의 모든 영광과 몰락을 경험한 중년의 황제 사이에 어떤 공통의 관심사가 있어 우정을 나눌 수 있었을까?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몇 가지 문헌이 우리에게 남아있다. 하나는 벳시 발콤이 1844년 출판한 자서전인 『나폴레옹 황제의 유배 생활 초창기 : 내 아버지의 들장미 저택에서 살았던 3년의 나날을 회상하며』. 또 하나는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의 건강을 돌보았던 배리 오미라 박사의 『유배지에서의 나폴레옹』. 그리고 수행원들에 의해 쓰인 잡다한 기록들.
이것들은 모두 원서로서 국내에서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자료가 아니다.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한 스테이턴 래빈의 청소년 소설 『벳시와 황제』 정도가 이에 관련하여 번역된 유일한 내용이다. 물론 소설인 만큼 작가의 창작이 가미되어 있으나, 다행히도 작가는 후기에서 어떤 부분이 가상의 내용이고 어떤 부분이 실제 있었던 일을 가져온 것인지 비교적 자세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소설에서 가장 말이 안 된다 싶은 부분이 실은 몇 안 되는 실화 중 하나라는 것이다. 바로 벳시 발콤이 황제에 칼을 들이대는 대목이다. 이 이야기는 두 사람이 어느 정도 친해진 뒤 벳시 발콤이 무도회에 입고 나갈 드레스를 황제에게 자랑하러 간 데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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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요?”
나는 황제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몸 앞쪽에 무도회 드레스를 들고 섰다.
“비엥(좋구나). 아주 멋져.”
황제가 말했다.
“어디 입고 갈 거냐?”
“토요일에 있을 제독님 송별연에요.”
나는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벳시답지 않게 얼굴이 붉어졌을지도 모른다.
“그 때 그 소위도 온다고 했잖아요.”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드레스가 어떤지 대답을 듣기도 전에 황제는 내 두 손에서 드레스를 홱 채갔다. (…) 나는 몹시 화가 나서 가구들 사이를 이리저리 돌며 황제를 뒤쫓았다. 황제는 마치 자신이 스페인 투우사이고 내가 황소가 된 것처럼 내게 옷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다가 다시 손에 닿을 만큼 아주 가까이로 와서 나를 놀려대기 시작했다. 그 때 머릿속에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황제의 칼집에서 칼을 홱 뽑았다.
“사크르 블뢰(저런 미친 짓을)!”
구르고가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몽툴롱 백작 부인은 ‘헉’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칼을 황제의 가슴에 겨누었다. 물론 그를 해칠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조금 겁만 줄 생각이었다.
“프랑스인이여, 마지막으로 소원을 빌라!”
내가 외쳤다. 언젠가 해적들이 나오는 어떤 책에서 본 적이 있는 대사였다.
“벳시, 그런 장난은 치는 게 아니다.”
황제가 말했다.
“그건 황제의 칼이다. 웰링턴도 그 칼만큼은 빼앗지 못했어. 당장 이리 내놔라!”
황제는 정말 더 이상 장난을 치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장난이 아닌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폐하, 이건 모욕적인 행위입니다!”
구르고가 말했다.
“제 옷을 주세요!”
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다그쳤다. 황제는 나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칼 먼저 내놔라.”
황제가 두 눈을 번쩍이며 날카롭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어서, 마드무아젤.”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여자들 몇몇은 겁에 질려 있었다. 남자들은 겁을 먹기보다는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뭔가 무시무시한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칼은 그냥 칼일 뿐인데, 황제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쯤해서 상황을 되돌릴 필요가 있었다.
나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자루가 황제를 향하도록 돌려서 칼을 돌려 주었다.
“죄송해요.”
나는 다시 두 손을 내밀었다.
“이제 제 옷 주세요.”
황제는 칼을 재빨리 휘둘러 허리춤에 찬 칼집에 넣었다. 정말 매섭게 ‘휙’ 소리가 났다. 나 때문에 심기가 매우 불편해진 모양이었다.
“제 옷이요.”
내가 다시 말했다. 황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보니,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내가 말했다.
“약속하셨잖아요.”
하지만 소용없었다. 황제는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다시 웃으면서 자신의 침실로 달려가 문을 닫았다. 나는 재빨리 황제를 쫓아가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이럴 수가! 황제가 문을 잠가버렸다!
나는 거의 5분 동안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낮게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결국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 판은 황제의 승리였다. 황제는 단 한 번의 뛰어난 급습으로 워털루에서의 패배를 보상받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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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는 이후에 나폴레옹이 하인을 시켜 몰래 그녀의 드레스를 돌려주고 거기에 덤으로 조세핀의 목걸이를, 프랑스 황후의 목걸이를 빌려주기까지 한다.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했을 것 같진 않지만 아무튼 황제는 이 일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작 노발대발한 것은 세인트헬레나의 총독인 허드슨 로Sir Hudson Lowe였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나폴레옹의 신변을 책임지고 관리해야 하는 인물인데,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촌동네 계집애가 유럽의 그 어떤 위대한 영웅들도 감히 하지 못했던 짓을 ― 황제의 칼을 가지고 황제를 겁박하는 일이 벌어졌으니까. 그 대가로 벳시는 포도주 창고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황제는 나중에야 이 일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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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보니가 어쩌다가 이런 지하실에 갇히게 되었는지를 물어왔다. 나는 그 전에 일어난 일들을 전부 들려주었다. 황제가 잔뜩 꼬인 발음을 얼마나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지나치게 쾌활한 목소리를 내던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황제는 창살을 통해 내 손을 잡았다.
“자, 자. 마드무아젤.”
황제가 나를 위로했다.
“이제 우리 둘 다 똑같이 죄수 신세가 되었군. 지난번 동굴에서의 일 생각나니? 이번에는 난 이렇게 침착한데 네가 눈물을 흘리는구나.”
“그때도 무슈 혼자 비명을 질렀잖아요.”
내가 대꾸했다.
“그래.”
보니가 말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죄수 신세를 면할 수 있는 건 아니더구나. 그러니 기운내고 있는 편이 낫지.”
“난 러드슨 쇼오 겨엉은 안 좋아해요.”
내가 투덜거렸다. 황제는 얼근히 취한 내 말투에 웃음을 터뜨렸다.
“울지 마라.”
황제는 ‘감옥’ 창살 사이로 자신의 손수건을 밀어넣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서 두 눈을 훔쳐 내고는 다시 그에게 건넸다.
“명심해라, 벳시. 나는 네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전부 이해한단다. 아마 너희 부모님보다도 내가 훨씬 더 잘 이해할 게다. 풀려나면 나한테 오너라. 내 요리사에게 사탕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다시 웃어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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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벳시는 곧 풀려날 수 있었다.
이는 꽤나 기묘한 일이다. 말했듯 엘바에서의 기적적인 탈출이 실패하고 세인트헬레나로 내몰린 나폴레옹에게 남은 건 오직 자존심뿐이었다. 그의 자존심이란 몰락 속에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마지막으로 긁어모은 독기 같은 것이었다. 언제나 많은 것을 가졌던 인간일수록 잃을 것도 많은 법이다.
핏줄이란 이유로 아낌없이 원하는 바를 내주었던 그의 형제들은 결국 일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동생 카롤린은 가장 총애했던 장군 조아생 뮈라를 꼬드겨 그에게 배신의 쓴맛을 안겼다. 조세핀과 이혼하고 맞아들인 마리 루이즈는 그에게서 완전히 등 돌렸을 뿐 아니라 나폴레옹과 자신 사이에서 낳은 나폴레옹 2세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일평생 만들어온 수많은 적들이 그의 몰락을 고소해했고, 여전히 그를 그리는 충성스런 병사들만큼이나 그를 저버린 배신자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가운데 자존심은 그에게 남은 유일한 몫이었다. 그는 ‘황제’가 아닌 ‘장군’이란 이름으로 부른다는 이유로 숱한 ‘교도관’들과 마찰을 빚었으며 특히 허드슨 로와는 반 원수 지간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벳시 발콤이 자신을 ‘보니’라 부르는 걸 허락했을 뿐 아니라 그녀가 감히 황제의 칼을 자신에게 들이댔음에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인들이 소녀의 무례에 치를 떨고, 유럽의 언론들이 스캔들을 떠들어댔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랬을까. 아무리 많은 기록들이 남아있다 해도, 결국 이어지지 않는 고리들에 대해서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수밖에 없다.
결국 자식들에게 애정을 쏟을 기회가 없었던 나폴레옹에게 벳시 발콤이 딸처럼 여겨졌던 것일까. 아니면 촌구석의 어린 여자아이였기에 화낼 가치도 없다 여겼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실제로 남녀 관계였던 것일까.
거기에 대해서 나는 다만 이렇게 추측해본다. 일찍이 모든 유럽이 그를 마왕과 같이 두려워했고, 그 두려움을 잊기 위해 몰락한 그를 철저히 멸시하려 들 때.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부하가 아닌 유일한 자로써, 오직 벳시 발콤만이 그를 ‘황제’인 보니라 불러주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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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쌀쌀한 감옥에 오니 러시아의 겨울이 떠오르는군.”
“이곳에서는 편히 지내실 수 있을 거예요, 무슈.”
내가 말했다.
“별채에 드는 손님들 대부분은 아주 만족했었거든요. 물론 대개는 군인들과 선원들이었죠.”
“그럼 나는 뭐라고 생각하나?”
“황제이셨잖아요.”
내가 말했다. 난 그저 사실만을 얘기했을 뿐, 그를 칭송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내 말에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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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프랑스……군대……선봉……조세핀…….”
- 나폴레옹의 유언
1821년 5월 5일 5시 49분.
나폴레옹이 죽은 것은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되고 나서 6년이 지나서였다.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 벳시 발콤과 발콤 일가는 세인트헬레나에 없었다. 벳시의 아버지 윌리엄이 나폴레옹의 사적인 편지 몇 통을 몰래 전해주다가 허드슨 로에 의해 추방당했기 때문이다.
말년에 그는 병마에 시달리다 고통스럽게 죽었고,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그의 머리칼에서는 상당량의 비소가 검출되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독살이라 단정할 수 없다. 그는 이미 죽음에 이르기에 충분한 심적 고통을 겪은 뒤였으니까.
그의 시신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세인트헬레나에 묻혔지만, 20여년이 지나, 그를 프랑스로 이장하기 위해 몇 명의 충성스런 신하들이 세인트헬레나로 모여들었다. 사령관 베르트랑. 벳시와 늘 말다툼을 벌이곤 했던 구르고와 시종장 마르샹. 황제가 늘 벳시의 결혼 상대라 놀렸던 르 프티 라스 카즈.
관이 열리자, 나폴레옹의 시신은 거의 생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라스 카즈는 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죽음이 이루어 놓은 것들, 즉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죽음이 만들었다기보다는 삶이 만들어 놓은 듯한 변화들을 목격할 순간, 우리들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한편 벳시 발콤은 1821년 에드워드 아벨이란 남자와 결혼하여 딸을 두었지만, 곧 이혼하였다.
발콤 일가는 호주로 이주했다가 몇 년 후에 런던으로 돌아왔다. 1830년, 나폴레옹 3세 황제는 런던을 방문하여 벳시 발콤을 만나, ‘자신의 삼촌과 우정을 쌓아 그의 말년에 작은 기쁨이 되어준 공’으로 알제리의 토지 500 헥타르를 선물하였다. 1844년, 그녀는 자신과 황제의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을 펴냈고, 1871년, 69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죽었다.
일평생 영국과 대부분의 영국인들을 증오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세인트헬레나에서의 말년에 영어를 공부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Run의 과거형을 Runned로 착각해놓고도 노트 한 바닥을 온통 Runned로 가득 채울 정도로 우직하면서도 필사적인 공부였다.
왜 그가 죽음을 불과 몇 년 앞두고 그토록 영어에 매달렸는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벳시 발콤과 나폴레옹.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