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E를 알게된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갑니다. 강산이 2번 바뀌어가는 때에, 그들이 남겨준 셀 수 없는 경기들과 세그먼트들은 제 삶의 큰 즐거움과 활력을 안겨다줬습니다. 한창 재밌게 즐겨봤던 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역시 재밌게 보고있고요. 그래도 사람마다 평생을 가도 잊혀지지 않을만한 가슴 뛰는 멋진 추억이 간직되었던 시기가 있을테고, 저 역시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력 전체를 돌아보면 의외로 부딪힌 시간은 많이 없었지만, 대립을 본격적으로 한것은 단 한달간이었으나 저에겐 그 어떤 대립보다도 격렬하고 멋진 빌드업으로 설레게 했으며 결말 역시 대단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아직까지도 저에겐 이때만큼의 설렘과 흥분을 가지게 하는 대립은 없었으며, 앞으로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정말 최고의 레슬러로 꼽는 더 락과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 그들의 대립중 가장 뜨거웠던 시기였던 2001년 레슬매니아 17을 회고해보고자 합니다.
2001년 초는 WWF의 운명을, 스포츠 엔터테인먼트의 판도 자체를 바꾼 성인 취향의 애티튜드 시대의 정점을 달려가는 시기였다. 2000년의 흥행을 이끈 중심 인물들인 더 락과 트리플 H는 맥마흔가가 얽힌 서로간의 지겨운 대립을 통해 크게 성장했으며, 특히 더 락은 성공적인 선역 정착을 넘어 시대의 또 다른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커트 앵글은 데뷔한지 1년도 안되어 WWF 챔피언에 오르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행보를 걸었지만 찌질하면서도 막상 경기에서 붙으면 전혀 얕볼수 없는 악역으로서의 잠재력을 나타내었으며, 터줏대감 언더테이커는 장의사에서 폭주족이라는 파격적이지만 성공적인 기믹전환으로 사실상 또다른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걸출한 스타들의 성장과 탄생, 변화에도 불구하고 정점을 향할 수 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남자 덕분이라는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악덕 회장’ 빈스 맥마흔과의 대단한 대립을 성공으로 이끌며, 당시 시대와 업계 전체의 역사를 설명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된 텍사스 방울뱀,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이 뺑소니 사고를 딛고 2000년 9월 언포기븐에 약 1년만에 복귀하면서 WWF는 더 큰 탄력을 받았다.
틀에 박혀있는 예측을 거부하는 수많은 사건들과 경기들, 그것을 빛내는 스타들의 모습에 사람들은 크게 열광했고 미쳐갔다. 그렇게 이 프로레슬링이라는 컨텐츠에 미쳐있고, 미쳐가는 자(Wrestlemania)들의 의지와 사랑을 분출해줄 무대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영광의 스테이지의 대미(Main event)이자, 승리시 업계의 정점에 오를수 있는 WWF 챔피언쉽에 참가할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며 가시밭길인 로얄럼블이 2001년 1월에 벌어졌다. 그 곳에서 스티브 오스틴은 다시 한 번 승자가 되었다.
그 무렵 그는 자신의 프로레슬링 커리어뿐만 아니라 인생자체를 끝낼뻔한 추악한 짓거리를 사주했던 트리플 H와 서로를 패죽여버릴 기세로 대립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날 역시 WWF 챔피언쉽 경기를 펼치며 정상의 자리를 탈환하려던 트리플 H의 야망을 벨트샷으로 박살냈으며, 역시 가만히 있을리 없던 트리플 H는 바로 로얄럼블 매치때 링으로 입장하려던 오스틴의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두들겨 팼다.
경기에 참가하기도 전에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있었지만, 그럼에도 끝끝내 링으로 들어온 이 업계에서 가장 터프한 XXX의 의지를 막을자는 적어도 그 지옥의 무대에 들어왔던 다른 29명의 선수들중에선 아무도 없었다. 그와 정상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Peoples Champion도, 단일 로얄럼블 사상 최장 생존기록이자 최다 참가자 제거 기록을 세우며 그날 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기세였던 Big Red Machine도 예외는 되지 못했다. 로얄럼블 사상 최초의 3회 우승자 탄생이었다.
그런 최고의 선역인 그가 잠시 1999년 11월의 교통사고로 약 1년간 자리를 비웠던 때, 더 락은 그의 공백을 메우는 것을 넘어 업계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데 큰 힘이 된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1999년 3월 레슬매니아에서 가진 오스틴과의 WWF 챔피언쉽에서 패배했지만 당시 악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환호를 받을정도의 엔터테이닝 능력을 보여줬으며, 그 반응과 능력을 발판삼아 선역으로 전환하여 본격적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했다. 빠른 말속도와 슬랭으로 이뤄진 뛰어난 입담과 박진감 넘치는 경기들을 보여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Peoples Champion이라 칭하는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 와중에 역시 최고의 악역으로 떠오르며 성공적으로 독자적인 입지를 만든 트리플 H와 맥마흔 가문과의 긴 전쟁을 벌인끝에 WWF 챔피언 자리에 오르며 최후의 승자가 되는데 성공했다.
그 후 WWF에 데뷔한지 1년도 안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커트 앵글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며 타이틀을 뺏겼고, 타이틀 탈환 도전도 번번이 실패하면서 레슬매니아로 갈수 있는 지름길인 로얄럼블 매치에서도 탈락했다. 그 시기에 스티브 오스틴의 교통사고 가해자라는 오해까지 받으며 피해자와 투닥거리다가 오해를 푸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답게 그런것에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고, 타이틀을 뺏긴지 4개월이 지난 2001년 2월 노웨이아웃에서 그를 위한 복수의 시간이 다가왔다.
당시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레슬링 도사’의 경지에 오르진 못했지만, 그래도 커트 앵글은 챔피언다운 강력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타이틀을 수성하던 지난 4개월간 외적인 도움을 많이 받긴 했지만 더 락, 언더테이커, 트리플 H등 기라성같은 스타들을 큰 무대에서 꺾으며 힘겹게 얻어낸 타이틀을 지켜내고 있었다.
심지어 스티브 오스틴, 언더테이커, 트리플 H, 더 락, 리키쉬가 참가한 현재까지 전무후무한 6인 Hell in a cell 매치에서도 끝끝내 살아남은적도 있었다. 그런 과정들이 헛된것이 아니라는 듯 악랄한 경기 운영으로 Peoples Champion을 괴롭혔으며, 락 바텀과 피플스 엘보우를 킥아웃하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한달 앞으로 다가온 최고의 무대의 대미를 장식하기엔 너무 일렀을까, 결국 2번째 락바텀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상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챔피언 벨트 탄생이래 가장 젊은 나이에 WWF 챔피언 자리를 차지했던 더 락이, 그의 경력에서 6번째로 WWF 타이틀을 얻어냈다. 이 6회 챔피언 역시 사상 최초의 업적이었으며, 그가 데뷔한지 5년도 안됬을 때였는데 이뤄진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영광보다도 더 중요했던건, 이 업계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꿈꾸는 레슬매니아 메인이벤트 무대에 다시 참가할수 있다는것이었다. 무려 3년 연속으로 메인이벤트에 참가하는 것이었지만, 이전의 2년에서 그는 원치 않던 결과를 맞이해야만 했다.
한창 치고 올라가던 1999년에는 이제 그가 맞서서 넘어야 할 산에게 아직 넘을수 없는 격차를 실감해야만 했다. 정점에 오를때가 왔다고 판단되었던 2000년에는 레슬매니아 메인이벤트의 암묵적 관례였던 선역 승리공식이 빈스 맥마흔의 배신으로 인해 깨졌고, 그는 그 희생자가 되어야만 했다. 그 해결하지 못한 과제에 도전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챔피언 자리가 바뀐 그날, 레슬매니아에 앞서 스티브 오스틴은 자신의 최대목표 집중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된 대립을 종결지었다. 몇개월만에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증오스러운 상대가 된 트리플 H와 싱글 경기-스트리트 파이트-철창 경기의 3단계의 지옥(3 Stage of hell)으로 이뤄진 사투를 벌인 것. 이 시합을 가장한 싸움은 그 부제에 걸맞을정도로 처절했으며, 그 해의 명경기 1위로 선정되었다.
서로 죽고 죽이려는 싸움의 승리는 간발의 차로 트리플 H가 가져갔지만, 사실상 승자란걸 찾아보기 힘든 경기였다. 이런 인식과 감상을 더 강하게 심어주려는 듯 ‘패자’ 오스틴은 스터너를 날리며 의기양양하게 퇴장했다. 대립을 종결지어 장애물이 사라진 이상 거리낄건 아무것도 없었다. 교통사고에서부터 시작된 길고 지옥같았던 빌어먹을 여행에서 돌아왔음을, 1달 뒤에 있을 위대한 스테이지의 주인공에 오름으로써 알리는 일만 남아있었다.
짐 로스(WWF 아나운서): 더 락이 레슬매니아로 갑니다. 믿겨지십니까? 65000명 그 이상의 관중을 수용하는 휴스턴 애스트로돔에서, 더 락과 스톤콜드가 WWF 챔피언쉽을 펼칩니다!! - 노 웨이 아웃 2001 WWF 챔피언쉽 경기 종료후
노웨이 아웃 2001 다음날인 2월 26일, 애리조나 주 피닉스에서 열린 RAW의 오프닝을 새로운 WWF 챔피언이 장식했다. 화려한 남방을 입고, 한 손에 챔피언 벨트를 들고 열화와 같은 환호성을 받으며 입장한 더 락의 발걸음은 무척 위풍당당했다. 그러나 시원한 복수에 성공했지만 아직 성이 풀리지 않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상대 모습을 희화, 흉내내는 특유의 조롱법으로 커트 앵글을 도발하며 당장 링으로 나오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가 진짜 비즈니스를 가져야할 상대를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도발 직후 타이탄트론에서 들려온 것은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영웅찬가가 아니었다.
쨍그랑
전날 대혈전의 여파로 이마에 반창고를 붙인 모습이었으며 그 혈전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오히려 애초에 승패따윈 상관없었고 상대를 죽도록 패주며 그 지긋지긋한 악연을 종결한것에 대해 만족한 듯 미소까지 머금으며 입장로를 걸어왔다. 여전히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링에 들어온 텍사스 방울뱀은 세레모니를 끝마치자마자, 조만간 맞대결할 새로운 챔피언에게 한마디했다.
“내가 여기에 온건, 꼭 말하고 싶은 2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락, 우선 WWF 챔피언이 된걸 매우 축하한다. 커트 앵글도 최선을 다했지만, 더 나은 녀석이 이겼고 네 녀석이 더 강했지. 그렇지만 한가지 조언을 해주고 싶다. 네가 WWF 챔피언 자리에 있는동안, 그리고 챔피언으로서 레슬매니아에 참가하는 그 순간까지, 그저 건강히 잘 있어라(Stay healthy.). 무조건, 건강히 잘 있으라는 말이다.”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상대가 그 누구이든 장벽이 될 거슬리는 자들에겐 말보다 주먹이 먼저 앞서는 그가 주먹 대신 충고이자 경고를, 그 나름대로의 최대한의 존중을 담아 보낸 것이다. 그것도 축하인사까지 곁들여서!
그가 이 상대를 어느 정도로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 그들이 앞으로 할 경기가 대체 어떤 무대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펼쳐질 것인지,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같은 레슬매니아 무대에서, 비록 경기는 치열했지만 끝내 자신에게 쓰러졌던 2년 전의 그 애송이가 아니라는 것을 최근 몇 개월 동안 부딪혔던 순간마다 느꼈을 터였다.
그런 존중이 담긴 충고를 남기고 떠나려는 도전자를 챔피언은 가만히 두지 않았다.
“기다려.”
떠나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더 락은 너의 조언에 정말 큰 감사를 표한다. 답례로 스톤콜드 너에게도 더 락이 조언하나 해주지.”
조언이라고? 스톤콜드에게?
“단 두 단어로 말이야. 간단히 말해, 준비하고 있나?(Get ready?).”
역시 이례적이었다. 거슬리면서 필히 박살내야할 적이 등장했는데도, 그도 주먹을 내미는 대신 충고라는 가장 완곡하면서도 뼈있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다. 두 명은 달랐지만 비슷했다. 한쪽은 대단히 화려한 복장과 선글라스를 고집하며 멋을 중시했고, 한쪽은 멋 따위는 장식이라는 듯 수트를 거부하고 간편한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다니며 자신을 업계에서 가장 터프한 XXX라고 칭했다. 하지만 빼놓을수 없는 공통점들이 있었다. 자신의 앞길을 막는 자들에게는 거침없이 주먹을 날리며 맹렬히 달려들었다. 물러섬이란건 전혀 없었다.
그 앞길을 막는 자들이 이 WWF라는 세계에서 정해줬으며 그 세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칭해지고 있는 “나쁜 놈(Heel)”일때는 물론이고, “좋은 놈(Face)”일때도 그 나쁜 놈들과 대접을 달리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두 사람은 스스로를 좋은 놈이라고 칭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거침없이 행동했을 뿐이고, 그 누구의 말과 포지션 정해주기 따위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태도(Attitude)가 같은 좋은놈을 배려하는 전형적인 좋은놈들에게 질려있던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자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 매력에 반해 셀 수 없는 사람들이 그들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지지했으며, 그들은 그런 사람들은 외면하지 않고 함께 호흡하고 호응하는 자신들이 평소 보여주던 태도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행동을 취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그들이 한 시대를 선두에서 이끈자들(Icon)이라고 평가받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그리워하고 있는 이유이다.
뼛속깊이 새길 충고를 주고받았다. 도전자는 다시 챔피언에게 접근했고, 두 사람간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주변을 둘러싼 날카롭고 거대했던 공기, 그리고 그러한 공기와 함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관객들의 환호성. 수많은 스타들의 대면과 대립이 있었고, 그것은 나를 포함해 WWF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으며 그런 쾌락과 흥분이 내가 삶에서 가장 추구하는 바중 하나였다.
그런 위대한 역사의 순간들이 찍혀있는 사진들이 가득한 앨범속에서도 충분히 앞장을 차지할만한 순간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조짐은 스티브 오스틴이 복귀한 이후 그들이 잠깐씩 엮일때마다 보여지고 있었다. 먼저 처리해야할 일이 있고 목적이 같을 경우 동맹을 맺던 두명이었지만, 적이 되어야할 때는 서로에게 주먹을 뻗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아마겟돈 2000 헬인어셀 매치와, 로얄럼블 2001이 좋은 예였다. 그들이 서로를 응시할때마다 관객들은 그 어떤 대립보다도 뜨겁고 특별한 반응과 환호성을 보내주었다. 2년전의 그 분위기와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지만, 이 미친 대립이 올해 최고의 무대의 피날레를 장식할 예정이라니!
잠깐동안 오스틴의 도발을 들은뒤, 더 락은 마이크를 자신의 얼굴 가까이로 고쳐쥐었다.
“If you smell....”
그래,
“What The Rock....”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래, 이제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is cookin”
레슬매니아 메인이벤트다.
Houston, We Have a Problem...
<1> Get Ready <2> Debra <3> 대담(對談) <4> A major problem <5> What the...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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