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3D나 4D를 선호하지 않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피하는 편입니다. 특히 4D는 스크린이 작아서 싫습니다. 마지막으로 본 4D는 드래곤 길들이기2 였는데, 용을 타고 하늘을 나는 체험을 해보고 싶어서였습니다. 얼추 기분이 나긴 했지만 기존의 4D에 대한 평가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비슷한 류의 4D가 또 나오면 바로 스킵할만한. 그런데 새로 체험을 해보고 싶은 4D 영화가 나왔습니다. 그렇죠, 감상이 아닌 체험 입니다.
발상은 새로울게 없습니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고 또한 비슷한 류의 컨텐츠들이 이미 나와 있기도 합니다. 다만 이걸 실제로 만들어냈다는거. 상업 영화의 형태로 완성을 시켜서 걸었다는건 평가할만 합니다.
작품의 주제와 형식, 소재와 디테일 등이 조화를 이룰 때 감상의 시너지가 생깁니다. 여기 한 예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말을 못합니다. 신체가 개조됐는데 음성 모듈이 이식 되기 직전에 공격을 받고 도망다니게 됩니다. (이 정도는 홍보차 사전에 공개된 정보이고 이 글에 스포일러를 뿌릴 의도는 없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스포일러가 별로 문제가 될 만한 류의 영화는 아닙니다.) 1인칭 시점 - 내가 문자 그대로 주인공이 되는 영화인데 누군가 갑자기 나 대신 말을 한다면 몰입이 될리가 없겠죠. 주인공 - 내가 말을 못한다는건 영리한 혹은 불가피한 설정 입니다. 그리고 이 설정은 영화를 한 마디로 설명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냥 따지지말고 닥치고 받아들여!' 주인공 - 나는 말을 못하기 때문에 질문도 못합니다. 덕분에 기억을 잃어버린 채 깨어나니 몸은 개조되어 있고 초면인 여자가 아내라고 하고 갑자기 화기로 무장한 무리에게 쫓기고...이런 상황을 그냥 받아 들입니다. 조력자라 주장하는 초면의 누가 나타나 뭔가 앞뒤가 안맞는 설명을 다 하지도 않은채 또 뭔가 황당하고 어려운 일을 시켜도 따지지 않고 그걸 또 그대로 합니다.
다행히도 영화는 현실의 내가 당면한 문제를 따져가며 혼란을 느낄 틈을 주지 않습니다. 전개는 초음속으로 달려나가가는데다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고어씬들과 헐벗은 누나들이 나오는 서비스 시퀀스 등이 혼을 빼놓습니다. 이 영화를 개연성 같은 걸로 까는건 헛총질을 하는 느낌 입니다.
말하자면 그저 내가 초인 - FPS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살육을 즐기면? 그만인데- 저는 그게 잘 안 됐습니다. 몰입에 실패했습니다. 누구나 결국 그럴거라고는 전혀 생각 안합니다. 저와 달리 FPS 게임을 즐겨하고 4D를 많이 접해본 사람이라면 감각이 다를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이 가장 크지 않을까. 그래도 한 번 그밖에 내가 왜 잘 안 됐는지 따져 봤습니다.
보다 일상적인 4D 체험물들 - 이를테면 놀이공원의 감상형 어트랙션과 비교해보면 일단 시야의 문제가 있습니다. 180도, 360도의 시야가 주어지는 쪽이 화질 훨씬 후져도 몰입이 쉽게 됩니다. 하지만 극장에서 이런걸 기대하는건 아직 터무니없죠. 게임과 비교하면 피드백이 문제 입니다. 게임의 캐릭터는 내가 조종하는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현실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그래픽과 작은 스크린, 손가락 근육의 움직임 등을 결국 잊고 몰입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영화는 내가 조종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4D 어트랙션 중에 흔한게 롤러코스터류인데 이건 현실에서도 수동적으로 몸을 맡기는 체험인지라 몰입이 잘 됩니다. 그런데 내가 달리고 총을 쏘고 칼로 쑤시고 하는 능동적인 액션은 피드백 없이 받아들이기만 해서 몰입하는데 괴리감이 있습니다.
표현이 꽤 잔인하다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이 보다 잔인한 영화는 얼마든지 있습니다만 내가 칼을 들어 사람을 찌르는걸 '체험'을 한다고 하면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피가 튀는 장면에서 눈에 뭔가가 실제로 튄다면? 저는 즐기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고어에 별 거부감이 없지만 이 영화는 감각이 달랐고 결코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고어씬을 유지하면서 현실을 살짝 빗겨가 거부감을 줄일 의도였는지 아니면 그냥 감독의 취향인건지- 이 영화는 장르가 본 시리즈 같은 리얼 액션이 아닌 SF 입니다. 신체개조, 사이보그, 사이킥 등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덕분에 '몰입'을 유지하는건 더 어려워졌습니다. 액션이나 상황이 보다 현실에 가까웠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하지 않은 데서 훌륭한 부분이 많습니다. 쉬지 않고 액션씬이 나오는데도 비슷한 장면을 반복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상황에 내던져서 질리지가 않습니다. 물론 시퀀스들이 다 어디서 이미 본 것들이긴 하지만 그걸 1인칭만으로 집요하게 찍은건 최초이기 때문에 진부하다는 느낌도 안듭니다. 영화의 B급 SF 설정들도 취향에만 맞다면 열광할만한 장면들을 여럿 만들어 냅니다. 과격한 유머들도 제법 맛이 나구요. 건물 외벽이나 다리에서의 추격씬 등은 어떻게 찍었나 감탄하게 만듭니다. 아예 평범하게 찍었어도 꽤 볼만한 영화였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흥행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새로운 체험을 해볼 수 있었다는건 맞는데 앞으로 자주 즐길만한 컨텐츠라는 느낌은 안들었습니다. 다만 발전의 여지가 많으니 기다려볼만은 한 것 같습니다.
추이로 보아 오래 버티지는 못할 모양인데, 관심 가는 분은 되도록 빨리 가보는게 좋을 겁니다. 극장에서 보는거랑 나중에 다운받아 보는게 극단적으로 다른 영화일건 분명합니다. VR 버전이 나온다면 또 다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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