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눈을 떴을 때 이미 친구 부부는 일어나 있었다. 시계는 여덟 시 삼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꼭두새벽부터 활동하는 부지런한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두서없이 늘어놓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하지만 2박 3일 일정으로 제주도를 찾은 친구 부부가 실질적으로 온전히 활용할 수 있는 날은 오늘이 유일했기에 새벽부터 서두르는 것 또한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어제 사다 놓은 빵으로 아침을 해결한 후 배가 불러진 나는 관대하게도 친구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른 넷과 아이 둘은 여행다운 여행을 위해 밖으로 나섰다. 렛츠런팜은 한국마사회에서 운영하는 경마용 경주마 목장으로, 몸값이 적게는 수십억에서 많게는 백억에 달하는 경주마 더러브렛 품종의 말들이 저마다 이천 평짜리 독방을 하나씩 차지한 채 유유자적 살아가는 곳이었다. 그 말들에게는 호의호식의 대가로 딱 하나의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하루에 두 번씩 암말과 관계를 가져서 자식을 남기는 씨수말로서의 의무였다. 나는 그게 축복인지 저주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고, 적어도 저주는 아닌 것 같다는 모호한 결론을 내렸다. 아마도.
광활한 농장을 둘러보기 위한 트랙터 마차에 모두가 올라탔다. 말솜씨 좋은 아주머니가 코스를 안내하며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었다. 씨수말의 삶에 대한 설명이 나올 때마다 뒷좌석에 앉은 아주머니 일동은 기탄없이 감탄했고, 말들이 교배하는 곳을 견학할 수 있다는 말에 시간을 재차 확인하는 열성을 보였다. 실로 본받을 만한 훌륭한 학습 태도였다. 아쉽게도 미성년자가 포함된 가족은 교배소 견학이 불가능했기에 나는 가 볼 수 없었다.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하여 무척이나 유감스러웠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특히 관심을 기울인 대목은 시정마(始精馬)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였다. 몸값 비싼 씨수말이 다짜고짜 관계를 가지려다가 암말에게 걷어차여서 수십 억짜리 몸을 다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말이 바로 시정마다. 이들의 역할은 암말이 관계를 가질 만한 몸과 마음이 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암말을 충분히 애무한 후에, 본격적으로 관계를 가질 채비를 하고, 이윽고 씨수말의 등장과 함께 질질 끌려 나가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아주머니들은 화통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항상 최선을 다하면서도 단 한 번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시정마들의 삶이 우리들과 흡사한 것만 같아, 나는 문득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트랙터 마차에서 내려 토끼와 조랑말을 구경하고 청보리밭을 둘러본 후 우리는 김녕해변으로 향했다. 바닷가 바로 옆에 김녕함바그라는 일본식 햄버그 스테이크 집이 있었다. 젊은 남자 사장이 요리부터 홀 정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걸 혼자서 해나가는 가게였다. 그러다 보니 도저히 음식이 빠르게 나올 수 없어서, 우리는 대기표를 받은 후 삼십 분쯤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바다는 녹옥처럼 푸르렀고 제주도 특유의 희고 검은 모래는 부드러웠기에 시간을 보내는 일은 전혀 고역이 아니었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받아든 햄버그 스테이크는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맛이었다. 오리지널은 부드러웠고 투움바는 적당히 매콤했다. 모두가 정신없이 뱃속에 음식을 밀어 넣은 후 만족감을 표했다. 나는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해 달라고 요청했고, 친구 녀석이 뒤따라와서 자기가 계산하겠노라 실랑이를 했고, 나는 다시 한 번 더 내가 계산하겠노라 고집을 부렸지만, 몹시 유감스럽게도 지나치게 고집을 부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정말로 내가 계산을 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아침에 친구를 용서했던 건 지나치게 섣부른 결정이었던 모양이다.
식사를 마칠 때쯤 친구의 딸아이가 낮잠을 잘 기색을 보였다. 그래서 친구 가족을 먼저 숙소로 보내고 우리 가족은 마트에 들려 장을 보았다. 그리고 숙소에 돌아가니 친구 가족은 죄다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당연하다는 듯 나도 잤다.
일어났을 때는 벌써 여섯 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내가 제주시에서 플리마켓 행사가 열린다고 해서 우리 가족은 제주로 출발했다. 제주시의 청계천 같은 곳이 아닌가 싶은 산지천에서 열리는 행사였다. 제주시까지 가는 데 한 시간이 걸렸고, 주차할 곳을 찾는 데 다시 삼십 분이 걸렸다. 그야말로 간신히 차를 댄 후에 뒷좌석에서 목을 꺾고 잠들어 있는 아이를 들쳐 안고 길을 나섰다. 행사장으로 가는 내내 아이는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하지만 솜사탕을 파는 곳 앞에 이르자마자 마치 예수의 축복을 받은 소경마냥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축복을 받은 앉은뱅이마냥 두 발로 벌떡 서는 기적을 재현해 보였다. 할렐루야.
플리마켓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다. 백여 미터쯤 되는 거리에 대략 오륙십 개의 매대가 있었다. 정말로 중고물품을 파는 벼룩시장이라기보다는, 영세 수공업자들이 물건을 파는 작은 시장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 또한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아이를 위해 몇 가지 기념품을 사고 푸드트럭에서 배를 두둑하니 채운 후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친구 가족과 재회하여 맥주와 과자로 또다시 배를 채웠다. 여덟 살배기 아이와 네 살짜리 아이는 내일이면 헤어져야 하는 현실을 몹시도 슬퍼했고, 그 슬픔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저희들끼리 티격태격 하다가 결국 하나가 먼저 울고 다른 하나는 부모에게 혼난 후 따라 울었다. 너무나도 평범하고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하루가 저물었다. 친구가 오늘은 문을 닫고 자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제는 코고는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칠 지경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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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일듯한 광경의 묘사네요. 계속 잘 읽고 있습니다.
제주도가 삶의 터전이다보니 관광지로서 타지 분들이 느끼시는 제주도에 대한 글을 읽을때마다 기분이 묘해요. 같은 공간이지만 같은 공간이 아닌 느낌. 허허허. 언젠가 제주도 관광이란걸 해봐야할텐데 말이죠. 잘 놀다 가세요.