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직장을 통해 배출되는, 소화되고 난 음식의 찌꺼기를 주요 소재로 다루는 픽션입니다. 그러니까, 똥 이야기입니다. 똥. 혹시나 이러한 소재에 대해 불쾌감을 가지고 있다면 읽지 않는 쪽을 추천합니다. 물론 최대한 덜 불쾌한 방식으로 그것을 묘사하려고 노력하겠지만, 똥을 소금과 후추로 간하고 기름에 튀긴다 해도 똥은 역시 똥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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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속이 좋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배가 아팠다.
나는 최근에 와서야 속이 좋지 않은 것과 배가 아픈 것이 미묘하게 다른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다. 평생을 대식가로 살아오며 충분한 술을 마셔오던 내게, 속이 좋지 않음은 곧 배가 아픔이었고 이는 대체로 변기에 앉아 해결 가능한 문제였다. 튼튼한 위장을 타고났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근골격계에서 시작해 정신머리를 거쳐 내분비계에 이르기까지 문제가 없는 곳이 없는 몸뚱아리를 타고났지만 다행히 위장만은 튼튼하다. 배가 아파서 병원을 간 적이 거의 없다. 회식에 뭔가 잘못된 음식이 나와 모두가 배탈로 고생할 때도 나는 멀쩡했다. 변기에 앉기만 하면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고통의 뉘앙스도, 해법의 미묘함도 필요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면, 변기에 간다. 끝. 디엔드.
그러니까, 아랫배가 쑤셨다.
마지막으로 이런 느낌을 느껴본 게 언제였더라. 중학교 아니면 초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그때는 그렇게 밥을 많이 먹지도 않았고,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았으니까. 식은땀을 흘리며 발버둥치다가 뭔가를 깨먹은 듯한 기억이 난다. 물론 그 시절의 기억이 대체로 그렇듯, 어렴풋하다. 그러다 병원을 갔었나? 아니면 어떻게 변기에서 해결했었나? 어떻게든 해결했으니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인데. 아랫배가 쑤신다. 아프다. 아, 아프다.
문제가 무엇일까.
단기적으로, 어제 먹은 훠궈가 문제일 지도 모른다. 어제는 친구와 훠궈를 먹었다. 그도 나도 최근 별로 좋은 일을 겪지는 못했으나, 다행히 얼굴은 좋아보였다. 그는 마침 섹스를 하고 나온 참이라고 했고, 나는 마침 퇴근을 한 참이었다. 우리는 원래 마라샹궈를 먹으려 했으나, 연초 월요일 새벽에 마라샹궈를 파는 가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훠궈를 먹기로 하고, 훠궈를 먹었다. 아주 많이. 술도 마셨다. 아주 많이. 반년 전처럼.
장기적으로, 식이조절이 문제일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최근에 와서야 속이 좋지 않은 것과 배가 아픈 것이 미묘하게 다른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해결되지 않는 미묘한 고통을 자주 느꼈기 때문이다. 대충 반 년 전부터 여러가지 이유로 식이조절을 시작했고, 다섯 달 동안 몸무게 앞자리를 세 번 바꿨다. 덕분에 전체적으로 컨디션이 상당히 좋아졌는데, 위장은 비명을 질러댔다. 자주 미묘한 고통의 신호를 보내왔고, 잘 해결되지 않았다. 위장 이 새끼는 내가 예전처럼 막 처먹고 막 처마시며 망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미안, 나는 그럴 생각이 없는 걸. 야 그리고 내가 물도 많이 먹고 야채도 많이 먹었는데 니가 이러는 건 솔직히 말이 안 되지.
실존적으로, 삶은 어차피 고통의 연속이며 부조리하다. 나는 날씨를 구타하기는 커녕 멱살 한번 잡아본 적 없지만 날씨는 언제나 마치 그럴 권리가 있다는 듯 위풍당당하게 나를 후려패는 것처럼.
화장실에 갔다. 힘을 주었으나, 나오지 않았다. 힘을 주었으나. 나오지 않았다. 힘을 주었다. 첨단이 모습을 드러내는 기분이었으나,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더 힘을 주다가는 고혈압 내지는 후장파열로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직전까지 힘을 주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더 힘을 주었다면 상황이 해결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일에 내 한계를 도전해보고 싶지는 않았다. 119라도 불러야 하나. 하지만 이런 일로 119를 부르고 싶지도 않다. 뭔가 좋은 방법이 없나. 한 삼십분 팔을 위로 들어올리고 물을 마시고 배를 누르고 별 지랄생쇼를 했으나 소득은 없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고 절망했다. 인간의 존엄을 포기할 수 있는 각양각색의 비법이 있었고, 나는 인간이고 싶었다.
인간. 나는 쿠바의 어부 산티아고가 된 느낌이었다. 온갖 불운 속에서 거대한 존재와 홀로 필생의 사투를 벌이는 바다의 노인. 그래. 나는 거대한 청새치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낚시는 예술이다. 너무 강하게 줄을 당겨도 위험하고, 힘을 놓아도 실패한다. 물론 나는 청새치는 커녕 민물낚시 한번 제대로 가 본 적이 없지만 아무튼 나는 일종의 쿠바의 노인인 것이다. 혼자 이런 생각을 하다가 미친 듯이 쳐웃었다. 아니 이 상황에 얼어죽을 노인과 바다야. 똥독이 올라서 대가리가 어떻게 된 건가.
미친 듯이 웃고 나니 뭔가 기미가 왔다. 그래, 이 기세다. 가자. 그렇게 무언가가 나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뭐랄까, 종교적인 신내림 같은 느낌이었다. 온 몸을 쑤욱 흝고 가는 거대한 흐름에 나는 몸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소설의 한 장면이었다면 몸의 근육이 모두 풀려 눈물과 콧물과 정액과 뭐 등등을 쏟아냈을 것만 같았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나는 약간 탈진했다. 대체 얼마나 무시무시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인 것일까 나는. 너무 궁금해서 변기륻 들여다봤다.
그것은 똥이라기엔 너무 컸다.
진짜로. 미친. 와. 산티아고가 갓 잡아올린 청새치보다는 작겠지만, 상어가 씹고 뜯고 맛본 후에 걸레짝이 된 청새치의 등뼈보다는 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산티아고 조까 내가 바다의 왕이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인간의 존엄이고 나발이고 다 포기하고 사진을 찍어두고 싶은 수준이었다(물론, 사진을 찍지는 않았다. 나는 조금 경탄하고 물을 내렸다. 솔직히 물을 내리면서 전혀 아쉬운 느낌이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다). 내 평생 이런 위대한 결과물을 만들어낸 적은 없다. 한 달에 오백만원 받고 작업한 두꺼운 책도, 두페이지 쓰고 오십만원 받은 원고도, 한 잔에 오만원 받은 싱글 몰트 칵테일도, 이것의 위대함에 비견될 수 없다. 아, 물론 애초에 앞에 나열된 것들은 사실 별로 전혀 위대하지 않다.
언젠가 출판편집자로 일하는 친구가 똥같은 책을 잔뜩 보여주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프로이트가 옳아. 사람들은 항상 똥을 싸고 내 똥 예쁘죠? 하면서 보여주려고 해. 이 종이 쓰레기들을 보라고. 이런 쓰레기를 책이라고 내는 걸로 모자라서 선물까지 하다니. 사람들은 대체 제정신일까.' 그는 커다란 똥을 싸 보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이 정도 똥이라면 자랑해야 한다.
하지만 어디에 어떻게 자랑할까. 똥을 아무렇게나 자랑하는 건 아무래도 시민 윤리에 어긋나는 일이고, 나는 시민이고자 하는 편이다. 뭐, 디씨인사이드 자랑갤러리에 올려본다거나 하는 굉장히 시민적인 방법도 있겠지만 아니 그거야말로 제일 덜 시민적이잖아, 싶고. 페이스북에 글을 쓸 수도 없다(나도 조막만한 사회적 위신이 있는 사람이다). 아, 그러다 피지알이 떠올랐다. 그렇다. 피지알이다. 피지알 하면 똥 아닌가. 나는 그동안 피지알에 꽤 많은 글을 쓰고 지워왔는데, 똥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피지알러, 라는 게 내 정체성의 아주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반대로 내가 피지알러가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런데 똥 이야기 한번 안 했다니. 그래, 오늘이야말로 진정한 피지알러로 거듭날 때인 것이다. 좋아. 픽션의 탈을 쓰고 똥자랑을 하자. 길고 굵고 찬란하게. 자랑이 지시하는 대상 같은 바로 그런 글을 쓰자. 프로이트는 언제나 옳다.
하여 이런 똥같은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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