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글을 대형 커뮤니티에 올리는 문제에 관해 언젠가는 찬반토론이 벌어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글로 인해서 나와 한때 인연이 있었던 그 당사자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사생활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되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이것은 어떤 권리의 침해로 볼 소지가 있지 않은가 싶고,
하지만 그런 이유로 글쓰기 소재에 제한을 둔다면, 사람과의 부대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다른 사람 이야기를 쓰지 못하게 하는 규정은 또한 지나친 간섭이라는 의견이 나옴직도 하다.
근데 이런 걱정은 내 글쓰기에 대한 근자감으로 여겨져 우습다.
무슨 근거로 내 글이 내 글 안의 등장인물에 대한 사생활 침해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주목받으리라 예상하는가?
길바닥에 기어다니는 한마리 개미만큼의 관심도 못 받고 묻혀버릴 가능성이 훨씬 높지 않은가?
더욱이 내 글이 한 커뮤니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여기저기 복사되어 떠돌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까지 내심으로 하고 있는것을 보면 정말 나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나의 이런 걱정은 그 쓸데없음보다도 그 솔직하지 못함 때문에 더 비난받고 조롱받아야 한다.
나는 정말 내 글의 등장인물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가? 그럼 글을 안 쓰면 그만 아닌가? 아니면 그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싶다는 그런 류의 욕구일 뿐인가? 그러려면 혼자 종이에 적어서 대나무숲에 던져버리고 오든지.
[그 사람]은 한때 스타크래프트도 좋아했었다. PGR의 회원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걱정이 안되는가?
어쩌면 나는 그 사람이 이 글을 읽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버린 이전의 만남과 그때 저질렀던 나의 악의적인 말과 행동에 관해 사과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안그래도 당시에 사과는 많이 했었지만... 그 이상으로 상당 기간 미안해하고 괴로워했던 내 마음을 그 사람이 알게 되기를 원하는 뻔뻔하고 이기적이고 음흉한 속셈이라니.
어떤 도서 커뮤니티가 있었다.
서평이나 독후감이 주된 컨텐츠가 되어야 하지만 뻘글과 영양가 없는 키배들이 더 많았던 그런 커뮤니티였다.
20xx년 초여름이었나 '세상 사는데 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라는 약간은 자계서틱한 글이 올라왔는데
개인적으로 그 글의 골자에 어느정도 공감을 하였지만 대다수의 유저들에게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일단 주장 자체가 너무 비현실적이기도 했지만 그 글을 쓴 사람이 부유한 유학생이었다는게 더더욱 공감을 얻기 힘든 이유였을 것이다.
'너는 부자니까'
'돈이 많으니까 돈에 얽매이지 않을수 있는거다' 라는 식의 댓글이 많았다.
나는 똑같은 제목으로 그 유학생과는 전혀 달랐던 내 가난했던 시절의 체험을 적어 올렸다.
'세상 사는데 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라는 가치관을 가지기 위해서 꼭 부자여야 할 필요는 없다는걸 주장하려 했던 것일까?
어쨌든 똑같은 주장을 하는 내 글은 동정표 때문이었는지 훨씬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때 내 글을 좋게 보아 준 사람 중에 [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당시의 내 글에 댓글을 달지 않았다.
나중에 오프라인에서 나를 만나서 직접 말해 주어서 알았다.
'뭔가 좋은 말을 해주고는 싶은데 감히 뭐라고 쉽사리 댓글을 달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받았었다' 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받은 인상에 비해 나는 너무나도 형편없는 인간이었으므로 머지않아 나의 정체가 드러나버린 것에 대해 3년이 지난 지금으로써는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한다.
온라인상의 대면은 위에 적은 돈 관련 글보다 약간 이전에 있었는데
그 사람은 커뮤니티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게 양질의 서평을 자주 올리고 있었다.
그중 박범신 작가의 '은교'에 관하여 호의적인 서평을 올렸었는데
평소 소설 은교를 탐탁찮게 생각하고 있던 나는 그 서평에 화풀이를 했다.
글쓴이를 공격하진 않았지만 소설 은교를 마구 까내리는 댓글을 단 것이다.
서로 의견이 달랐으니 자연히 어느정도 논쟁은 있었는데 그때 서로 척을 지지 않은게 신기하다.
나름 건전한 토론이었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무튼 그 '돈은 중요하지 않다' 글 이후로 그 사람은 온라인상에서 내게 호의적으로 다가왔고
그때만 해도 영문을 몰랐던 나는 '괜찮은 서평가' 정도로만 여겼다.
그러다가 어느 비 오는 새벽에 '우울하다. 아무나라도 만나서 술 한잔 하고 싶을 정도다' 라는 내용의 글을 [그 사람]이 썼고
원래 그 커뮤니티가 딱 그정도 시간대에 새벽감성 충만한 <반짝 우울증> 배설글들이 자주 올라오는 곳인지라
나는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고 반 장난삼아 '거기 어딘데?' 하고 댓글을 달았다.
답글은 달리지 않았고 다만 몇시간 후 새벽동이 터 올 무렵 쪽지로 '저녁에 한잔 합시다. 제가 사겠습니다'라고 왔다.
'뭐야... 이사람 진짜 우울한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이런 쪽지를...'
이렇게 생각하면서 답장을 보냈다.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내 카톡은 뭐뭐뭐 이긴 한데 이따가 마음 바뀌면 그냥 없었던 일로 해도 돼.'
그런데 야간 근무를 마치고 낮에 자고 일어나 보니 정말로 만나자는 카톡이 와 있었고 그렇게 나는 [그 사람]과 오프라인에서 만났다.
나는 지금까지 [그 사람]의 성별을 밝히지 않았는데 오프라인에서 만나기 전까지는 남자로 알고 있었다. (나도 남자)
평소에 올리던 글에서도 남성다운 호쾌함이 느껴졌고 주로 남자들이 이야기하는 철권 같은 게임 떡밥에도 종종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딱 한번 이 사람 여자가 아닌가 의심스러워 직접 댓글로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남자의 자위행위에 대한 떡밥이 흥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 사람]은 약간 그 떡밥에 대해서 잘 모르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댓글을 달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걸 몰라? 너 여자 아냐?'하고 물어보았는데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고 그 사람은 대충 얼버무렸던것 같다.(어쨌든 당시의 나는 속았다)
그 사람은 항상 나를 형이라고 불렀었고 말투도 그 커뮤니티의 성격상 약간은 오버스럽다 할 정도로 '~ 합니다. ~ 했습니다. ~지 않습니까?'이렇게 극존칭이어서 (따지고 보면 이게 그 사람이 남자라는 근거는 아닌데... 존칭의 문제라기보다는 여성스러운 귀염성의 부재 측면에서일까...) 나는 그가 남자라는 사실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약속장소로 출발하면서 친구에게 이런 카톡을 보내기도 했다 <나 지금 인터넷에서 알게된 모르는(?) 남자랑 만나러 가는데 이거 괜찮은거냐 시발>
오프라인에서 만나기로 하고 약속장소에 도착해 인상착의가 어떻게 되느냐는 나의 질문에 '말랐고 머리가 길다'라고 대답을 듣고도 '흠. 음악하는 친구인가'라고 생각하며 라커 김경호를 떠올렸을망정 '읭? 설마 여자?'라는 의심이 전혀 들지 않았을 만큼 온라인에서의 인상은 남성적이었다.
그 사람은 약속시간에서 약 30분 가량 늦었다.
낯선 도심가의 한복판에서 나는 열심히 <음악 할 것 같은 머리 긴 남자>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어떤 여자가 헐레벌떡 가까이 오더니 말했다.
"저기... 뭐뭐뭐 님 맞으시죠... "
여자는 분명 온라인상에서의 내 닉네임을 불렀지만 나는 어쩐지 다른 누군가를 찾는 것이라 생각하여 무심코 누구를 찾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뒤늦게 '헉... 지금 내 닉네임 말한건가'하고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